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80)화 (80/90)

#80화.

나엘은 절대로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다비드도 예전에 나엘 때문에 울던 아가사를 많이 보았다.

그 모습들을 떠올리면 나엘은 아가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아가사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했다. 항상 아가사를 웃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남자를 말이다.

다비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 안에서 들끓었다.

다비드가 오기가 섞인 목소리를 다듬지 못한 채 케르인 집사장에게 말했다.

“……그래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지금요. 급한 일이에요.”

케르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비드가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걸 본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급한 일인가.

“공작님께 여쭤보면 될 일이지요. 응접실에 계실 겁니다.”

다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 케르인이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다비드 경께서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다.

아가사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비드의 마음에도 훈풍이 부는 듯했다.

다비드의 뺨이 금세 복숭앗빛이 되었다.

케르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세요, 다비드 경.”

“고맙습니다.”

다비드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들었다.

“……아.”

다비드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가사가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흰 깃털을 드레스에 촘촘히 박아 넣은 드레스는 아가사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는 구불구불한 웨이브가 넣어져있었고 뺨은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여있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드레스와 함께 아가사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아가사의 보라색 눈동자였다.

다채로운 색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다비드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비드가 넋을 놓은 채로 아가사를 응시했다. 아가사가 사뿐사뿐 돌았다.

“흐음. 이젠 소매도 잘 맞는 것 같군.”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는 소매가 마치 날개처럼 보였다.

다비드가 떨리는 입술을 물었다.

쿵, 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드레스를 입은 아가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니, 그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도 지금의 아가사를 표현하진 못하리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다비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다음 주 토요일 약혼식에서 공작님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거예요!”

사람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약혼식?’

그 단어가 다비드의 머리에 찬물을 부었다. 다비드가 확장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약혼식이라고……?”

“아, 맞아. 다비드 경. 약혼식에서 입을 드레슨데 정말 어색해 죽겠어.”

아가사가 혀를 빼물고 웃었다.

“어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저 드레스는 나엘을 위한 드레스였던 것이다. 저 아름다움도 다른 남자를 위한 것이고, 저 미소 또한…….

아니, 아니다.

다비드가 제 감정들을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이런 감정들은 다비드의 몫으로 허락된 게 아니었다.

다비드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가 삼킨 감정들이 눈가로 몰리는 것 같다.

다비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이게 아니지. 목소리가 너무 억눌렸잖아.

“큼.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공작님.”

다비드가 간신히 미소 지었다. 그의 붉어진 눈가가 빛에 반사되었다.

다비드의 말에 아가사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네. 이런 건 또 처음이라서.”

그 얼굴에 담긴 것은 분명한 설렘이었다.

다비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정신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나오고 보니 오늘 전달했어야 하는 서류들이 여전히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응접실에서 도망쳐 나온 다비드가 정원 한 구석에 무릎을 짚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감추지 못한 감정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다비드가 내보일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아니, 내보여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처음 아가사를 본 날부터 그녀를 동경했다. 동시에 그녀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로 이 마음에서 아가사를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다비드에게 있어서 아가사는 세상이었고 전부였다.

투둑.

이슬비가 그친 잔디 위에 또 다른 비가 내렸다.

“흐…….”

다비드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터져 버린 심장의 잔해가 눈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것 같다.

“끼잉?”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다비드가 고개를 돌렸다.

“……또리.”

웬일로 메리와 따로 나온 듯 또리 홀로였다. 제 이름을 알아들은 듯 또리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왔다.

다비드의 다리에 몸을 딱 붙이고 앉은 채로 또리가 그를 응시했다.

“깡!”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또리.”

“깡깡!”

또리가 다비드의 다리에 고개를 비볐다. 신수들은 인간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

그리고 신수들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한다. 젬과 젤리가 가르쳐 준 것들이었다.

지금 또리는 다비드의 감정을 느끼고 그를 위로해 주고 있는 거다.

다비드가 얼굴을 찡그린 채로 웃었다.

“위로하지 않아도 돼, 또리. 나처럼 불경한 놈을 위해서 그러지 않아도 돼.”

다비드가 큰 숨을 터뜨렸다.

불경한 놈.

딱 다비드를 위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감히 모시는 주인에게 이런 연정을 품다니.

그 누구도 허락한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다비드가 멋대로 품었고 언제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수습해서 정리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다비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다비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건 몸을 맞댄 또리에게서 느껴지는 체온 때문이다. 간신히 참고 있었던 감정들이 범람해 넘쳤다.

다비드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이 감정이 스스로 멈춰 주기를.

아가사가 이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새까만 재가 되어 버리기를.

다비드가 간절히 기도했다.

* * *

약혼식 드레스는 엠마의 극진한 보호 속에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아마 저 드레스는 일주일 후 약혼식에서나 빛을 보게 되리라.

엠마는 내가 잘 준비를 하기 직전까지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 주었다.

‘장미꽃이 정말 예뻤어요. 정말 신경을 많이 쓰셨나 봐요. 상한 꽃잎이 하나도 없어요.’

나도 알아, 엠마.

게다가 붉은 장미라니. 그 유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나왔으니까.

자신이 빙의하기 전 아가사가 나엘에게 요구했었던 것 중에 하나였다.

‘나엘, 나는 붉은 장미를 선물 받고 싶어. 언제든지 좋아. 약혼식에서도 좋고, 결혼식을 할 때도 좋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나엘에게 그런 요구를 하며 사랑을 갈구하고 또 매달렸다.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은 자존심도 다 내버린 채로 나엘에게 모든 걸 걸었다.

그 붉은 장미를.

그렇게 바랐던 붉은 장미를.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이 바랐었던 열렬한 사랑을.

내가 받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이 감정이 어디서 유래된 건지 모르겠다.

내 안에 남은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의 흔적인 걸까?

예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것들을 이제는 안다.

소설 속 아가사는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린 여자 공작이라는 이유로, 경험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온갖 무시를 다 당했었던 아가사였다.

아가사는 그래서 더 못되게 굴었다. 그 누구도 아가사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잃은 아가사에게는 나엘만이 남았다. 아가사는 나엘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나엘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 나엘을 앗아 가려는 루시아가 미웠고 싫었다.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루시아를 괴롭혔다.

결국 ‘악녀’라는 타이틀 안에는 외롭고 작은 소녀만 남아있었다.

그 애는 평생을 사랑받고 싶어 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바보.”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랐던 바보는 결국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긴 채로 사라져 버렸다.

테이블 위에는 나엘의 손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나엘이 미웠고 그와 동시에 설렜다.

나엘이 뭐라고 썼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읽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사랑받는 방법을 몰라서 남을 사랑하는 방법도 몰랐다.

“멍청이…….”

편지를 거칠게 테이블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참았던 감정들이 물밀듯이 치고 올라왔다.

‘아가사, 이 멍청아. 너 지금 어디에 있어…….’

오늘은, 아니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의 것이어야 했다. 나엘의 선물들은 내가 아니라 그 애가 받아야 했다.

그 사실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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