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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79)화 (79/90)

79화.

다행히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덕에 머리도 정돈하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동안 민망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손님들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큼. 반갑소. 아가사라고 하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님. 저는 황실 의상실에서 일하는 엘레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조수 마르타입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주근깨가 송송 박힌 붉은 머리 소녀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잘 부탁하네.”

“먼저 황태자 전하께서 함께 보내신 선물들부터 전해 드릴까 합니다.”

“선물?”

갑자기 무슨 선물? 예상도 못 했는데.

‘선물’이란 단어에 놀라 미동도 않고 서 있는 내게 누군가 빠르게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 낭만적이시네요! 사실 이렇게 세심하게 챙길 줄 아는 남자들이 몇 없다던데요?”

“루시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루시아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여기는 왜……?”

“엠마가 오늘 공작님 약혼식 드레스 입어 보시는 날이라고 해서요!”

“드레스 구경 왔어, 공작님!”

그 옆에 이제는 완전히 기운 차린 젬도 함께였다.

“여기에 같이 있어도 될까요?”

루시아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얘는 여자 주인공 자리를 포기한 건가……. 아니, 남자 주인공이랑 악녀가 약혼한다는데 이렇게 좋아할 일이냐고.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여자 주인공 바뀐 것 같아.

평화로운 방구석 여포의 생활을 지향하던 내 삶에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우는 기분이었다.

“……구경하고 가.”

“감사합니다!”

루시아가 젬을 꼭 끌어안은 채로 한 자리 차지했다.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엘레나에게 말했다.

“가지고 온 것들을 먼저 꺼내 보시게.”

“네, 공작님.”

엘레나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먼저 이건 장미꽃 다발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고르신 붉은 장미입니다.”

엘레나가 ‘직접’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었다.

“어머, 어머! 정말 낭만적이시네요!”

“그러게요!”

루시아와 엠마, 그리고 마르타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원래 약혼식에 장미꽃 다발이 빠질 순 없잖아요?”

“특히 저 빨간 장미 꽃말이 열렬한 사랑이었지, 아마?”

“황태자 전하의 옷을 만든 지 5년짼데 이렇게 낭만적이신 분인지 몰랐어요!”

아… 불길한 기운이 현실화되는 걸 보고 있는 기분이다.

품에 안긴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달큼한 꽃냄새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꽃다발 받아 보는 건 처음이네. 이런 낭만적인 모먼트를 황태자와 내가 자아낼 줄이야.

근데… 짜증 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고르신 향초입니다.”

엘레나가 연 상자 속에는 아이보리색의 향초가 들어 있었다. 엠마가 그걸 받아서 내 코 앞에 대 주었다.

은은하고 따뜻한 느낌이 나는 향이 잔뜩 퍼졌다. 그것이 장미꽃하고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어머머, 어머머머! 향초라니!”

루시아가 뺨을 감쌌다.

“공작님, 제가 황태자 전하를 모신 세월이 있잖아요? 이런 모습은 처음이에요!”

루시아.

너 황태자 안티팬 아니었냐. 엠마, 너도.

니네 이렇게 갑자기 노선 갈아탈 거야?

“그리고 이건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신 쿠키입니다.”

갈색의 종이봉투를 푸르니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쿠키라. 속 안에 든 것을 하나 꺼내 보았다. 모양이 엉성한데?

엘레나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처음 하시는 일이시다 보니……. 공작님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누가 뭘 처음 했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구우신 쿠키입니다.”

“꺄아…….”

순간 응접실 내부에 말려 들어가는 비명이 울렸다. 마르타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너 오늘 조수로 온 거 아니었냐. 초면인데 니가 E인 건 알겠다.

루시아와 엠마의 눈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쟤들은 이미 안티팬의 본분을 잊었다.

그 반짝이는 눈들의 압박에 못 이겨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너무 달지 않은 게 딱 취향이었다.

“……맛있네. 모양은 중요한 게 아니지.”

엘레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좋아하셨다고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꽃분홍색에 하트가 정신없이 그려져 있는 편지 봉투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마지막 물품입니다.”

편지를 받아 드니 봉투에서는 재스민 향기가 풍겼다. 이런 봉투랑 절대 안 어울리는데.

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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