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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78)화 (78/90)

#78화.

‘평민들은 중요한 이벤트를 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쿠키 같은 걸 만들어 주기도 한대. 나도 받아 보고 싶어.’

나엘의 눈길이 장인이 만든 예쁜 케이크에 닿았다. 나엘이 만들었다고 우기려 해도 우길 수 없는 모양새다.

‘향초는 따뜻한 향이었으면 좋겠어.’

아쉽게도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나는 향초였다.

나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사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특히 아가사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요즘 왜 이렇게 아가사가 그의 하루에 함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나엘이 주먹을 쥔 채로 이마에 댔다. 약혼식을 치른다고 해서 만족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아가사에게 약혼을 제안한 건…….

황후가 나엘의 결혼을 두고 낚시질을 해서, 나엘에게 슈타디온의 배경이 필요해서. 그런 이유보다 아가사를 공식적으로 나엘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일지도.

이 정도면 인정을 해야 하는 건가…….

어느새.

나엘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사이에, 어느새.

이슬비가 스며들 듯이 아가사가 그에게 스며들어 버렸다고.

나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 새로 준비하게. 그리고 요리장에게 일러서 쿠키를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제일 쉬운 걸로.”

디에고가 밝아진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황태자 전하……!”

나엘이 테이블에 놓인 죄 없고 낭만적이며 쓸모없는 것들을 노려보았다.

“꽃은 빨간 장미로, 향초는 따뜻한 느낌이 나는 향으로. 마지막으로 쿠키는…….”

“…….”

“쿠키는…….”

“직접 구우시려는 거죠!”

디에고가 참지 못하고 말을 가로챘다.

“……많이 달지 않은 걸로 준비해 달라고 해.”

나엘이 테이블 서랍에서 만년필과 잉크를 꺼냈다.

“황태자 전하! 혹시 손 편지도 직접 쓰시려고……!”

디에고가 감격에 찬 얼굴로 나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드디어 우리 황태자 전하가 어른이 되셨나 봐요!

나엘이 서랍에 쓸 만한 편지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가서 시킨 일이나 해. 그리고 오는 길에 편지지 좀 찾아오고.”

“네!”

디에고는 빠르게 사라졌다가 다시 빠르게 돌아왔다. 손에는 왜 황태자 궁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핑크색에 하트가 뿅뿅 그려진 편지지를 들고서.

나엘이 복잡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정말로 이게 최선이야?”

“그럼요!! 브륄스 제도의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편지지입니다!”

편지지에도 그런 게 있어?

“제 여동생이 추천해 주더라구요!”

나엘이 피식 웃었다.

토독.

열린 창문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나엘이 창문을 응시했다. 초여름을 적시는 이슬비가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나엘의 마음을 적시듯이.

* * *

“뭐 해?”

“쉿!”

나무 뒤에 숨은 채로 정원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이브라임이 이 시간엔 정원에 있을 텐데 그의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길을 멀리 돌아 밤비와 푸우, 그리고 나머지 아픈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한동안은 이브라임과 거리를 두는 게…….

제 인생을 나한테 배팅한 이브라임 덕분에 마음이 복잡했다.

걔는 어쩜 그렇게 망설임이 없는지.

“나 피해 다니는 거야?”

“응? 으악!”

여기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이브라임이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니, 왜, 왜, 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표정을 보니까 맞네.”

이브라임이 피식 웃었다. 가늘어진 그 눈동자 속에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냥 나를 내쫓으면 되잖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이브라임이 내 머리를 툭 치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 고민하지 마. 그런 거 안 어울려. 아가사는 돈이나 펑펑 쓰면서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게 잘 어울려.”

“이브라임…….”

“모르는 척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거야.”

오늘처럼 이브라임에게서 독기가 사라져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브라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나를 쿨하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

아니, 쿨내가 진동을 하네.

나만 혼자 질척거리고 있었던 거였어? 거참.

이브라임은 평소와 다름없이 젤리와 햇빛 좋은 곳에 누웠다.

나만 너무 신경 썼나.

볼을 긁적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밤비!”

밤비와 조조를 비롯한 다친 신수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신수들은 순조롭게 회복해 가고 있었다. 수의사의 말에 따르면 한 달 안에 예전 모습을 되찾을 거란다.

한 마리씩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

“아쿠, 아쿠! 푸우우우!”

“끼이이잉!”

푸우가 찹찹찹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을 핥았다. 푸우는 하루가 다르게 폭풍 성장하고 있었다. 밤비와 사육사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에서!

“맘마 못 먹어쪄여? 배가 고파쪄여?”

아직 눈도 못 뜬 푸우가 허공에 꾹꾹이질을 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다 비슷한 거지, 뭐.

하.

진짜 심장 아파.

“오구오구, 또 먹고 시퍼쪄여?”

찹찹찹.

그렇게 옷이 더러워지는 건 개의치 않고 혀짧은 소리를 내며 푸우와 행복한 교감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는데…….”

“뭣!”

고개를 돌리니 멋쩍게 서 있는 엠마와 그 뒤에서 내 눈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와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 쥐구멍 좀.’

* * *

다비드가 옷에 달린 장식들을 매만졌다.

오늘은 아가사를 찾아가야 하는 공식적인 이유가 있었다. 코델리아가 두고 간 서류와 다비드가 추가로 준비한 자료들이 옆자리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비드가 설레는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사실 다비드는 매일을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하루에 4시간도 자지 못한 날도 수두룩했다.

슈타디온의 자산 규모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고, 그것을 혼자 도맡아 관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잠을 좀 더 줄여서라도 아가사를 보러 가는 시간이 좋았다.

물론 다비드에게도 보좌관이 있었다. 그들을 아가사에게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다비드는 항상 스스로 슈타디온에 가는 마차를 타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사의 밝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큼, 큼. 너무 사심인가.”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목을 가다듬었다. 다비드가 뺨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볼이 빨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비드가 고개를 살짝 위로 들고는 목을 한 번 더 가다듬었다.

“태연하게 굴어, 태연하게.”

이미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이슬비에 대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다비드가 창문을 살짝 열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를 적시는 비는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비드가 미소 지었다.

왠지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 * *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에 이브라임이 눈을 슬그머니 떴다.

“비가 내린다냥! 이브라임, 들어가자냥!”

젤리가 이브라임의 긴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브라임이 젤리의 볼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나도 알아.”

“비에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냥! 이브라임은 아프면 안 된다냥!”

“왜? 걱정해 주는 거야?”

“그렇다냥. 가족이니까냥!”

“가족?”

이브라임이 감개가 무량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사가 그랬다냥. 함께 살면 한 가족이라고! 이브라임은 내 가족이다냥!”

아가사가?

이브라임이 눈썹을 찡긋했다.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면 나하고 아가사도 한 가족이게?’

가끔 보면 아가사도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낭만적인 소리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브라임이 몸을 일으켰다.

‘가족을 비 맞게 할 순 없지.’

파닥거리는 젤리를 품에 안은 채로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아가사도 엠마의 손에 이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 모르는 이들이 보였다.

‘손님이 오셨나?’

이브라임이 고개를 갸웃했다.

슈타디온에는 손님이 방문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가사에게는 그다지 친구가 없는 것 같았다.

바깥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저택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랄까.

이브라임이 골골거리는 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이브라임의 속눈썹에 이슬비가 맺혔다.

이브라임이 손님들과 2층으로 가는 아가사를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왠지 저들이 달갑지 않았다.

* * *

그들의 정체는 오늘 내 약혼식 드레스를 가지고 온 황태자쪽 사람들이었다.

엠마는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내 등을 떠밀어 저택 안으로 먼저 들여보내곤.

‘공작님께서는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네요, 오호호호홋!’

서로가 서로를 민망하지 않게 볼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만들어 줬다.

하, 내 창피함.

오늘 의상실에서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 지금이 그 시간일 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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