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76)화 (76/90)

#76화.

대신관이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왠지 자신이 아가사에게 휘둘리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까.

돈에 영혼을 판 것 같은…….

이대로 계속 아가사 공작에게 목줄이 잡힌 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관이 착잡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루시아와 젬은 이전에 지내던 방에서 잠들었다.

푸우도 다시 태어났고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루시아도 예기치 않게 저택으로 귀가했다.

여러 일들로 인해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도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달까.

아침이 되기 무섭게 신전에 연락을 보냈다. 신수가 아프다는데 대신관이 뭐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젬이가 낫고 나서 루시아를 돌려보내느냐다.

아, 그냥 새 신전 하나 세워 줘?

깊어지는 생각에 습관처럼 다리를 달달 떨었다.

루시아를 내보내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과거와는 완벽하게 다른 행보였다. 완전 인정!

그래도! 그래도오… 사람이 인정이 있지.

정원에 앉아서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바람이라도 쐬어야 머리가 돌아갈 것 같아서 나와 있었다.

근데 머리가 돌아가긴커녕…….

“아오.”

“고민이 많으신가 봐.”

어느새 다가온 이브라임이 툭 하고 던졌다.

“고민이 많으신가냥!”

젤리도 기운을 되찾았다.

내가 손을 뻗자 젤리가 꼬리로 내 손을 간지럽혔다.

“이제 안 울어?”

젤리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젤리는 씩씩한 고양이다냥! 절대 울지 않는다냥!”

“흐음. 어제… ‘쩨에에에미이이이이가아아아아’ 하던 젤리는 어디 갔지?”

젤리가 파닥거렸다.

“그, 그건 내가 아니다냥!”

“그럼 누구야?”

“누, 누구냐아면!”

젤리가 주먹을 움켜쥔 채로 파르르 떨었다.

“고, 공작님은 눈치가 없다냥! 이런 건 모르는 척해 주는 거다냥! 후에에에엥!”

젤리가 얼굴을 가리고는 훌쩍 날아가 버렸다. 이브라임의 시선이 끝까지 젤리를 쫓았다.

약간, 젤리는 뭐랄까.

울려 보고 싶달까.

“눈치 없는 공작님?”

이브라임이 나를 불렀다.

“풉, 큼.”

“고민이 많아 보이시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사실 이브라임과 젤리만 봐도 둘 사이의 유대 관계가 깊어 보인다. 만약 둘을 떼어 놓으면 젤리가 젬처럼 아플지도 모르는 일.

“루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어. 그렇다고 젬이를 신전으로 무턱대고 보내기엔…….”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 새끼들이 너무 많지. 특히 돈 많은 것들은 염치를 몰라.”

이브라임이 딱 잘라서 말했다

인간 새끼라니… 허허, 소설에서도 귀족들에 대한 혐오감이 짙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 많은 것들… 이 양심이 따꼼했다.

“내가 좀 그렇지……?”

이브라임이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 못난이 넌 제외하고.”

“못난이라니!!”

“그러면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해?”

“이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닌…….”

“알면서 뭘 물어.”

이브라임이 내 말을 잘라먹고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알면서 뭘 물어.

알면서 뭘 물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이 순정 만화 모먼트는 뭐야.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브라임이 나를 힐끔 보았다.

“열 나? 아픈 거야?”

그러고는 서스럼 없이 손을 뻗어서 손등으로 뺨의 열을 잰다.

아니… 한국대학교 순정만화남주학과를 나오셨나…….

“안 아파!”

문득 위기감이 들어 얼른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럼 됐고. 그런데 뭐가 고민이야. 루시아와 젬, 둘 다 안 보내면 되잖아.”

“어……?”

“출퇴근시켜. 슈타디온에 그만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어, 어어?”

그러고 보니 이젠 쓸 만한 꼬봉(?)이 된 대신관이 떠올랐다. 입금만 따박따박 해 주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는…….

대신관은 완벽한 배부른 돼지였다. 절대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못 된다.

바라는 걸 쥐여 주고 루시아를 출퇴근시키면? 프레니가 괴롭히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거고…….

그거 좋은 방법인데?

“그런데, 아가사.”

“응?”

대신관을 구슬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브라임이 나를 재차 불렀다.

“큼. 그 약혼은 어떻게 됐어?”

“약혼? 다음 주 토요일이 약혼식이야.”

잊고 있던 또 다른 심란함이 되살아났다. 아니, 제기랄. 약혼식이요? 그것도 나를 죽일지도 모를 남자주인공이랑?

아직 원작 소설 시작도 안 했는데 죽을 자리 파고 들어가는 기분을 누가 알아주냐고.

“……그거 안 해도 돼.”

“그러기엔…….”

아직 아가사 공작에게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나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리 떼들이 눈을 돌린 건 황태자가 내 옆에 자리 잡고 나서부터니까.

나를 결혼 시장에 풀어 두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묶어 두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이브라임, 그건…….”

“나는 곧 대마법사의 서임을 받을 거야.”

이브라임이 서늘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잠깐. 대마법사의 서임?”

“그래. 원래는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었지만.”

이브라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다.”

지금 그게 그렇게 됐다는 말로 끝낼 일이야? 대체 왜?

이브라임이 대마법사가 되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는 소설에도 나와 있었다. 이브라임이 힘을 이어받고 나면 지금의 대마법사는 곧 죽는다.

‘길어야 일 년.’

이브라임에게 대마법사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이브라임이 대마법사의 힘을 이어받는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성녀로서 전쟁에 가게 된 루시아를 돕기 위해서.

“왜 그런 눈으로 봐.”

“왜 그랬어?”

“뭐?”

“왜, 왜 그런 짓을.”

이브라임의 표정이 느리게 굳었다.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외로움 타잖아.”

“……너 뭘 아는구나.”

이브라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브라임이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감정을 담은 채로 일렁거렸다.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런 결정을 해 버린 걸 어쩌겠어.”

“……이브라임.”

“네가 필요하다며.”

머리가 멍해졌다.

“그걸 외면하지 못하겠는데 어떡해. 너한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걸… 하.”

이브라임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걱정하지 마. 내 아버지는 내가 살려. 세상은 넓고 마법은 많아. 이미 다 늙은 마법사 하나 살리는 게 뭐가 어렵겠어.”

“이브라임…….”

소설에서도 이브라임은 대마법사를 살리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다. 전쟁으로 이브라임에게 방법을 찾을 시간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세상에 생명에 관여할 수 있는 마법은 없었다.

죽음 이후, 비참한 좀비가 되는 것 말고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이쯤 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브라임이 나를 보는 눈빛이 바뀌었고 나를 위한 선택을 한다.

이브라임은 본디 루시아에게 제 인생을 전부 걸었었다. 까칠하기는 해도 한 번 마음을 주면 올인하는 스타일.

이브라임은 어느새 나한텐 순정 만화 남자 주인공이 되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이건 뭐.

산 넘어 산? 아니면 갈수록 태산?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나.

고민이 하나가 해결되는가 하면, 또 다른 고민이 나를 덮쳤다.

“못 주무셨어요?”

“어, 아냐…….”

“눈 밑이 까마신데?”

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티스푼을 꺼내 내 눈에 대 주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아, 엠마.”

“항상 많으셨잖아요.”

“……나 분명히 백순데 왜 이렇게 바쁘지?”

“그러게요. 사업하신다던 건?”

“으으윽.”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산더미였다.

“그래도 할 거야…….”

“욕심이 많으시네요. 오늘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일단, 신전엘 가야 해.”

“아하.”

“가서 루시아 짐을 빼 와야겠어.”

“드디어?”

눈을 덮고 있던 티스푼을 내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이럴 걸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정원을 그렇게 땅두더지처럼 파헤쳐 놓으시곤. 루시아를 못 잊으실 거라고 생각은 했었죠.”

“…….”

남들 눈에는 다 보였구나.

“아무튼 파이팅이에요. 그리고 이건 황성에서 온 편지요, 공작님.”

엠마가 건넨 편지를 펼쳤다. 편지에는 내일 약혼식 드레스를 가지고 방문한다고 적혀 있었다.

약혼식, 약혼식…….

이브라임은 더 이상 약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지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약혼식을 무를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지. 황실을 기만하는 꼴이 된다. 자존심 강한 쓰레기 황제가 가만히 있겠느냐고.

“어으, 머리야.”

엠마가 나를 위로하듯이 등을 토닥여 줬다.

그래, 하나씩 처리하는 거야. 일단 신전부터.

“돈 좀 챙겨, 엠마.”

“네!”

엠마가 활짝 웃었다.

* * *

소설 속에서 대신관은 루시아를 이용해서 세를 불렸다. 루시아를 보고 들어온 사람들 덕분에 수습 신관들의 수도 늘었고 기부를 하겠다며 찾아온 신도들도 늘었다.

부정부패의 최고봉이었던 대신관은 돈을 많이 준 순으로 루시아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걸 나중에 알게 된 루시아가 신전을 엎어 버리고 전쟁터로 떠나 버린다.

대신관의 1차적인 목적을 이루어 주면 루시아를 놓아준다는 뜻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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