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젤리를 손에 든 채로 이브라임이 풀숲을 헤쳤다.
“……젬?”
이브라임이 발견한 것은 새빨갛게 열이 올라서 숨을 간신히 내쉬고 있는 젬이었다.
‘젬이가 아파.’
젤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나 보다. 이브라임이 젬을 반대 손에 안아 올렸다.
젬이 뜨끈뜨끈했다.
젤리가 젬을 손가락질하면서 뿌애애앵 울었다.
“언제부터 그랬어?”
“어, 어어, 어쩨에냥…….”
“왜 말 안 했어, 젤리.”
“쩨미가 마라지 마라구 그래써어냥(젬이가 말하지 말라고 그랬어).”
이브라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재판이 끝났다고 들었다. 아가사의 어깨가 이제야 가벼워지나 싶었는데.
도로 무거워졌다.
젬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그래도 아가사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이브라임이 두 신수를 데리고 긴 다리로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이브라임은 정원 한쪽에 난데없이 등장한 천막을 발견했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그곳에 모여 있는 듯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구운 작물들과 따뜻한 우유 같은 걸 나눠 먹고 있었다.
이브라임이 아가사를 찾았다.
“아가사!”
“이브라임?”
아가사가 놀란 얼굴로 이브라임을 돌아보았다.
이브라임의 손에는 젤리와 젬이가 들려 있었다.
그래, 오늘 허전하다고 했더니! 젬과 젤리가 보이질 않았다.
평소엔 옆에서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아야 하는데!
“젬이가 아파.”
“뭐?”
자세히 들여다보니 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빨개져 있었다. 아가사가 놀란 얼굴로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올라 펄펄 끓고 있었다.
“수의사!”
마침 함께 있던 수의사가 놀라서 달려왔다. 수의사가 젬을 이리저리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신수화한 신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배운 적이 없어서요.”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신수화한 이들을 보지 못했을 테니…….
“어떡하지?”
“루시아를 오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엠마가 제의했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는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얼른 신전에 사람을 보내서 루시아를…….”
“수정 구슬이 있잖아, 아가사. 그게 빠르지.”
“아!”
그간 연이은 재판들로 정신이 없어서 한쪽에 미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적응하는 동안 연락을 안 하는 게 배려인 것 같기도 했고. 나까지 신경 쓰이게 할 순 없으니까.
우리 대화를 들은 엠마가 수정 구슬을 가지러 저택에 뛰어 들어갔다.
젬을 밤비의 옆에 눕히니 밤비가 젬의 이마를 핥았다. 밤비의 따뜻한 숨결이 젬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그런 건 느껴지지도 않는지 젬은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뱉으며 앓았다.
“헉, 헉! 가지고 왔어요!!”
엠마가 수정 구슬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지금 시간이면 루시아도 방에 있을 것이다.
이브라임이 가르쳐 준 대로 수정 구슬을 작동시키자 보랏빛의 은은한 빛이 수정 구슬에 맴돌았다.
[하암… 공작님?]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아!!”
[어머. 깜짝이야.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간 잘 지내셨죠?]
“루시아, 큰일났어. 젬이가 아파!”
[네?]
루시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신수화한 신수에 대해서는 저택의 수의사도 잘 모른대. 루시아가 와서 성력으로 치료해 줄 수 있을까?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지금 준비 중이에요.]
루시아는 행동파였다.
[당장 출발할게요, 공작님.]
루시아의 목소리가 끊겼다. 한숨 돌리며 수정 구슬을 엠마에게 넘겼다.
젬이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루시아… 루시아 온대?”
“응. 지금 바로 올 거래.”
젬이 옅게 미소 지었다. 항상 쫑긋 서 있었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젬의 뺨을 따라 눈물이 떨어졌다.
“쩨에에에엠!”
젤리가 이브라임의 손에서 바둥거리며 울었다. 이브라임이 젤리를 다독였다.
“뚝, 그만 울어.”
“그티망 쩨미가(그치만 젬이가)…….”
이브라임이 엄지로 젤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쥬르 먹을래? 아니면, 고구마말랭이?”
“으으으으, 쩨엘리눙 멍뽀가 아냥(젤리는 먹보가 아냐)!”
이브라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콧물 좀 그만 먹어. 지지야.”
젤리가 이브라임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한 와중에도 피식 미소가 새어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루시아가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굴러 떨어지는 하얀 덩어리를 엠마가 부축했다.
“루시아. 아니, 성녀님……? 루시아? 성녀님…….”
“루시아! 루시아라고 불러! 젬이는 어딨어?”
루시아의 도착과 동시에 저택 내부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금세 엠마와 루시아의 목소리가 정원에 가까워졌다.
“젬!”
루시아가 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흰색 로브에 금색으로 수가 놓아진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이제야 정말 여자 주인공 같네.
“젬, 내가 왔어. 젬?”
잠시 잠에 빠져들었던 젬이 눈을 떴다.
“루시아… 보고 싶었어…….”
눈을 깜빡거리며 젬이 루시아의 손을 끌어안았다. 루시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젬을 쓰다듬었다.
“금방 낫게 해 줄게.”
루시아의 손에서 나온 흰색 빛이 젬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저게 성력이라는 거구나.
루시아의 힘이 흘러 들어갈수록 젬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빨갛던 얼굴도 금방 제 색을 되찾았다.
잠시 뒤, 젬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젬, 괜찮아?”
“으응… 루시아는 젬이 안 보고 싶었어? 나빴어!”
다 나았네.
어느새 익숙해진 젬이의 ‘나빴어!’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젤리의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루시아와 젬이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신수들을 전부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게 맞는 걸까? 저 애들도 교감하고 반려인이 생길 수 있는데.
내 생각에 박차를 가해 준 건 그다음에 생긴 일이었다.
젬의 작은 손등에서 빛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빛이 루시아에게서도 터졌다.
각인(刻印).
루시아와 젬이 서로에게 각인했다는 선명한 표식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동시에 강력한 빛이었다.
루시아와 젬은 절대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젬이 그토록 앓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각인이란 인간이나, 신이 임의로 도장을 찍는 게 아니었다.
루시아와 젬은 서로가 서로를 고른 거였다.
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루시아가 젬에게 간택 당한 거지. 저 정도면… 루시아가 젬이를 입양도 괜찮지 않을까.
‘젬도 루시아와 함께하면 더 행복할 텐데.’
그리고 그날 늦은 새벽, 푸우가 태어났다. 슈타디온에서 처음으로 신수가 태어난 것이다.
푸우는 귀여운 울음소리로 탄생을 알렸고 밤비는 따뜻하게 아기 곰을 반겼다.
감격적이고 사랑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 *
대신관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수석 신관쯤 되면 신전에서 나와 사택을 가지게 된다.
대신관은 그곳에서 가족과 지내고 있었다. 대신관에게는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었는데 둘 다 신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프레니를 양녀로 들인 것이다. 아들, 딸은 조용하게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프레니는 벌써 일반 신관이다.
거기에 성녀까지 정식 등록을 마쳤다. 분명 상쾌해야 할 아침인데 그를 찾아온 소식은 그렇지 못했다.
“간밤에 별일 없었느냐?”
하인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슈타디온 공작 가에서 연락이 와 있습니다.”
“음?”
“간밤에 각성한 토끼 신수가 아파서 루시아 신관님께서 슈타디온으로 가셨습니다.”
대신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슈타디온에서 루시아를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래서 공작님께서 직접 편지를 보내셨는데…….”
하인이 편지를 바쳤다. 대신관이 뭔가 불안한 기분으로 편지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