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재판이 끝나고 백작 가에 도착할 때까지 데이먼 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데이먼 백작이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런 개같은!”
재판이 끝나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떠나던 로살린이 떠올랐다.
멜리슨이 허망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어떻게 누님이 저한테 이렇게… 이럴 수는 없어요! 저는 데이먼이에요! 그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라구요!!”
멜리슨이 악을 썼다.
파문된다는 건 멜리슨이 더 이상 데이먼의 무엇도 누리지 못한다는 거다.
데이먼 백작이 제 자리를 서성거렸다.
“아버지,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놈은 수도원이라도 보내시지요.”
“형!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지!!”
체이스가 이를 악물곤 멜리슨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억울했다. 사고는 멜리슨과 조상이 치고 그와 백작은 아무 죄도 없는데 그 책임을 지는 것 아닌가.
“닥쳐, 이 머저리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몸 간수 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하! 성녀를 얻었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결국 못 얻었잖아! 지금 우리 손에 남은 건 뭐야!!”
데이먼 백작이 아들들을 보았다. 체이스와 멜리슨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데이먼 백작이 바란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냥, 우애 있게 잘 지내는 자식들과 가문의 명예. 그런 것들을 바랐다.
그런데 그중 무엇이 남았나.
“에잉! 다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체이스와 멜리슨이 찔끔해서 방을 떠났다. 평소에 제 아비를 한심하게 보던 체이스마저도 오늘만큼은 약자가 되었다.
‘하. 되는 일이 없어.’
체이스가 이를 아득 물었다.
오늘 아가사와 저녁을 먹으며 로살린이 말한 기회를 만들려고 했었는데 정작 아가사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했다.
“지가 뭐가 그렇게 잘나서…….”
반드시 아가사를 꺾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눈물을 흘리면서 비는 걸 보고야 말겠어.
* * *
며칠 뒤, 데이먼 백작 가에서 멜리슨이 꼬리 말고 쫓겨나는 걸 보았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녀들이 기분 좋게 그날의 일을 떠들어 댔고 엠마도 전해 들었다.
‘공작님이 들으시면 기뻐하시겠지?’
루시아의 일로 심려가 깊으셨으니 분명 좋아할 것이다.
요새 뭐랄까.
아가사는 첫사랑을 겪는 소녀처럼 감성적으로 변했다. 어쩌면 약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물론 엠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러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철학적인 고찰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으아아아! 약혼이 웬 말이냐!’
메리지 블루를 겪는 신부 같기도 하고.
‘하, 짜증 나.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말대로 사춘기 같기도 하고.
음. 약간 미친 것 같으시긴 하네.
엠마가 활짝 웃었다. 사실 마차 사고로 한 달 동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뭐든지 괜찮았다.
건강이 최고지!
“공작님!”
엠마가 이불 속에 파묻혀서 둥지를 튼 아가사를 흔들어 깨웠다.
“왜…….”
“멜리슨이 쫓겨났어요! 파문당했다던데요?”
“오… 잘됐네.”
“루시아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으응, 잘됐네.”
엠마가 힘이 없이 늘어진 아가사를 보면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시든 잔디처럼 늘어진 공작님을 일으킬 수 있을까.
“아!”
엠마가 손뼉을 쳤다.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리는 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들은 건데요! 푸우의 알에 금이 갔대요! 곧 있으면 깨어날지도 모른… 엄마야!”
침대에 파묻혀 있던 누에고치가 우화했다.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난 아가사가 반짝이는 눈으로 외쳤다.
“나가서 직접 볼래! 언제 깨어날 것 같대? 이거 괜찮나? 전에 다비드 경이 데리고 온다던 세계적인 수의사는 왜 안 오지?”
“아, 그분은 사고가 생겨 늦어지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사히 태어날 거예요. 순조롭게 부화가…….”
엠마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아가사가 침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당장 내려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그녀를 보며 엠마가 생긋 웃었다.
‘기운 차리셨네, 우리 공작님!’
한 달간 누워 있던 아가사도, 땅을 파는 아가사도, 그리고 누에고치 아가사도 전부 엠마의 아가사였다.
누군가 아가사를 위험하게 만든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 * *
엠마의 말대로였다.
알에는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푸우가 새롭게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친 듯했다.
밤비가 알을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부화하겠네요.”
엠마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럴 것 같네.”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다. 푸우가 태어나는 순간 반드시 말해 주고 싶었다.
반갑다고,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잘해 보자고.
알 표면은 매끈하고 따뜻했다.
밤비가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으면서도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밤비의 머리도 쓸어 주었다.
“고생했어.”
밤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보는 밤비의 눈빛이 젖어 있었다. 이래서 사슴 같은 눈망울이라고들 하는구나.
“괜찮을 거야. 푸우는 열심히 하고 있어.”
밤비가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새로운 신수가 태어나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오늘따라 저택이 조용했다.
메리와 또리도 숨을 죽인 채로 알을 보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을 애들이.
“오늘은 다 같이 여기서 먹고 자고 해 볼까?”
“좋아요!”
엠마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뭔가가 빠진 것 같은데? 뭐지, 묘하게 불안한 이 기분은.
* * *
이브라임은 오늘도 대마법사의 저택에 있었다. 완연한 중년의 사내가 된 대마법사가 이전보다는 중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오늘이 지나면 이브라임은 완벽하게 대마법사의 힘을 이어받아 마도룡이 되는 것이다.
힘의 계승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대마법사가 이브라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버지는 이제 무엇을 하실 겁니까?”
마도룡은 본디 인간 세계를 수호하는 존재였다. 이브라임의 아버지 역시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 차원의 결계를 지키고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더 이상 그런 의무가 대마법사를 짓누르지 않으니 그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악우를 만나 볼까 한다.”
“악우? 친구면 친구지 악우는 또 뭡니까.”
“욕심이 너무 많아서 제 신세를 제가 망치는 친구지.”
대마법사가 선선하게 웃었다.
이브라임은 그런 멍청이를 왜 만나는 거냐며 툴툴대다가 대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버지한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대마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많지. 바닷속에 인어도 있고, 키르베우스 산에 난쟁이도 있고, 테르샤 숲에 엘프도 있고.”
아.
이브라임이 고개를 돌렸다. ‘동화 속 이야기가 실존했다.’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 끌려다닌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이브라임의 뒷모습을 보는 대마법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만나려는 친구는 그들이 아니었다.
좀 더 오래되고 초월적인 존재를 만날 생각이었다.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 * *
이브라임이 피곤에 지친 얼굴로 슈타디온 저택에 돌아왔다.
마지막은 평소보다 더 끔찍하고 거대했다. 대마법사는 위대한 힘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브라임은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리 큰 힘을 받아들였는데도 피곤한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저택이 조용했다.
“……젤리?”
이브라임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브라임이 돌아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나 뛰어나와 반기던 젤리가 보이질 않는다.
‘어디 아픈 건가.’
이브라임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상하게 오늘은 슈타디온의 사육사들도, 사용인들도 보이질 않아서 누군가를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브라임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젤리의 목에 이브라임이 직접 묶어 준 목걸이에는 위치를 추적하는 마법 장치가 들어 있었다.
“찾았다.”
이브라임이 마법 신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젤리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 있었다. 인기척이 드문 곳.
“젤리, 여기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푸허허허허어어어엉! 이, 이브따림…!”
그게 누구야. 이브따림?
엉엉 울면서 매달리는 젤리를 이브라임이 한 손으로 안아 올렸다. 젤리가 이브라임의 엄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제, 쩨미가 아쁘다냥!!”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