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좋다, 나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 아비도 알아들었다. 슈타디온 공작은 데이먼 가가 벌을 받길 바란다는 거잖니.”
황제가 짐짓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황후가 빈민굴을 구제한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황후는 네 동생의 어미 아니냐.”
“……네, 폐하.”
나엘이 고개를 수그렸다. 욕심이 많은 황제는 둘 다 놓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황후의 그런 마음을 짐은 완전히 저버릴 수가 없구나.”
“폐하의 고심을 이해합니다.”
“역시 우리 황태자.”
황제가 생긋 웃었다.
“데이먼 가문이 너무 큰 벌을 받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나엘이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민심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폐하.”
그러자 아직 자리에 있던 황제의 측근 중 하나가 말을 붙였다.
“민심?”
“그리고 신전의 입장도 고려해 주셔야 합니다.”
또 다른 측근이 덧붙였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일에는 신전도 얽혀 있었다. 데이먼도 데이먼이지만 신전에서도 많은 돈을 황제에게 보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은 대부분 제국민들의 기부금으로 마련되었고.
“골치가 아프군.”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욕심 많은 노인네.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배탈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무엇하나 놓치기 싫어하던 황제가 결국 손을 내저었다.
“황태자 뜻대로 하라. 판단은 재판관이 잘 내리겠지.”
“예,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엘과 자리에 있던 측근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은 우연은 없다고 믿는다. 모든 건 필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측근들이 마침 친황태자파인 것 또한 그런 이치였다.
만약에 그 반대였더라면 나엘은 저들을 모두 내보냈을 것이다.
나엘이 나른하게 웃었다.
* * *
루시아는 잘 지내고 있는 건가. 내 생각은…… 아니지. 여자 주인공이 내 생각을 해서 뭐 해.
아니지, 그래도 내가 먹여 주고 재워 줬는데 내 생각이 날 수도 있지. 혹시 거기 신관들이 텃세 부리는 건 아니겠지?
소설 속에서도 ‘프레니’라고 아주 악독한 년이 하나 있었다.
대신관의 양녀 출신인데 어찌나 루시아를 괴롭히는지. 물론, 원작에서는 프레니와 아가사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서 한편을 먹고 루시아를 괴롭히는 거다. 두 사람의 목표는 달랐지만 과정은 같았다.
프레니의 목표는 대신관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 아가사의 목표는 나엘 황태자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건 루시아를 제거하는 거였다.
물론 소설 속에선 당연히 그 과정이 실패했다. 게다가 아가사는 지하 감옥에서 목숨을 마감했지만, 프레니는 사형을 당해 죽었는데.
그만큼 죄질이 무거웠다는 거지. 왜냐면 프레니가 루시아의 찻잔에 독약을…….
“잠깐, 그럼 우리 애 거기다가 둬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신전을 새로 지어 주는 걸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루시아에게 정이 들어 버렸다. 미워할 수 없게 활짝 웃으면서 ‘공작님’, ‘공작님’ 하는데 어떻게 미워하겠느냐고.
게다가 그렇게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데. 밉다가도 예뻐질 판이었다.
“휴우…….”
나뭇가지로 바닥을 후벼 팠다. 심란해서 잠깐 산책을 나왔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허전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엠마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같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엠마, 루시아가 걱정되는 거지? 애가 착해서 거기서 괴롭힘당할까 봐.”
“……공작님은 루시아를 다 모르시는 거 같아요.”
“응?”
“걘 잡초 같은 애예요. 어디 가서든 살아남을걸요?”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공작님이 왜 이러고 계시나 고민 중이었어요.”
엠마가 활짝 웃었다.
“남들이 보면 공작님이 어디 아프신 줄 알겠어요.”
어디가 아파?
엠마가 머리를 콕 찍었다.
하하, 나 미쳐 보인다는 말을 아주 곱게도 하네.
“가만 보면 공작님이 가장 마음 약하신 것 같아요. 예전부터 그러셨죠. 안 그러신 척하셨지만 마음이 참 따뜻하셨어요.”
“그래?”
내가 모르는 아가사의 모습이었다. 아가사의 측근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네. 어릴 때부터 불쌍한 동물들을 보면 그렇게 못 참아하셨어요.”
“…….”
“저는 그래서 공작님이 이런 일을 시작하셨을 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엠마가 애틋하게 웃었다.
“아가사가 시집가려고 별짓을 다 한다고 말하지만…….”
“커흠. 그, 그래?”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너.
엠마가 까르륵 웃었다.
“하지만, 사실 공작님이 굳이 누군가와 결혼하실 필요가 있나요. 돈이 이렇게 많은데.”
“그렇지.”
“저는 요즘의 공작님이 훨씬 좋아요.”
하핫,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쑥스럽잖아. 볼을 긁적였다.
그런 엠마의 말에 동조하듯 메리와 또리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프레니가 적당히 해야 할 텐데.
“있잖아, 엠마. 우리 루시아 데리러 갈까?”
“……그거 분리 불안이에요.”
엠마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거기서 루시아가 괴롭힘당할 걸 아니까 그렇지……. 대신관도 눈에 아주 욕심이 그득한 게 심상치 않았다고.
휴.
* * *
그리고 분리 불안을 겪고 있는 건 아가사뿐만이 아니었다.
“젬, 아프냥?”
“……아니, 조금.”
젬이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누웠다. 등만 보이는 젬을 보고 젤리가 빙글 돌아 젬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방금 전 엠마와 아가사가 앉아 있던 것과 비슷한 포즈로 젬의 얼굴 가까이에 주저앉았다.
“젬, 어디 아픈 거 아니냥?”
“아니이, 우울행…….”
젬이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젤리가 이번에도 돌아가 젬의 얼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젬의 눈에서 눈물이 톡 하고 떨어졌다.
“젬, 우는 거다냥?”
“아니…….”
젬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젬이 다시 한번 몸을 굴렸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제엠, 우우냥?”
“안 운다니까! 나빠써어…….”
젬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엎드린 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젬, 우네에냥…….”
젤리가 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젬과 젤리의 주변에 신수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뀨우우우웅…….”
“끼융…….”
“캬아아앙…….”
“위로하지 마아. 낭 앙 우러(나 안 울어)…….”
코맹맹이 소리와 함께 젬의 어깨가 점차 거세게 들썩였다. 안 울려고 하는데 자꾸 루시아 생각이 났다. 루시아는 젬을 두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걸까?
“제에에엠…….”
젤리가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몸이 기우뚱하게 넘어졌다.
“울지 말라냥. 루시아가 보고 싶어서 그러냥?”
“크으읍……. 루띠아 애기 하띠 망!”
땅에 묻힌 젬의 손등에서 각인이 미약하게 반짝였다. 그 또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빛이었다.
* * *
로살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데이먼 백작 가를 갈아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아버님께서 신수를…….”
데이먼 백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황후 폐하. 그 당시에는 다 그랬지요. 어려운 시기 아니었습니까.”
로살린이 시녀장에게 말했다.
“가서 두통약을 가져오게.”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엉망인지 모르겠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도 그 돈으로 먹고, 자고, 입으셨으니 그리 비판할 일은 아닙니다.”
로살린이 차게 웃었다. 그녀 또한 데이먼 백작 가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황자 전하의 앞날을 생각하셔야지요.”
그래서 여태 참고 있는 것이다. 사일러스를 위해서!
“이번엔 제게도 별수가 없습니다.”
데이먼 백작이 눈을 홉떴다.
“폐하.”
“일단 제가 신전에 접촉해 보겠습니다. 신전이 바라는 걸 하나 내어 주고 그 대신에 데이먼 가문의 목숨을 구명해 보지요.”
데이먼 백작이 흐린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으려면 황태자와 재판관의 동의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만족할 만한 걸 내놓아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말에 데이먼 백작이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 일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건 데이먼 백작도 동의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내놓아야 한다면 둘 중 누구를 내놓으시겠습니까?”
“아들을……?”
데이먼 백작이 체이스와 멜리슨을 떠올려 보았다.항상 모자라기만 한 멜리슨은 백작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에 반해서 똑똑한 체이스는 데이먼 백작의 자랑이었다. 가문을 이을 후계자이기도 하고.
백작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