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70)화 (70/90)

#70화.

재판이 끝나고 나엘이 보낸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시종을 따라가니 황성의 정원에서 나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그래도 오늘 한 사건이 마무리됐는데 기분이 어때?”

나엘이 편한 말투로 물었다.

답답한 것은 벗어 던졌는지 옷도 편안한 셔츠 차림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글쎄요. 아직은 별로 실감이 안 나는 것 같아요.”

“재판장 인선에도 신경을 썼는데.”

어쩐지.

“신실하신 분 같더라구요.”

“마엘리스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믿는 꼬장꼬장한 노인네지.”

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외숙부님이시거든.”

외숙부님이라……. 이게 바로 법정 비리?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가?”

“네.”

날 기다리고 있는 토끼 같은 식구들이 한둘이 아닌데 얼른 돌아가서 놀아 줘야지.

요새 너무 바빠서 우리 애기들하고 놀 시간도 없었다. 내가 피곤함에 침대에 늘어져 있으면 메리가 내게 등을 보이고 앉는다. 그리고는 고개만 돌리는 것이다.

나 삐졌는데 니가 좀 알아 달라고 시위하는 거지, 뭐.

오랜만에 메리를 꼭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뒹굴 하고 싶다. 으아아아, 털 뭉치 힐링이 필요하다!

“식사하고 가지.”

“예?”

“곧 저녁 시간인데, 식사 전일 거 아냐.”

굳이……?

경계의 눈빛을 던졌다.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내게 나엘이 덧붙였다.

“약혼식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본인 약혼식인데.”

“아.”

멍한 내 표정에 나엘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무심하군.”

“큼.”

어쨌든 이건 내게도 필요한 계약이니까…….

“이,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부러 밝게 이야기하며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엘이 내 앞을 조심스레 막으며 말했다.

“반대쪽이야.”

“커흠.”

메리… 언니 밥만 먹고 갈게? 좀만 기다려.

* * *

며칠 뒤, 데이먼 백작 가에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데이먼 백작이 기소 내용을 확인하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함께 있던 체이스가 소환장을 빼앗아 읽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황태자와 신전이 우리를 고소한다잖냐! 보면 모르겠어?”

“아니, 신수를 팔았다니요? 설마 그 푼돈 벌자고 그런 짓을…….”

체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빼도 박도 못한다. 무려 신수를 팔아치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수가 서커스단에서 학대를 당했다는 데 있었다.

“네 할아버지가 한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데이먼 백작이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서성거리는 데이먼 백작에게 멜리슨이 태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겠어요, 아버지. 우리는 데이먼인데.”

“오늘 재판소에서 세 가문이 작위를 몰수당했다!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야!”

물론, 지금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후의 지지도가 급상승하기는 했다.

황후가 하는 일에 데이먼 백작 가도 숟가락을 얹어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이번 일이 공개적으로 터진다?

고꾸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데이먼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 재판장을… 제기랄.”

재판장의 이름을 확인한 데이먼 백작이 욕설을 짓씹었다.

“황태자가 작정을 했군요.”

체이스가 어두워진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이 일은…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야겠다. 네 할아버지가 하신 일로 우리가 먹고살았으니 그 애에게도 책임이 있어.”

데이먼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살린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던질 걸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그래 봐야 데이먼 백작의 씨에서 나왔거늘.

로살린은 어렸을 때부터 제 부모를 무시하곤 했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데이먼 백작 가를 건져 낼 수 있는 건 로살린뿐이었다.

체이스가 요새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붉은 병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아가사 공작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번 일을 주도한 게 아가사 공작과 황태자라더군요.”

“그래. 누구라도 만나 봐야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않겠느냐.”

데이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먼 백작의 시선이 멜리슨을 향했다.

“저요? 저도 뭐…….”

“아니, 너는 사고 치지 말고 저택에 꼼짝도 말고 있어.”

“이미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아버지.”

멜리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로살린이 빈민 구제를 시작한 이후로 멜리슨은 저택에 갇히다시피 했다.

멜리슨이 밖에서 사고 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멜리슨이 짜증스럽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루시아, 이 계집애는 언제 데려올 거예요?”

“그것도 공작 가에 이야기를 해 보마.”

멜리슨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해 죽겠으니 그 여자라도 빨리 데려와, 형.”

체이스가 혐오가 가득한 눈빛을 멜리슨에게 던졌다. 제 동생이지만 정말로 쓰레기다.

* * *

황태자 궁에는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주 긴 식탁에서 양 끝에 앉아서 먹는 걸 상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식사 자리랄까.

평범하지 않은 것은 음식의 맛이었다.

“어머, 어머. 이것도 맛있네.”

“……요리사에게 그렇게 전해 주지.”

“이것도 정말 맛있네요.”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말했다. 맛있는 것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지.

사실 재판 전에 긴장해서 제대로 먹질 못해서 그런지 배가 더 고팠다.

냄새까지 완벽한 음식을 두고 참는 건 불가능했다.

“예전에는 뭘 먹어도 깨작거리더니.”

“큼.”

“내가 편해진 건가? 아니면, 싫어진 건가.”

“커흠. 식사할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나엘이 피식 웃었다.

“마저 식사해.”

나엘을 힐끗 보고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엘은 그닥 많이 먹는 것 같지 않았다.

“약혼식은 다음 주말 정도가 어떨까 싶은데.”

“다음 주말이요?”

“그때면 데이먼 백작 가의 처벌도 정해질 거야. 이런 일은 미룰수록 안 좋은 법이지.”

잠깐.

“데이먼 백작 가가 벌을 받게 된다면 우리가 꼭 약혼할 필요가 있을까요? 약혼식까지 하면서요. 지금도 이미 다들 약혼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나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데이먼이 황후의 가문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지. 황후에게는 면책권이라는 게 있어. 제 가문이 죄를 지었을 때, 반역죄가 아니고서는 3번 구명할 수 있어.”

“허.”

뭘 그렇게 친절해. 3번이나?

“데이먼 백작 가는 이번 일로 멸문하지 않아. 체이스 데이먼은 살아남겠지.”

결국 이 약혼식이 중요하다는 거네. 아니, 우리 여자 주인공이 각성을 해서 신전에까지 갔는데. 네가 나랑 약혼할 때니.

“큼, 약혼은 신전에서 하는 게 좋겠어요.”

루시아랑 한 번이라도 부딪히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건 반대야.”

“엥?”

“지금도 우리는 신전이랑 우호적이란 걸 드러낸 셈이야. 더 이상은 곤란해.”

“……그런가요?”

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신전과 귀족들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는다는 이야기가 돌면 곤란하니까.”

하긴, 둘 다 돈 먹는 하마인 건 마찬가지인데 누가 더 많이 먹느냐에는 아주 예민했었지.

나엘이 의외로 생각이 참 많았다.

“그러면 약혼식에 성녀를 초대해도 될까요?”

“그래.”

“준비되면 알려 주세요. 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사실 정말 좋아 죽어서 하는 약혼도 아니고.

약혼식에 대단한 로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약혼식을 따로 하는 커플들이 있는 경우도 드물고.

저 먼 별세계 이야기지.

그렇다 보니 어떤 행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는 게 확실하군.”

나엘이 피식 웃었다. 분명 장난기가 서려 있었는데 이상하게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한 표정이랄까.

“……그렇게 막 너무 싫어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여전히 미래는 미지수다. 원작대로 흘러가게 되면 나는 나엘의 손에 죽는다.

게다가 나엘은 루시아와 알콩달콩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소설 속처럼 남의 것을 가로채다가 죽는 건 정말 사절이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은데 굳이 왜.

“그거 다행이군.”

그러니까 그런 표정 금지.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애틋했다고.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갑자기 음식 맛이 뚝 떨어져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시간 괜찮으면 황실 의상실에 들러서 치수를 재고 가.”

“의상실이요?”

이렇게 먹고?

“약혼식 드레스는 맞춰야 할 거 아냐. 설마, 그것도 안 하겠다는 건 아니지?”

“아니, 그런 건 먹기 전에 말씀해 주셨어야죠!”

세상에. 내가 몇 접시를 비웠는데. 숨쉬기도 버거운 마당에 치이수?

“그게 문제가 되나?”

볼록 나온 윗배를 가리곤 외쳤다.

“완전 문제 되거든요!”

여자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

나엘이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살짝 넘겨 주었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예뻐 보이니까.”

……뭐야. 누구는 못생겼다는 말로 설레게 하고, 또 누구는 예쁘다는 말로 설레게 하네.

이래서 남자 주인공이랑 서브 남주 하는 거구나.

“정말… 아무 여자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조그맣게 중얼거린 뒤 서둘러 나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나엘을 피해서 멀찍이 떨어져서 섰다.

이거 내가 착한 마음으로 충고해 주는 거야.

아니, 이래가지고 루시아가 나한테 질투하고 그러면 내 손해잖아.

그러니까 서로 조심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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