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본디 신전은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대신관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게 결정되는 곳.
대신관이 루시아를 ‘수습 신관’이 아닌 ‘일반 신관’으로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신관들 사이에 불만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성녀에게 수습 신관 딱지를 붙여 두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루시아의 뒤에는 슈타디온이 있지 않은가.
대신관이 뱀 같은 눈길로 루시아와 함께 온 짐마차를 훑었다.
그러자 루시아를 데려온 신관이 눈치껏 설명했다.
“대신관님, 앞의 것은 성녀님의 것이고 뒤의 것은 대신관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슈타디온 공작님께서 대신관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하하하하!”
대신관이 활짝 웃었다.
“평소에도 신심이 깊으신 분이시지! 그런데 뭘 또 이렇게……. 성녀님, 편히 지내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것을 성녀님의 방으로 옮겨 드려라!”
“네, 대신관님.”
신전에서 일하는 심부름꾼들이 전부 달려들었다.
루시아가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벌써부터 젬이 보고 싶고 슈타디온이 그리웠다.
“프레니.”
“네, 대신관님.”
“네가 루시아를 많이 도와주렴.”
“네.”
프레니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밤, 대신관은 프레니를 불러 루시아를 부탁했다.
프레니가 독살스러운 눈으로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대신관이 마음을 달리 먹어 루시아에게 신전을 물려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도 양녀로 들일지도 모르지! 성력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이유 모를 악의에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프레니가 루시아에게 말했다.
“따라와, 안내해 줄 테니까.”
“응, 고마워. 내 이름은…….”
프레니가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루시아가 어설프게 웃고는 그 뒤를 쫓았다.
이건 루시아의 결정이니 그녀가 책임져야 한다.
할 수 있다, 루시아.
* * *
퉁퉁 부어서 붕어 같은 눈으로 앉아 있는 아가사를 이브라임이 턱을 괸 채 응시했다.
“뭐가 그렇게 슬퍼? 누가 보면 바다라도 건넌 줄 알겠어.”
“블록을 3개나 건넜지. 신전엘 가려면 마차를 타고 2시간이나 걸려.”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사이코패스야? 이게 안 슬프다고? 감정이 메말랐네!
“하여튼.”
이브라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브라임이 내 앞에 동그란 구슬을 굴려 주었다.
“이게 뭔데?”
“……통신구.”
“뭐! 이런 게 있었다고?”
“흔한 건 아니지. 그걸 만들려면 들어가는 수식이랑 재료가 한둘이 아니니까. 지금 전국에 세 쌍 정도 존재할걸? 아, 이제 네 쌍인가?”
“그, 그럼 이걸…….”
“나는 그런 것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몸이니까.”
이브라임이 샐쭉하게 웃었다.
“기쁜가 봐?”
“완전!”
“이게 필요한가 봐?”
“정말로!”
“하나는 이미 루시아가 가지고 갔는데.”
“역시… 이브라임 최고!”
쌍 엄지를 날려 주었다. 웬일로 이렇게 예쁜 짓을 다 했대? 이브라임이 오랜만에 천사로 보였다.
“그러면 따라 해 봐.”
“응?”
“이브라임 오빠, 정말 최고예요.”
파르르.
이게 미쳤나.
이브라임을 노려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통신구를 도로 가져가려 했다.
“싫으면 말고.”
저거 분명히 나를 놀리는 거다. 일전에 체이스 무말랭이가 보낸 편지를 보고 나를 놀리는 거라고!
지도 괴로워할 거면서.
“얼른.”
“……이브라임 오빠, 완전 최고예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도 들렸는지 이번엔 이브라임이 파르르 떨었다.
“되게 별로네.”
이 자식이?
그래도 수정 구슬은 내 차지가 되었다. 엠마랑 젬이까지 불러서 같이 연락해 봐야지.
하루에 3번 전화할 거다.
전 여친한테 집착하는 전 남친처럼.
‘루시아, 자니……?’
루시아와 연락할 생각에 신나 있던 그때, 갑자기 이브라임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브라임답지 않은 편안한 미소와 함께.
“그니까 그만 좀 울어. 그러다가 정말 붕어가 친구 하자고 하겠어. 가뜩이나 못생긴 게.”
심장이 쿵 했다.
“너, 너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뭐야, 왜 이렇게 다정해. 안 어울리게.
“나?”
이브라임이 긴 머리를 찰랑거렸다. 그 바람에 이브라임의 미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기랄. 반박할 말을 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브라임은 정말 내 취향으로 생겼다.
쿵쿵거리는 심장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천천히 젓자 심장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수정 구슬에 눈을 붙이고 엎어졌다.
“뭐 해?”
“붕어 되기 싫어서 부기 빼려고.”
그 말에 이브라임이 키득키득 웃었다.
넌 좋겠다. 내가 웃겨 줘서.
* * *
루시아가 슈타디온을 떠났다면, 나엘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히샤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나엘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족은 인간이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히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히샤가 한숨을 내쉬며 나엘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댔다.
히샤도 이 모든 걸 바로잡으려 하는 나엘이 미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히샤의 반려인이라는 것도 고마웠고.
히샤가 기댄 목덜미 위쪽에서 문양이 작은 빛을 발했다. 정확히는 귀 뒤에 숨겨진 위치가. 나엘과 히샤가 이어져 있다는 의미였다.
빛이 발함과 동시에 히샤가 느리게 안정을 되찾았다. 반려인과 반려 신수는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둘을 억지로 떼어 놓으면 반려 신수는 시름시름 앓다가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전문적으로 신수들을 추적하는 기관을 만들 생각이야.”
히샤가 눈을 깜빡였다. 나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조금도 몰랐다.
“아가사를 그 수장직에 앉힐 생각이지.”
히샤가 피식 웃었다.
[공작이 참 싫어하겠군.]
저택 안에만 박혀 지내는 걸 좋아하는 아가사다. 그런 아가사에게 직책을 떠넘긴다니.
질색하는 아가사가 벌써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상상한 나엘이 피식 웃었다.
“아, 도착했군.”
서커스 천막이 눈에 보이자 나엘은 말에서 내렸다. 그를 따라서 기사들도 지상으로 내려와 소리를 죽인 채 천막 가까이 접근했다.
허름한 천막 앞에선 기괴한 화장을 한 남자가 서커스를 홍보하고 있었다.
“신수가 재주넘는 걸 보고 싶은 신 분! 원숭이 신수가 불을 뿜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마치 악취가 나는 듯했다. 아니, 그 말에서 나는 걸까.
아직 나엘 일행을 발견하지 못한 남자가 행인들을 붙들고 브로슈어를 떠안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엘은 조용히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가서 죄인들을 체포하라. 한 명도 놓치지 않고 황성으로 압송한다. 저들 또한 내가 직접 신문할 것이다!”
“존명!”
우르르 나타난 기사들을 발견한 남자가 하얗게 질렸다.
“으아아악! 황성 기사다! 황성에서 기사가 왔……! 아악!”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남자가 한 기사의 손날에 뒷목을 맞고 쓰러졌다.
조용하던 천막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나엘이 구조한 신수의 수는 총 셋. 원숭이 신수, 앵무새 신수, 마지막으로 데이먼 백작 가의 신수였었던… 신수까지.
그들은 빠르게 슈타디온으로 이송되었다.
* * *
루시아가 떠난 빈자리를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나엘이 구조한 신수들을 슈타디온으로 보내왔으니까.
나엘의 보좌관이 그들을 데리고 직접 왔다.
“……황태자 전하는?”
“죄인들과 함께 바로 황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랬군.”
마음이 무거웠다. 연락을 받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수의사와 사육사들이 곧바로 신수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신수들은 사람들을 경계하며 공격성을 내보였다.
“캬아아악!”
그 모습이 두렵다기보다는 안쓰러움이 치솟았다. 한때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저들이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야생 동물들도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황성에서 보살핌을 받고 추후 야생으로 돌려보내질 예정입니다. 다행히 황성에도 히샤 님을 돌보는 수의사가 있어서요.”
“……다행이네.”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데이먼 백작 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루시아 님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고요.”
“알겠네.”
과거 데이먼 백작 가의 신수가 발견되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데이먼 백작 가는 이번에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음…보좌관? 황태자 전하께 전해 줘. 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디에고라고 불러 주십시오.”
“수고했어, 디에고.”
디에고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슈타디온을 떠났다.
신수들이 새로 온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정말 어쩌다가…….
개중에서 가장 사람들을 경계하는 건 데이먼 백작 가의 신수였다.
사람들에게 행복한 미소를 전한다는 쿼카.
웃음을 잃은 쿼카가 저기에 있었다. 바짝 마른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