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66)화 (66/90)

#66화.

로살린이 허리를 폈다.

로살린은 사일러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슈타디온의 위상은 좀 더 올라갔다. 그뿐일까. 거기에 편승한 황태자의 지지도도 급상승했다.

사람들은 신수들을 가엽게 여김과 동시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은 슈타디온과 나엘을 칭송하고 있었다.

사실 여전히 신수들이 길바닥을 돌아다니며 농작물을 헤쳤다면 반발이 있었을 것이나 슈타디온이 자진해서 신수들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모든 타이밍이 황태자를 위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로살린에겐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확실하게.

* * *

황후의 이름으로 빈민 구제원이 열렸다.

어느 도시든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제도의 외곽에 위치한 빈민굴에 거대한 천막이 세워졌다.

단언컨대 빈민굴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으리라. 훔쳐서 내다 팔 것이 있나 보던 빈민들의 눈이 돌아갈 일이 벌어졌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번 배식을 할 예정입니다!”

“뭐?”

“저게 무슨 소리래?”

“황후 폐하께서 사일러스 황자 전하께서 무사히 15살을 넘기신 것을 기념하여 온정을 베푸시는 것이니 다들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가시오!”

“사일러스 황자가 어째?”

“몰라! 밥을 준다잖아!”

사람들이 금세 몰렸다. 통제가 되지 않는 그들을 정리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검을 본 자들이 눈치를 보며 제 자리를 찾아갔다. 어느새 질서를 되찾은 이들이 침을 삼켰다.

입맛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빈민굴 가득히 퍼졌다. 등가죽하고 들러붙은 뱃가죽이 요동쳤다.

열광하는 이들을 보면서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나온 시녀장이 오만하게 웃었다.

황후의 전략은 이번에도 옳았다. 나엘이 아가사를 앞세워 신수 복지 정책을 내세웠다면 황후는 애민 정신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펼치겠다는 거였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시녀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 * *

본디 작정한 일이기에 황후가 시작한 복지 사업은 빠른 속도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후의 이름이 알음알음 퍼져 나갈 때, 나엘은 팔려 간 신수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동시에 재판을 진행하려니 정신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신관이 일을 제대로 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도 나엘은 일의 진척 상황을 알려 준다는 핑계로 슈타디온의 문턱을 넘었다.

히샤는 메리, 또리와 함께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아가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에서 루시아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더군요.”

“……최대한 빨리 루시아를 신전에 들이겠다는 거로군.”

“핑계는 나쁘지 않더라구요. 루시아를 신전에서 데려가는 게 데이먼 백작 가를 막는 데 효과적일 거라는.”

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옳아. 이제 루시아를 정식 성녀로 신적에 올려야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아가사가 흐린 표정을 지었다. 처음 루시아를 알았을 땐 또 주인공이 흘러들어왔나 싶어서 심란하더니.

또 떠난다고 하니 다른 의미로 심란했다.

‘괜히 정이 들어서.’

아가사가 턱을 괴곤 루시아를 응시했다. 신수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웃는 걸 보니 마음에 턱하고 걸린다.

어제 이야기를 꺼내자 루시아는 신전으로 가는 것에 동의했다.

‘제가 여기에 있는 것보다 신전에 가는 게 공작님께도 좋은 일이잖아요! 제가 갈게요.’

그 환한 미소가 잔상처럼 남았다. 나엘이 찻잔 너머로 아가사를 훔쳐보았다.

“……아쉽나?”

“네?”

“아니.”

나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하려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이다. 나엘이 입을 꾹 다물자 아가사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전하?”

“아니, 아니야.”

나엘이 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도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왜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냐니.

먼 과거에는 건방지다, 무례하다고 아가사를 질책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넌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아쉬운가 봐.’라니 이게 무슨.

나엘이 얼굴을 쓸어내리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새 일이 많았던 게 틀림없다.

사건과 재판을 전부 마무리 지을 때쯤이면 이런 감정도 사라지겠지.

“공작님!”

그때, 루시아가 활짝 웃으며 아가사를 불렀다. 슈타디온의 스스럼없는 분위기는 아가사가 만든 것이다.

문득 나엘은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자신이 이상한 말을 내뱉으려던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고민에 빠진 나엘을 뒤로하고 아가사가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루시아가 아가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젬이 노래를 가르쳐 준대요! 이리 와서 같이 부르실래요?”

“아니!”

이건 아니지.

아가사가 칼같이 거절했다. 지켜보는 건 그렇다 쳐도 같이 하는 건 좀.

나 내향인이야.

* * *

황태자의 충실한 보좌관 디에고 파코는 데이먼 백작 가에서 팔려 간 신수들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 위를 꾹 누른 디에고가 고개를 힐끔 내밀어 그들의 은신처를 확인했다.

내부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새까만 채찍과 알 수 없는 것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끼이이잉! 끼익!”

“퀘에에엑! 퀘에에엑!”

동물들의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들려 왔으니까.

이곳에는 신수들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여럿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디에고가 끔찍한 광경에 침을 삼켰고 옆에 있던 파블로도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악질적인데요?”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는 듯 사료 통은 텅 비어 있었고 물도 말라붙어 있었다. 거기에 동물들의 분뇨 냄새와 윙윙거리는 파리, 동물들의 신음 소리.

디에고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게요. 파블로 경, 이거 참 심각하네요.”

순간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와 파블로와 디에고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빌어먹을, 신수라는 것들이 재롱은 부리지도 못하면서 비싼 것만 처먹어서…….”

“그러니까, 내가 저것들 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말했잖소.”

“그냥 주는 대로 처먹을 것이지.”

남자의 손에 든 것을 확인한 디에고가 입을 틀어막았다.

비린내가 나는 통과 썩은 내가 나는 양동이.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남자가 속 안에 든 것을 손으로 휘저었다.

“저, 저걸 먹으라고 주는 건가요?”

“하, 정말. 저런 인간쓰레기들 같으니. 황태자 전하께 바로 보고 올리시죠.”

당장이라도 진입할 기세를 펼치던 파블로가 돌아가자는 디에고의 말에 의아해했다.

“지금 우리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경, 우린 겨우 기사 셋입니다. 욕심부렸다가는 다 놓칠 수 있어요.”

디에고가 저 역시도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파블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삼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일 뿐.’

길을 돌아 나오는 내내 디에고의 마음속에도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던 동물들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래선지 디에고와 파블로는 바로 퇴근해야 했을 시간이나, 두말없이 바로 황성으로 들어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 애들을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해 주고 싶었다.

항상 그렇듯 나엘도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황태자 전하.”

“디에고, 파블로. 드디어 찾은 모양이군.”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이번에 암시장이 올라오면서 그 뒤를 따라 서커스단이 올라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설마.”

“네. 서커스단에 있더군요. 못 먹을 것을 먹어 가며.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신수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엘이 책상 위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신수를 그곳에 팔아넘긴 게 데이먼 백작 가고.”

“그쪽과 직접 거래한 건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연극단에 팔았으나, 그들이 도산하면서 서커스단에 판 걸로 보입니다.”

나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먼 가문은 마엘리스 신을 제대로 모욕했다. 신수들은 마엘리스의 종.

마엘리스가 인간을 위해서 내려 준 축복이었다.

“신께서 노하셔도 할 말이 없군. 마엘리스께서 왜 우리 곁을 떠나셨는지 알 것도 같아.”

디에고와 파블로도 침묵으로 동의했다.

나엘이 책상을 짚었다.

“내 치세가 오기 전에 이 모든 뿌리를 뽑는다.”

“그런데, 전하.”

디에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후가 지금 빈민굴에 구휼원을 설치한 걸 알고 계십니까?”

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그것 말이로군.”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서 데이먼 가문과 황후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측도…….”

“기다려 보게, 디에고. 모든 건 순서가 있는 법 아니겠나.”

“생각하는 바가 있으신 거로군요!”

흐려져 있던 디에고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엘이 느리게 미소 지었다.

“그런 스케일은 너무 우습지. 최소한 빈민굴을 재건하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예?”

“내가 아가사가 벌인 일을 보고 느낀 바가 많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