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신전이 신전의 일을 할 때, 나엘은 그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엘은 사전 자료 조사를 전부 끝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연관된 이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왔다.
중앙, 지방 귀족 할 것 없이 죄인들에게 돈을 받아먹은 자들투성이였다.
브륄스 제국에 크고 작은 귀족들은 총 1,000여 가문이 존재한다. 그들 중에서 300여 가문 이상이 돈을 받았다.
물론 나엘도 죄인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이상 그들을 크게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 한 번에 300여 가문을 처벌한다?
이유 불문하고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이다. 그들 또한 두려움에 뭉치게 되겠지.
귀족들에게 담합할 수 있는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
나엘이 이마를 꾹 눌렀다.
“돈이 없어서 그러나. 어디서 이런 거지 같은 것들이…….”
나엘이 이를 뿌득 갈았다.
돈이 없어도 긍지는 팔아먹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황성을 찾아와서 구걸을 하는 게 나을 뻔했다.
개중 가장 돈을 많이 받아먹은 가문 몇을 추려서 파문하고 나머지에게는 벌금을 물릴 생각이었다.
이게 나엘의 타협안이었다.
문제는 이 돈들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다. 흐름을 역으로 따라 올라가 마지막 점을 찍으니…….
‘데이먼 백작 가.’
나엘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그런데 데이먼 백작 가는 직접적으로 죄인들에게 받은 돈이 없어서 어찌 보면 이건 추론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면 데이먼 백작 가를 엮어 넣을 수가 없었다. 황후가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게다가 얼마나 잔챙이들이었는지 300여 가문 중에서 제대로 된 굵직한 귀족 가문은 고작 두어 곳뿐이었다.
쥐새끼가 따로 없네.
나엘이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가사가 주고 간 서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류는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재판에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데이먼 백작 가가 신수를 팔아 이득을 편취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과거에 데이먼 백작 가가 데리고 있었던 신수는…….
‘아.’
나엘이 차갑게 웃었다.
이 신수를 팔아치우고도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었을까. 다행히 보고서에 따라 신수가 팔려 간 경로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먼 백작 가를 이번 기회에 얽어 넣기 위해서는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이 사건을 같이 욱여넣어야 좀 더 효과적일 것이다.
모든 판단을 정리한 나엘이 몸을 일으켰다.
“히샤, 가자.”
히샤가 꼬리를 흔들며 나엘의 품에 쏙 안겼다.
나엘이 위풍당당하게 황성을 나왔다. 슈타디온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기대가 되는 건 히샤도 마찬가지인지 품에서 기분 좋게 떠들어 댔다.
언제부터였을까. 슈타디온으로 가는 길이 기대되기 시작한 게.
나엘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정말 모를 일이로군.”
* * *
그리고 그날은 체이스가 직접 슈타디온으로 찾아가려고 마음먹은 날과 맞물렸다.
체이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으며 유머러스한 연상의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체이스가 슈타디온 공작 가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슈타디온의 문은 체이스 앞에서 굳게 닫힌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공작님께 다시 한번 고해 주게. 체이스 데이먼이 왔다고!”
“그렇게 전달드렸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집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체이스가 불안한 얼굴로 철문을 움켜쥐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돌아가십시오.”
이렇게 문조차 열어 주지 않고 박대한다고? 부끄러운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에 상처가 난 체이스가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먼 백작 가의 소백작을 이런 식으로 세워 둘 수는 없네. 당장 문을 열게!”
“공작님의 허락 없이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단호한 집사장의 말에 체이스가 철문을 걷어찼다.
아픈 건 철문이 아니라 체이스의 발이었지만 꼿꼿하게 버텼다. 발가락을 옴찔거리기는 했지만.
오늘 이대로 돌아가면 멜리슨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도 되질 않는다. 요새 성녀와 결혼한다는 사실로 얼마나 콧대를 세우는지.
입으로는 성녀와 결혼하기 싫다고 징징대면서 하고 다니는 건 달랐다. 밖에 나가서 암암리에 성녀와 결혼할 거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멜리슨에게 뒤처질 수는 없었다.
“당장 문을 열게, 집사장. 공작에게 전하게. 이대로 내가 신문사로 달려가 멜리슨과 성녀 사이의 일을 알려도 되겠느냐고.”
집사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에는 협박이다. 집사장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모두가 못마땅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문을 통과한 체이스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공작에게 안 전해도 되나?”
“소백작께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 열어 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지 않길 바라셨지만.”
집사장이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뭔가 농락당한 기분으로 체이스가 그 뒤를 따랐다.
정원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신수들이 체이스에게 주목했다.
젬의 각성 전에는 그저 시끄럽고 귀찮은 동물들로 보이던 그들이 지금은 돈덩이로 보였다.
젬이 각성했으니 그다음엔 어느 신수가 각성하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큼. 신수들은 아주 잘 지내고 있군.”
집사장이 날카로운 눈빛을 체이스에게 던졌다.
“소백작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슈타디온의 집안일이니까요.”
체이스가 집사장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아가사와 결혼을 하고 나면 저놈부터 자르리라. 반드시!
체이스는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아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아가사 옆에는 볼에 분노를 가득 담고 있는 하녀가 함께였다.
“큼, 아가사.”
“제 이름을 허락한 적 없습니다. 소백작.”
체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난 일주일의 꽃 선물이 조금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건가? 그의 콘셉트도?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초반에만 꽃이 되돌아오고 그 이후엔 돌아오지 않았었다. 아마 하녀도 있어 부끄러워 그러리라는 말도 안 되는 행복 회로가 체이스의 머릿속에서 돌아갔다.
“크흠, 슈타디온 공작님.”
“말씀하십시오, 소백작.”
체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지 모르겠군요. 편하게 해도 됩니다, 공작님.”
아가사가 표정을 찌푸렸다.
우리라니? 어디서 감히 나를 지랑 한 카테고리에 묶어?
“용건만 이야기하고 돌아가십시오.”
“큼, 지난 일주일 동안 꽃은 잘 받아 보셨습니까?”
“수령한 바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글쎄요. 꽃 한 송이 본 적이 없습니다.”
아가사가 서늘하게 웃었다.
“어쨌든, 아가사 공작님. 나는 그대와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체이스가 부드럽게 말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우리는 평생을 가까운 곳에서 지낸 사이이지 않습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의 논리였다.
“최근 공작님은 부모님을 잃는 큰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사기 결혼을 당한 충격에 그 무엇도 신경 쓰지 못했었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군요.”
“…….”
아가사가 무감한 표정으로 체이스를 응시했다.
“함께한 세월이 오래된 만큼 공작님의 옆을 지켰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아가사 공작님, 나는 사실 오랫동안 그대를 마음에 품어 왔습니다.”
체이스가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사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미친놈 아니냐고.
“무언가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종종 함께 차를 마실 시간이라도 내어 줄 순 없겠습니까?”
“거절합니다.”
아가사가 딱 잘라 말했다.
“예, 물론 거절하시… 예? 거절하신다고요?”
“네. 거절합니다.”
체이스가 얼굴을 구겼다. 아가사는 여전했다. 쟨 태어나길 무례하고 멍청하고 사납기까지 한 채로 태어난 거다.
“공작님.”
체이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결국 또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다니. 아가사도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했다.
“이대로 제 제안을 거절하시면 안 되실 텐데요. 황후께 말씀드려 루시아를 바로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슈타디온과 데이먼 사이의 모든 거래를 끊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가사가 이를 악물었다. 저열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루시아와 멜리슨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공표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런 스캔들에 있어서는 확실히 여자 쪽이 불리했다. 그것도 신분이 낮은 쪽이라면 더욱더.
물론 성녀이니만큼 황성과 신전에서 루시아를 보호하겠지만 그것과 평판이 떨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가사가 이를 악물었다.
“차 한 잔이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