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몇 번이나 말해 놓고. 노친네, 이제는 기억도 잃었나.”
이브라임이 뾰족하게 말했다. 대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약속 지키거라.”
“…….”
“내가 죽어 흙이 된다면 그 옆을 지켜 주겠다고 했었지? 나를 위해서 울어 주겠다고.”
“아직 정정하신 양반이 별소리를 다 해.”
이브라임이 투덜거렸다. 이브라임이 그간 힘을 이어받는 것을 거부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거대한 마법의 힘은 대마법사의 시간을 정지시켰다. 그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힘이 사라지면?
대마법사는 자연 앞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멈추었던 시간이 빠르게 흐르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브라임은 그게 싫었다.
“홀로 남는 걸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브라임.”
대마법사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외로움 또한 덧없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올 게다.”
“나 혼자 두고 가서 퍽 기쁘신가 봅니다.”
“그럴 리가 있겠니. 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들 만큼, 네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이가 나타난 게 기쁜 거겠지. 네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이브라임이 멈칫했다.
어른.
이브라임을 변하게 만든 존재.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만든…….
물론, 이브라임은 그를 구해 준 대마법사에게 이러한 형벌을 계속 짊어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최대한 미루고 싶을 뿐이었다. 이브라임의 결정을 앞당긴 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어느 날 외계에서 온 우주인처럼 떡하니 나타나 이브라임을 뒤흔드는 존재.
그에게 각인 된 과정 또한 특별했다.
‘불을 질러 버려!’
게다가 하는 짓들은 얼마나 독특한지. 이브라임은 그런 귀족 영애를, 아니.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밀어붙이는 과단성도 있었다.
처음엔 신수들을 거두는 걸 악취미라고 생각했는데…….
젤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특이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역시. 사랑만큼 위대한 것도 없단다, 이브라임.”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그냥, 관심이 가는 것뿐이에요. 워낙 신기하니까.”
“호오.”
그게 시작이라는 걸 그의 아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특별한 만큼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이라 도움이 필요해요. 그 도움을 제가 주고 싶을 뿐이에요. 정말……. 그뿐이에요.”
대마법사가 이브라임 몰래 입술을 끌어 올렸다. 대마법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이. 그 추억으로 몇백 년을 살았다. 이브라임도 그럴 수 있는 추억을 얻게 되는 걸까.
대마법사가 이브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브라임이 질색하며 그 손을 쳐냈지만 말이다.
이브라임이 부루퉁한 얼굴로 아가사를 떠올렸다.
‘지금쯤 황성에 있겠지.’
이번 사건은 이브라임의 분노도 불러일으켰다.
말 못 하는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고 동시에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젤리도 젬처럼 신수화(化)되고 나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그 생각을 한 이브라임의 뺨이 붉어졌다.
“큼!”
쪼오금 더 귀엽겠네. 쪼오오오오금!!
* * *
한편, 황태자 궁.
대신관을 만난 김에 겸사겸사 일을 처리해야겠다. 루시아의 일이나, 신수가 각성한 일이나.
“마침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만나니 반갑네요.”
“오, 오호… 공작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군요.”
되게 불편한 표정인데?
아, 나한테 진 빚이 있다 이거지? 그러면 더 이번 일을 해결하기 쉬울 것 같았다.
“나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나?”
“아, 황태자 전하.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용건이 있습니다.”
당연히 너도 필요하지.
“대체 무슨…….”
“어제 성녀의 각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녀는 제 보호하에 있구요.”
“뭐?”
나엘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고 대신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이게 핫이슈긴 하지.
신전의 세력 판도가 바뀌는 기준점이 바로 루시아였으니까. 그래서 다른 신관들이 루시아를 더 질투했었고.
“지금 그 말씀은……! 성 레시카의 후손을 찾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충 그렇게 되겠군요.”
“이건, 이것은……! 공작님께서 평소에 마엘리스 신을 향한 마음이 깊으셨기에 가능했을 일일 겁니다!”
신심?
나는 나만 믿는데… 뭐, 기부금을 신심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치고.
“대신관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네요. 그런데 대신관, 문제가 발생했어요.”
“성녀님께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성녀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데이먼 가의 멜리슨과 일이 있었어요. 추문에 시달릴 만한 일이요.”
“그 무슨 불경한……!”
“그 일로 각성을 하게 된 것으로 추측돼요. 황후께서는 이 일을 덮고자 두 사람의 결혼을 명하셨습니다.”
중요한 건 이 대목이었다.
“‘평민 루시아와 데이먼의 차남의 결혼을 명한다.’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나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말이 뜻하는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성녀가 되기 전이니 루시아는 그저 평민일 뿐이고, 황후의 뜻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발언이었으니까.
“황후 폐하를 이기려면 두 분의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후욱, 후욱…….”
대신관의 코 평수가 커졌다.
사실 저럴 수밖에 없는 게, 성녀가 각성 전에 혼인을 하게 되면 신전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지내는 것이다.
데이먼의 사람으로 지내는 거지. 신전에서는 돈을 벌 수 있는 큰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게다가 신전에 성녀를 들이면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신권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할 수 있었다.
“데이먼 가문이 파렴치하군요! 그 둘째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다닌다지요? 그 가문에서 피해를 입은 하녀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그걸 대신관이 어떻게 알지?”
나엘이 서늘하게 물었다. 대신관이 흥분한 채로 말했다.
“그거야 그들이 신전에 와서 고해 성사를 했으니 알지요! 몇 번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신분이 깡패라 고소는 못 하고 신전에 가서 속풀이라도 했다는 걸로 들린다.
그런데.
“여태까지 조용히 있다가 이제 와서? 대신관의 정의는 가끔가다 살아나나 보군.”
나엘이 차갑게 말했고 대신관이 입을 꼭 다물었다.
어휴, 사이다.
“시, 신전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시일을 늦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엘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나머지는 제가 황태자 전하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긴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많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정말 많이.
“그 전에.”
나엘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대신관이 할 말이 있다던데.”
“커흐으으으음!!”
대신관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제가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었네요.”
“그게 무슨…….”
“성녀 루시아가 돌보던 신수가 각성했습니다. 신수화도 가능하고 능력도 쓸 수 있는 걸로 보여요.”
이번에는 나엘도 벌떡 일어섰다.
“허어어억!”
그리고 대신관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놀랐지? 사실 나도 놀랐어.
“정황을 보건대 루시아를 멜리슨 영식의 손에서 구해 낸 것도 각성한 신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 어떤 신수입니까! 어떤 신수가 각성을……!”
“토끼 신수였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이름은 젬. 공작 가에서 거둔, 버려진 신수 중 하나였지요.”
“일전에 토끼 신수는… 베일럼 자작 가 소속이었지요! 베일럼 자작 가에서 속죄하는 의미로 많은 돈을 지불할 겁니다!”
“잠깐.”
이게 무슨 또 개소리야.
“네?”
“신수에 대해서 왜 신전에서 처리할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그야 당연히 과거에는 그렇게 해 왔고…….”
“아, 그래서 길거리에 버림받은 신수들이 넘쳐서 황성에 민원이 즐비했군.”
“커허음…….”
대신관이 입술을 오므렸다.
하여튼간, 돈 되는 일에만 관심 많지? 아니, 권력자는 다 저런 거야?
이전 조선 시대에도 삼정의 문란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혼란했느냐구.
“아, 아무튼 신수는…….”
“그럴 생각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곤 생긋 웃었다.
아니, 내가 금이야 옥이야 끼고 키우는 애들을 어딜!
“그건 질서에 어긋나는…….”
“제가 그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지출한 금액은 4천만 골드입니다.”
“헉!”
대신관은 숨을 들이켰고 나엘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금액을 신전에서 배상해 주신다면야. 저는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그 일은 차후 논의를…….”
“물론, 그럴 경우에 저는 매우 속상해서 기부금을 중단할 생각입니다.”
“아가사 공작!!”
뭐, 어쩌라고. 사람이 염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