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루시아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루시아가 절대로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구, 구해 주세요. 저 싫어요, 공작님.”
루시아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 얼굴에 선명한 것은 공포였다. 가해자인 멜리슨은 태연하게 손톱이나 긁적대고 있는데.
루시아는…….
이가 아득 갈렸다.
그런 상황에서 황후는 제 가문을 살려 보겠다고 결혼을 명했다. 이게 맞는 거야?
아놔, 진짜 이 중세 세계관.
나하고는 드럽게 안 맞네.
이런 상황이 있다면 위의 결정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경찰에 가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안 되면 유투브나 언론에 알려서 인생의 매운맛을 보여 주고.
그 밖에도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 세계의 사이다는 신분이 보여 준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황후를 이길 힘이 없었다.
“……하.”
한숨이 터졌다.
왜 매번 이렇게 나엘과 얽힐 일이 생기는 건지. 루시아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매달렸다.
“괜찮아, 루시아. 괜찮을 거야.”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이브라임에게 손짓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은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현대 세계에 전기가 있다면 여기에는 마법이 있다!
‘녹화해.’
내 입 모양을 알아들은 이브라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라도 건져야 루시아를 살리지 않겠어?
“신부의 몸이 좋지 못한 듯하니 일단 데리고 가겠소.”
“그건 안 되지!”
데이먼 백작이 제 주제도 잊고 반박했다.
“그 애는 내 아들의 아내가 될 거야! 이 데이먼 백작의 며느리가 되는 거지. 그리고 물론, 그 애가 데리고 온 신수도 우리의 것이다!”
신수?
우리 젬이 말하는 거야?
아니, 저 미친 새끼가. 유교걸 피가 거꾸로 솟게 하네. 어른이 어른처럼 굴지 못하면 가르쳐 줘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백작.”
루시아를 이브라임 쪽으로 떠넘기곤 백작에게 다가갔다.
잘 데리고 있어.
“그리고 백작은 내가 누구인지 잊은 모양이야. 왜, 이젠 나보다 위에 서 있는 것 같은가 보지?”
“큼, 큼…. 그건 흥분을 하다 보니…….”
“아, 흥분을 하면 황제께서 정해 주신 작위도 잊는 모양이오? 내가 존댓말을 해 드려야 하나.”
“아닙니다, 공작님.”
내 눈에 감돌고 있는 광기를 본 것인지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하녀를 내가 데리고 가는 게 뭐가 문제야. 지금 결혼했어?”
“아, 아닙니다.”
“호적에 오른 것도 아니고, 식을 올린 것도 아니지 않나.”
“…….”
데이먼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신분이 깡패라니까? 황후가 똑같이 나왔으니 나도 똑같이 깡패처럼 굴면 좀 어때서.
지금 당장 루시아를 여기서 빼내야겠다.
“그리고 젬이를 얘기하나 본데. 걔는 내가 키우던 애야. 근데 뭐? 백작 가의 것? 그 배에 채운 게 지방이 아니라 욕심인가 봐?”
“공작님! 말이 심하십니다!”
멜리슨이 벌떡 일어나서 내게 말했다.
“아하. 내가 말이 심하다. 그러면 눈 뜨고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걸 두고 보라는 말이야? 좋아.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내 거.”
응접실에 있는 귀중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내 거 찜, 해서 내 거 되는 거면 나도 그러면 되겠네. 이브라임!”
“네, 공작님!”
이럴 때는 손발이 척척 맞는구만. 내내 반말을 하면서 건들거리던 이브라임이 웬일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루시아가 이브라임을 붙들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챙겨!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다 내 거 되나 본데……. 좋아, 이 저택도 내 거 해야겠네!”
건들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 만만하다는 걸 깨달은 백작이 멜리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아버지는 왜 나한테 그래요! 나는 아버지 편을 들어 준 건데! 저 미친 여자가……!”
“오호. 미친 여자? 이젠 공작을 모욕하기까지 하는군. 이브라임?”
“전부 녹화했습니다.”
“그렇다는군. 나는 이 일을 귀족 법정에 올릴 것이오. 그리고 내 재산을 편취하려고 한 사실 또한, 귀족 법정에 고소하겠소.”
“공작님!”
체이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데이먼 백작과 멜리슨 앞을 막아섰다.
왜, 미친놈에는 미친년이라던데. 매운맛 좀 봤나 봐?
원래 얌전한 애들이 건드리면 더 무서운 거 몰라?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제 동생이 아직 어려서 저지른 실책입니다.”
“데이먼 백작께서는……?”
“동생을 결혼시키려 하시니 상심이 깊으셨겠지요. 아끼는 아들이라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푸시고 돌아가 계시면 순리에 따라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혼자?”
“……루시아와 신수도 모두 함께 돌아가셔야지요.”
체이스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웃다니. 난 놈은 난 놈이네.
“제가 찾아뵙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겠다.
“루시아, 젬이는?”
“그게…….”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이었다.
“루시아, 나 왔어!!”
해맑은 얼굴로 젬이 등장했다. 손가락 세 마디만 한 날개를 팔랑거리며.
루시아가 재빨리 젬과 어떤 흰 덩어리를 꼭 끌어안았다.
“젬이… 여기 있네요, 공작님.”
루시아의 품에 있던 젬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집무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젬이 쪼꼬만 손으로 긴 귀를 정돈했다.
“넌 뭐니……?”
“안녕! 나는 젬이라고 해!”
“…….”
“으응, 으응! 젬이가 이름을 말했잖아. 상대방이 소개를 하면 너도 소개를 해야지! 너는 누구니?”
“아가사……?”
“나도 공작님이 누군지 알아! 반가워, 공작님!”
젬이가 내 손톱만 한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