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하지만, 속내와는 다르게 주치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주무시는 것뿐이라……. 보통 몇 시에 일어나시는지?”
엠마가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매일 다르시죠……? 보통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십니다.”
“그러면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시지 않을까요……?”
긴장감이 맴돌던 곳에 평화가 찾아왔다.
주치의는 깨달았다.
‘휴식을 취하고 계시니’라는 말보다는 ‘자는 중이다’라는 말이 좀 더 이해하기 쉽다는 걸.
한편.
아가사가 눈을 슬그머니 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
누군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 같아서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숨을 죽인 채로 이야기를 듣자 하니…….
여기서 내가 눈을 뜨면 대역죄인 아니냐……. 다비드나 이브라임이나, 나엘이나.
아니, 애먼 주치의는 왜 잡아. 언제 깨어날지 알면 걔가 신이지 인간이겠냐고.
큼큼.
너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니……?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죽은 척 고개를 돌렸다.
아, 부담스러워…….
나약한 내향인의 감성이 꿈틀거렸다. 저 다시 기절하면 안 될까요…….
* * *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있었다. 루시아가 멜리슨을 밀쳐 냈다.
“이거 놔!!”
루시아가 그동안 멜리슨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배운 욕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겁먹을 리 없는 멜리슨이 되레 루시아를 끌어당겼다.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무슨 내숭이야!!”
그거야, 저택에서 차 한잔하자며! 게다가 저택에 사람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데이먼 백작 가는 루시아가 목표로 하고 있는 곳 아닌가!
그런데 여기는 이상했다. 루시아가 알고 있는 황태자 궁이나 슈타디온과는 달랐다.
사람들이 있으니 해코지를 못 하리란 루시아의 추측을 무시하듯 백작 가의 사용인들은 이런 소란에 익숙한 듯 나와 보지도 않고 있었다.
루시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놓으라고!!”
루시아가 침실 앞에서 버팅겼지만, 술에 취한 멜리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끌려 들어갔다.
루시아에게 친절한 조언을 건네던 바텐더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술에 취한 미친놈은 힘도 세다던 그 말!
“아아아악!”
루시아가 멜리슨의 손을 깨물고 달아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가 핑 돌았다.
닫힌 문을 열려는 순간 어깨가 붙들렸다.
“이거 놓으라고! 이 미친……!”
루시아가 몸을 비틀며 멜리슨에게 침을 뱉곤 다시 문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할 때였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맞는다, 맞는다……!
커다란 손이 날아오는 모습에 루시아가 눈을 꾹 감은 채로 몸을 움츠렸다.
“어억!”
눈을 감은 채였는데 눈이 부실 정도의 밝은 빛이 터졌다. 분명 손이 날아올 타이밍이었는데 그것도 없었다. 루시아가 눈을 슬그머니 떴다.
트드드득.
바닥의 나무가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굵은 뿌리가 솟았다.
“으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뿌리에 붙들려 허공에 매달린 멜리슨이 발버둥 쳤다.
“정말 못 봐주겠어! 정말 나빴어!!”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아의 앞에 작은 요정 날개를 단 새하얀 덩어리가 있었다.
포실거리는 하얀 꼬리가 엉덩이에 달려 있었고 양 갈래로 쫑쫑 땋은 머리 위에는 하얀 귀가 퐁 하고 솟아 있었다.
“누구……?”
요정? 신수?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젬이. 젬이잖아! 루시아, 나 몰라?”
귀여운 생명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젬의 통통한 볼살이 씰룩거렸다. 여전히 루비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루시아를 직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젬이네…….”
“응! 젬이가 루시아 괴롭히는 저 나쁜 아저씨 혼내 줄 거야! 나빴어!”
젬이가 루시아 앞에서 빙글 돌았다.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앙증맞은 두 팔을 허리에 얹었다.
“하하…….”
살았다.
루시아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참고 있었던 눈물이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게 루시아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녀에게서 환한 빛이 터졌다.
방금 전보다 더 환한 빛이.
루시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몸속을 흐르는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루시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뒤로 넘어진 멜리슨이 멍하니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관을 응시했다.
주먹만 한 신수가 툭 튀어나온 것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일이었는데…….
이제는 루시아가 각성하고 있었다. 성 레시카의 후손이 새로운 성녀로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그 거룩함 앞에서 멜리슨이 휘청거렸다.
“서, 성녀……!”
그 찬란한 빛에 사람들이 몰려들 때까지 멜리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왠지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 이제 ㅈ됐어.’
* * *
기절한 척하다가 정말로 잠들어 버릴 줄이야. 어색하게 눈을 뜨니 엠마가 내게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엄마야!!”
“공작님, 일어나셨군요! 저는 공작님이 안 일어나시나 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붕어눈이다.
“전처럼 한 달 동안 안 일어나실까 봐…….”
“그럴 리가 있겠어……? 나 완전 멀쩡해.”
방 안에는 다행히도 엠마뿐이었다. 완전 쾌적한 상태.
“그런데 공작님… 정말로 큰일 났어요.”
엠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아니, 그렇게 울고도 또 울 힘이 남아 있는 거야?
못 살아.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루시… 루시아가 아직 안 들어왔어요.”
“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이건 그냥 큰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관이 뒤집힐 정도의 큰일이었다.
아픈 척하던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몇 신데!”
“……해가 밝았어요, 공작님.”
침대 주변을 서성거리자 나를 따라서 귀여운 녀석들의 고개가 휙휙 움직였다.
“이제 말해 봐, 엠마. 요새 루시아하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제 루시아는 어딜 갔었고?”
엠마가 펑펑 울면서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속도보다 눈물이 흐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요새… 저희는 데이먼 백작 가의 약점을 캐려고 하고 있었어요.”
“뭐?”
“그래서 멜리슨에게 접근하기로 하고 루시아가…….”
아, 머리야.
갑자기 어지럼증이 훅 하고 올라오는 듯했다. 루시아는 그냥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다.
괜히 여주인공을 했겠는가.
과장 보태서 누군가를 꼬시는 데 10분이면 충분하다고나 할까.
그런 루시아가 멜리슨에게?
가뜩이나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한다던 녀석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훤했다.
“그러면 데이먼 백작 가로 사람을 보냈어?”
“케르인 집사장님께 말씀드려서 사람을 보냈어요.”
“그런데.”
“루시아가 없다고 잡아떼더라구요! 그런데 저택에 멜리슨이 있는 건 확인했어요.”
엠마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쓰러졌지, 루시아는 안 돌아오지.
엠마가 마음고생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안 돌아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역시 멜리슨이다.
“……그러면 그 멜리슨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네. 이번에도 루시아가 젬이를 데려간 것 맞지?”
“네, 네. 공작님. 그리고…….”
엠마가 묘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눈물이 얼굴에 흥건했다.
“어제 데이먼 백작 가에서 이상한 빛이 터져 나오는 걸 본 사람들이 많아요.”
“빛이 터져 나온다고?”
“네! 이렇게 번쩍!”
어……?
그 순간 심장이 뚝 하고 떨어졌다. 아무리 데이먼 백작 가가 옆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보일 정도면…….
강렬한 빛이었을 것이다.
그런 빛이 터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성녀 각성?
우리 루시아, 각성했니?
그래서 거기에 갇혀 있는 거야? 우리 애가 그렇게……. 그렇게 기특한 짓을 했는데!!
어쩌면 바라던 대로 원작 시작이 당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조금 위험하단 말이지.
“빨리 외출 준비를 해 줘.”
나엘은 히샤와 메리, 그리고 또리를 이용해서 감금되어 있었던 신수들을 찾아냈다.
메리와 또리만으로도 젬이를 찾는 건 가능할 거다.
그렇다면 금방 젬과 루시아를 찾아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데이먼 백작 가가 아무리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슈타디온만 할까!
이럴 때 작위 남용하는 거지.
“아, 그 전에. 신수들은 어떻게 됐어?”
“……지금 수의사 선생님이 살피고 계세요. 그런데 상태가 좋지 않대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게 먼저일까. 루시아? 아니면, 신수들? 왜 내 몸은 하나인 거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아메바처럼 분열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 몸, 눈치 없네…….
“어, 음… 먼저 신수들한테 들렀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지?”
물론, 루시아가 이 세계관의 여자 주인공이고 지금은 각성했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이 위태롭다는 신수들이 먼저였다.
그 애들에게 꼭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