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엘이 눈을 빛내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까딱였다.
‘시작해.’
그의 뜻을 이해한 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숨 막힐 정도의 정적이 맴돌던 곳에서 인기척 하나가 사라졌다.
나엘은 아가사의 너머로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있는 목표물들보다 아가사가 더 마음 쓰였다.
떨리는 아가사의 어깨와 고집스러운 뒤통수까지.
나엘이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아가사의 앞으로 팔을 둘러 그녀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가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가사가 울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나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나엘을 두드려 댔다.
아가사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이미 나엘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나엘이 아가사를 제 품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반발 없이 끌려오는 아가사가 안쓰러웠다.
“크르르…….”
히샤가 몸을 낮췄다.
[물어 죽여도 되나? 마엘리스 신께서는 말씀하셨어. 참기만 하는 게 답은 아니라고!]
히샤의 목소리가 나엘의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나엘이 이를 악물었다.
‘기다려, 기사들이 곧 들이닥칠 거다. 인간은 인간들의 법으로 처벌해야 해.’
[인간은 인간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 정말 공명정대하군. 저들은 신수들을 착취했다. 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안 들리나?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안 들려?]
히샤가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히샤의 마음은 안다. 그 또한 같은 마음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수들의 지위는 한참 낮아진 상태였다. 아쉽게도 신수와 신이 아닌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잘못된 선택은 신수와 인간 사이에서 반목을 만들 수 있어.’
그렇기에 일단은 참아야 했다. 이렇게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런 게 두렵지 않아. 인간들은 먼저 우리를 버렸다. 우리라고 해서…….]
히샤가 잇새로 분노를 토해 냈다. 결국 참지 못한 감정이 튀어 나갔다.
“컹컹컹!!”
평소의 귀여운 울림과는 다른 서늘한 소리와 함께 히샤가 몸을 내던졌다.
샤르륵-.
그 순간 찬란한 금빛이 휘날렸다. 나엘이 침음을 삼켰고, 아가사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갑자기 올라간 몸의 체온에 아가사가 비틀거렸다.
그 귀엽던 히샤가 아니, 날카로운 이빨을 고스란히 드러낸 남청색의 거대한 늑대가 야성을 표출했다.
“이, 이건 뭐야!”
“신수겠지! 이게 웬일이야! 돈이 굴러 들어왔구먼! 다들 어디 있어! 당장 나와서 이걸 잡아야지!”
남자들이 발악을 했다. 눈앞의 이익에 미쳐서 이성을 잃은 듯했다.
히샤가 발을 구르자 발톱에 바닥이 깊게 파였다. 큰 소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신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쉬고 있게.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테니.”
으르렁거림이 섞인 히샤의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그 순간이었다.
아가사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리고 나엘의 품에 안겨 있던 아가사가 축 늘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가사!”
나엘이 아가사를 안아 올렸다.
‘뜨거워…!’
나엘이 입술을 악물었다.
아직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가사의 숨소리는 평온했다. 그저 잠든 것처럼.
‘충격을 받은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엘에게도 오늘 목격한 일들은 충격적이었으니까.
순간 히샤가 울음을 터뜨렸다.
“우우우우우우!”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들이 물러섰다.
“왜,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다들 어디 갔어!”
“형, 형! 나도 데려가!”
다리가 불편한 제 동생을 한 번 돌아본 남자가 그대로 달아났다.
“야!! 이 X새끼야!!”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울부짖었다. 히샤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번민이 들끓었다.
나엘의 이상을 이해한다. 히샤는 그의 신수로서 나엘이 가는 길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인간과 신수의 화합.’
나엘은 히샤에게 그것을 약속했었다. 지금 히샤가 제 기분껏 저 인간의 목을 물어뜯는다면 그 ‘화합’에 문제가 될 것임을 히샤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조차 참아야 하는가! 히샤는 마엘리스를 대신해 신수들을 이끄는 이였다. 히샤에게는 저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히샤.]
히샤가 멈춰 섰다.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히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텅 비어 있는 허공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괜찮을 거다, 히샤. 내가 너희를 지킬 테니.]
히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히샤는 희미한 실루엣이 다친 신수들을 감싸 안는 걸 본 것 같았다. 순식간에 히샤의 어깨와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머니…….”
신수들의 숨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짐과 동시에 히샤의 몸이 다시 줄어들었다. 평소의 귀여운 모습으로.
그때였다.
“쥐새끼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모두 추포하라!”
자리를 떠났던 나엘의 기사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뒤쪽으로는 도망쳤었던 남자가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온몸을 비틀며 반항하던 남자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던 나엘이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는 의식을 잃은 아가사가 안겨 있었다.
“히샤.”
나엘이 나직한 시선으로 히샤를 응시했다.
“잘했어. 잘 참았어.”
히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너 때문에 참은 게 아니야.]
나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임무를 마친 기사들이 나엘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황성으로 옮겨라.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조사하겠다. 언론을 통제하고 여기에서 있었던 일이 함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네, 전하!”
“그리고… 다친 신수들은 슈타디온으로 조심히 옮기도록.”
“네, 전하!”
성공적인 마무리였다.
이브라임 일행도 거래상 전부를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새로운 운명에 커다란 한 획을 그었다.
* * *
이브라임이 다리를 꼰 채 못마땅한 얼굴로 아가사를 응시했다. 그 옆에서 엠마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다비드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나엘이 돌아왔다. 황성으로 끌려간 죄인들의 처우를 확인하고 돌아온 것이다.
“얘 하나 못 지키고 뭐 한 거지?”
머리를 쓸어 넘긴 나엘이 이브라임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느껴지는 분노를 이브라임이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황태자 전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만.”
이브라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어가 없었다 이거지.
“뭔가 찔리시나 봅니다.”
나엘이 이브라임을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강렬한 빨간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환상이 일었다.
다비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픈 사람 앞에 두고 이러실 겁니까? 저렇게 힘들어하시는데 두 분 덕분에 공작님께서 참 행복하시겠군요.”
그제야 이브라임이 시선을 돌렸다. 다비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고개를 돌린 나엘이 아가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이 나엘의 마음에 걸렸다. 아까보다 얼굴빛이 더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나엘이 고개를 돌려 모인 인원을 살펴보았다.
이브라임, 다비드, 엠마.
죄다 나엘을 향한 이글거리는 적의를 표출하고 있는 이들뿐이었다.
이브라임은 나엘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비를 틀었고. 다비드는… 눈빛이 참 불손하다.
거기다가 엠마라는 하녀의 눈빛의 강렬함을 보건대 하녀인지 아니면 황후인지 구분이 가질 않을 지경이었다.
나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처럼 불손한 자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다비드의 말대로 아가사가 누워 있기도 했고 오늘은 저들에게도 참 긴 하루였을 것이다.
나엘이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하곤 문을 열었다.
“가서 공작 가의 주치의를 찾아와. 자세히 들어야겠으니까.”
“네, 넷!”
보좌관이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주치의가 보좌관과 함께 날듯이 달려왔다. 주치의 손에 들린 진료 가방이 덜렁덜렁거렸다.
“화, 황태자 전하, 부르셨습니까!”
주치의가 나엘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하다.
나엘이 고개를 까딱했다.
“공작의 상태는?”
주치의가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분명 아까 자세히 설명했는데 아무도 전하지 않은 건가?
주치의가 눈을 굴렸다.
아니면 공작에게 무슨 문제라도?
아까보다 혈색이 좋아진 것을 보았을 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주치의가 고개를 조아리고는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는 일시적인 어지럼증으로 기절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순간적으로 받은 강한 충격도 보탬이 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결론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건가? 주치의가 좀 더 자세를 낮췄다.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계시니 곧 깨어나실 것입니다.”
“그게 언제지?”
“곧…….”
“추상적인 대답이 아니라 확실한 대답을 원하네.”
주치의가 식은땀을 닦았다.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외치고 싶은데 상대가…….
“어, 어……. 내일 전에는……. 깨어나시지 않을까요?”
나엘이 차갑게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내일 전 언제?”
나한테 왜 그래. 자는 사람이 언제 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겠지.
깨우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