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루시아가 이를 꽉 물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안 그래요. 안 그럴 자신 있어요. 지금도 봐요. 쟤들은 저렇게 술에 취했는데 저는 멀쩡하잖아요.”
“얘가. 내가 이래서 니가 순수하다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거든. 술 취한 놈들이 얼마나 힘이 넘치는지 모르는구나?”
루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루시아의 주머니에서 젬이 몸을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젬을 토닥여 주고는 루시아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는 게 있으면 얼른 얻어 내고 떠나.”
“고마워요.”
“뭘. 내 옛날 모습 같아서 그래.”
“우우우우우.”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탕아들이 야유를 보냈다. 바텐더가 눈을 부라리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다 나가. 술 안 팔아!”
“에이, 제니가 더 나았다는 말이지! 뭘 오해를 하고 그러나!”
한 탕아의 말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주점 내 여기저기서 터졌다. 루시아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구석진 곳에 널브러진 오징어 떼가 보인다.
루시아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말 도움 될 게 없나?’
차라리 체이스에게 접근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수확 없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킬 때였다.
“어디 가, 루시아.”
반쯤 꼬인 혀로 멜리슨이 루시아를 불렀다.
“멜리슨? 정신이 든 거야?”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멜리슨에게 다가갔다. 멜리슨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뺨을 탁탁 때리곤 멜리슨이 제 친구들을 깨웠다.
“오늘도 우리 여왕님께서 승리하셨다. 이 군졸들아. 일어나서 우리 여왕님을 받들지 못해?”
어후, 정말 싫어.
몸서리치면서도 루시아가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 여왕님이라니. 기분 좋은걸.”
루시아가 어색하다는 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멜리슨이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오늘 멜리슨은 그의 목적을 반드시 달성할 생각이었다. 루시아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이는 게 그 목적이었다.
여태 질질 끌었으면 됐다.
손목 한 번 잡는 것도 비싸게 구는 통에 애끓던 참이다. 이제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그럼 우리 자리를 옮길까?”
루시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흐느적거리는 오징어 떼들이 두 다리로 걸으며 정신이라도 찾길 바라며.
끼리릭, 끼릭.
루시아의 새로운 운명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운명이 실이 새롭게 자아내졌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 * *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조잡스럽게 지어진 고택 앞에서 멈춰선 세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낑낑거리며 치마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확실히 여기다. 나엘의 말대로 신수들이 자신의 친구를 찾아낸 거다.
“너희는 조심히 숨어 있어. 잘할 수 있지?”
“까으응…….”
“낑!”
메리와 또리는 밖에서 망을 보기로 한 기사의 품에 안겼다.
그 뒤를 따르던 히샤는 나엘에게 뒷덜미를 붙들렸다. 네 다리를 바동거리며 히샤가 불만을 표출했지만, 나엘은 끄떡없었다.
“히샤는 데려가는 게 좋겠어.”
“하지만, 위험할 수 있어요.”
“히샤에겐 내 옆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그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날 보던 히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히샤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출발하지.”
나엘이 히샤를 어깨에 얹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히샤의 꿈틀거리는 잘생긴 눈썹과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고 있으니… 또 귀엽네.
저기가 지 자린 줄 아나 봐. 엉덩이 한 번만 찔러 보… 정신 차려. 너 지금 심각한 일 하고 있잖아.
큼.
고개를 흔들고 주변 환경에 집중했다. 아니, 뒷발로 버팅기겠다고 두 다리로 꿈쩍꿈쩍하는…….
정신 차리라고, 아가사.
뺨을 탁탁 때리자 찰진 소리에 히샤가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왠지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마치, 너는 내가 지켜 줄게. 이런 느낌?
하. 십덕사. 여기가 바로 내 무덤인가 싶다.
“공작님, 조심하십시오.”
히샤의 귀여움에 살짝 비틀거리자 기사가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아…….”
그제야 벽면에 돋아 있는 날카로운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딱 봐도 저는 수상해요, 하는 것 같달까.
가장 앞에 서 있던 나엘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코.
그게 멈추라는 신호였구나.
아무것도 몰랐지.
나엘은 그의 등 뒤에 부딪힌 날 힐끔 보고는 검지를 입술 앞에 얹었다. 그러곤 내가 앞쪽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젠 비율 조정 좀 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도 너는 하는 일에 비해 많이 받고 있다고! 이 일을 고안한 게 누군데 그래.”
“아니지. 일은 내가 다 하는데 돈은 네가 책상에 앉아서 다 챙기고 있잖아, 어?”
안쪽을 들여다보니 덩치 큰 남자와 책상에 앉은 마른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휠체어가 있는 걸 보니 책상에 앉은 남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저 신수를 발견한 건 나야! 신수가 피를 준 것도 나고! 그 피를 마시면 죽다가도 살아난다는 걸 알아낸 것도 나야! 그러면 당연히 내가 돈을 많이 받아야지!”
저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러니까 저 휠체어 탄 남자가 왜인진 몰라도 다쳐서 죽어 가고 있었고 신수가 그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수는 착하게도 저 나쁜 놈을 살려 줬고.
근데 저 X새끼는 신수를 납치한 거네?
뭐, 저런 천하의……. 볼링공으로 양 옆구리가 으스러질 때까지 핀처럼 처맞을 새끼가 다 있지?
헉, 헉.
숨이 찰 때까지 욕을 해도 모자란 놈.
“야, 이 머저리 새끼야. 그 돈 모아서 뭐 하려고 그래? 네가 여기 처박혀서 뭘 하려고!”
덩치 큰 남자의 말에 화가 나는지 마른 남자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저기요.
그 돈을 나눠 가져야 한다면 당연히 다 신수 거 아니겠니? 피를 뽑힌 건 걔네들인데!
“나머지 한 놈을 잡은 건 나잖아!”
“그게 네가 한 일이야? 저것들이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굳이, 굳이 제 친구 주변을 맴돌아서!”
“너 혼자 있었으면 둘 다 못 잡았어! 실질적으로 일하는 건 나라고!”
왁왁거리며 싸우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해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좀 더 먼 곳을 봐.”
그때, 나엘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도 간신히 들릴까 말까 할 만큼 작게.
“네?”
알아듣지 못한 내가 되묻자 나엘이 고개를 숙였다. 내 어깨에 고개를 가까이한 나엘에게서 향기가 훅 끼쳤다.
……어디서 맡아 봤더라. 짙은 녹음을 연상시키는 향이었다. 냄새만으로도 내 앞에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좀 더 먼 곳을 봐 보라고.”
나엘의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모든 건 슬로 모션처럼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나엘이 손을 내려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내 손을 쥔 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나와 나엘의 손을 겹친 채로.
따뜻했다. 차갑게만 보이던 나엘의 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했다.
그의 온기에 정신이 어질했던 사이 어느새 두 손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나엘과 내 손끝에 맺힌 것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어떤 생물이었다.
“헙……!”
그 충격적인 모습에 밀려 잊혀졌다. 나엘의 숨소리도, 그의 체온도.
쿵, 쿵.
몸통 속에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울림이었다. 간신히 숨을 쌕쌕 내쉬는 소리가 멀리 있는 내게도 들리는 듯했다.
“크르르르….”
히샤가 털을 세운 채 불안정한 모습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히샤.”
나엘의 부름에도 히샤는 안정되지 않았다. 다친 신수에게 공명하는 모양이다.
히샤의 숨소리에도 고통이 서렸다.
“어떻게 저런 짓을…….”
나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바로 제국의 현실이지. 제국뿐만일까. 신수가 능력을 잃은 이후로 대륙 어디서든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가사.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제국의 소태양으로서 네게 감사해.”
나엘이 말할 때마다 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제는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신전과 황실도 손을 놓은 일을 대신해 주고 있지 않나.”
“나는… 이런 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작은 연민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또리를 버리는 야니스 자작 가의 영애를 보는데, 버림받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고아원에 맡겨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쟁이여서 기억조차 못 하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만든 동물센터는 파라다이스라기보다는 버림받은 것들끼리 체온과 애정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요람 같은 곳이었다.
가장 비참한 이들을 모아 놓은 요람.
어쩌면 내가 외롭기 싫어서 시작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었다면, 내가 외롭지 않았다면, 내가 버림받는 아픔을 몰랐다면 저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게 대단한 거지.”
나엘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내 감정을 알고 달래 주는 것처럼. 그러곤 자연스레 내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손이 여전히 붙들려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구해 주세요, 전하. 저 불쌍한 아이들을 구해 주세요.”
토독.
눈물이 나도 모르게 떨어졌다.
“약속할게, 아가사.”
그 말이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