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저도 전쟁에 참가할 의사를 충분히 내비쳤습니다, 폐하! 제 의사를 묵살하신 건 황제 폐하셨어요! 애초부터 총사령관은 황태자로 낙점해 두고 계셨지요!”
체이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흐트러진 그를 보면서 로살린이 방긋 웃었다.
“체이스, 황제는 정치가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장사꾼이기도 하지요. 가장 값나가고 가치 있는 걸 두고서 왜 질 떨어지는 걸 골라야 하죠?”
체이스가 이를 꾹 다물었다.
로살린이 말하는 ‘질 떨어지는’의 주체가 자신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체이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황후 폐하……!”
“황태자는 일찍이 검술로 인정받았어요. 대륙에서도 황태자는 손꼽히는 기사지요. 그 이름을 선망하는 기사들도 많아요.”
황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체이스가 침을 삼켰다. 반박을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로살린의 말대로 황태자가 더 값진 기사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황제가 바라는 건 뛰어난 기사예요. 황제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높은 기사. 체이스는 그럴 수 있나요? 스스로의 못남을 타인의 탓으로 미루면 안 되죠.”
“그러면 이대로 포기하실 겁니까?”
로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같은 모친의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동생들은 왜 이리도 다른 건지 모르겠다.
체이스는 그나마 황후와 가장 비슷한 형제라고 할 만한데 아직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어리석은 면이 있었다.
왜 흑이 아니면 백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체이스. 세상에는 여러 시각이 존재해요.”
“…….”
“체이스가 황제에게 어필해서 슈타디온을 얻어 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순 없겠어요?”
로살린의 목소리가 꿀을 탄 것처럼 달콤해졌다. 그에 반해 체이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채 얼어붙었다.
저런 말투를 쓸 때의 로살린이 오히려 더 무섭다는 것을 안다.
체이스가 침을 삼켰다.
체이스가 어설픈 악당이라면 로살린은 제대로 된 악당이라고 할까. 절대로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폐하.”
체이스가 아까와 달리 납작 엎드리자 로살린이 웃음을 흘렸다.
“아직 체이스가 이리 어린아이 같으니. 제 손이 많이 가는군요.”
“가르침을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폐하.”
“꼭 공식적인 입장만 중요한가요?”
체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지요. 그중에는 밖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아요.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체이스가 그 말뜻을 천천히 생각했다. 알릴 필요가 없다.
체이스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폐하.”
“지금부터야말로 체이스에게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작의 마음을 끌어들여 우리의 것으로 하느냐, 아니면 잃느냐.”
물론, 로살린은 체이스에게만 맡겨 둘 생각은 아니었다. 로살린은 자신 외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오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세요, 폐하.”
“체이스와 멜리슨, 두 사람 모두 결혼할 시기를 훌쩍 넘기지 않았습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슨에게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전해 두세요. 계속 그렇게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면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서늘한 경고가 떨어졌다.
“내 손으로 그 애를 거두게 하지 말라고요.”
체이스가 왠지 모를 느낌에 목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그의 목은 멀쩡했다.
“네, 폐하.”
일방적인 대화가 끝나자마자 체이스는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로살린의 궁에서 도망쳤다.
한순간도 이성을 잃지 않는 로살린이 두려웠다. 풀어 주다가도 이렇게 목줄을 당길 때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체이스가 제 몸을 더듬어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너무 방심했군.”
로살린 필요하면 그도 제거할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하루였다.
그나저나.
“아가사 공작이라…….”
체이스가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전략을 잘못 짠 것 같다. 아가사에게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정략결혼만 생각했었는데…….
‘마음을 사야겠군.’
훨씬 어려워졌지만 어쩔 수 없지. 체이스가 저택으로 가는 길에 꽃 상점에 들렀다.
나름대로의 낭만을 위하여.
* * *
그리고 고민에 빠진 또 다른 한 명.
사일러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위태롭게 위자를 뒤로 젖히고 있는 사일러스를 보며 유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일러스는 한창 질풍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고 있었는데 로살린 황후나, 황제, 황태자 앞에서는 연약한 어린 동물처럼 굴었지만…….
평소에는 들짐승이 따로 없었다. 유모가 이를 악물었다.
“사일러스 황자 전하, 그러다가 다치시면 어쩌시려구요. 게다가 이곳은 황성입니다. 똑바로 앉…….”
“나 갑자기 아픈 것 같아.”
유모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또 이럴 때 안 받아 주면 된통 당하기 마련이다.
“마음이.”
사일러스가 왼 가슴 위를 짚었다.
“나는 형님이 너무 좋은데 어머니는 아니잖아. 우리 모두 행복하게 지내는 방법은 없을까?”
적자와 서자로 태어난 이상 그럴 길은 요원했다. 게다가 로살린 황후는 자신의 야욕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금세 젖어 든 눈의 소년이 안쓰러워 보여 유모의 눈가도 따라 촉촉해졌다.
사춘기의 널뛰는 감수성에 유모마저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가여운 우리 황자님…….”
“그렇지, 나 가엽지.”
사일러스가 추욱 늘어진 강아지처럼 되물었다.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최근 들어 자기 멋대로 굴어 얄미워도 갓난아기 때부터 아들처럼 고이 키운 황자다.
뭘 해도 예쁜데, 저렇게 속상해하면 같이 속상할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 나 슈타디온엘 가 보고 싶어.”
“예?”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모도 나 안쓰럽다며.”
사일러스가 이번에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가 궁금해. 대체 어떤 여자길래 우리 형님을…….”
“그건 안 되십니다!!”
“왜?”
사일러스가 대번에 반박했다.
“아까는 안쓰럽다며! 그런데 왜 안 돼? 왜 나는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아?”
“그래도 이건 다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요. 물론, 저는 황자님이 안타깝고…….”
“됐어.”
사일러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못 하게 할 거면서. 나는 그냥 궁금한 건데. 왜 어른들은 나만 따돌려? 이러니까 형님이 나도 싫어하지.”
이성이 돌아온 유모가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참자, 참아. 사춘기는 이성이 통하지 않는 시기야.’
유모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사람들이 사일러스가 양의 탈을 쓴 존재라는 걸 알아 줘야 할 텐데.
남들은 유모를 보며 편하게 양육한다고들 말한다. 이런 속사정은 하나도 모르고!
바깥에서 천사 같은 황자님이 안에서는 악마 같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도 모르고!
부루퉁한 얼굴로 사일러스가 의자를 기우뚱거리며 움직였다.
끼이익, 끼이이이익.
쿵!
기어이 바닥에 넘어진 사일러스를 보며 유모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 보셔요! 다치신다고 했지요!”
하지 말라고 하면 꼭 더 하려고 그런다. 대체 황자는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유모가 황자를 안아 일으켰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던 사일러스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사일러스가 눈을 비볐다.
이 나이 먹고 눈물이라니.
‘하, 우스운 꼴을 보였군.’
사일러스는 한창 사춘기 진행 중이었다.
* * *
다비드와 엠마를 그럴듯하게 꾸며서 나란히 세워 놓으니 딱 역할에 맞아 보였다. 엠마의 손끝이 뭉툭한 것이 신흥 졸부라는 단어가 딱 맞아 보인달까.
“좋아, 완벽해.”
엠마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오호호호호호!”
“……그렇게 안 웃어도 돼.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저래가지고 되겠어?”
쉿.
이브라임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비드와 엠마에게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너희는 할 수 있어!”
“저도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럼요.”
과한 자신감은 불안함의 표출이라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는 거 아니겠어?
“그럼 출발해 볼까?”
내가 구한 작전 본부와 다음 암시장이 열리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암시장은 무려 일주일이나 열린다고 하니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합당해 보였다.
다비드와 엠마가 나란히 작전 본부를 떠났다.
“이브라임?”
그들의 비밀 경호를 맡은 건 이브라임이었다.
서둘러서 쫓아가도 모자를 판에 이브라임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