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
“잊고 있었나 보군.”
나엘이 피식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차를 준비한 시종들은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정말로요.”
“어쩔 수 없지. 기억하는 사람이 챙겨야지.”
나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혼식에 대한 건 내가 알아서 준비해도 되겠어?”
“……네.”
사실 그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은 나보다는 나엘이 나을 것이고.
“자, 그러면 용건은 뭐지? 약혼식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을 것 같진 않은데.”
“그게.”
벌써 세 번째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불쌍한 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을 구해 주고 싶다?”
“네, 황태자 전하.”
“가끔 보면 신수와의 친화력이 참 높은 것 같아.”
“……인간보다 순수한 신수가 더 믿을 만하니까요.”
“그럴 만도.”
나엘이 내 말에 수긍했다.
“어쩌면 메리 덕분일지도 모르지.”
“메리가 왜요?”
“……? 제일 먼저 데리고 있었던 게 메리 아니야?”
“어…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런데 메리가 신수 친화력과 무슨 상관이 있어?
“……그래, 메리도 신수잖아.”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메리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키우던 아이였다. 그런데 메리가 신수였다고?
그 세계엔 그런 게 없는데.
이게 말이 돼?
“메리는 그냥 동물 아니에요?”
“아가사……?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네.”
나엘이 헛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신기하군. 가장 가까운 곳에 신수를 두고도 아는 게 없다니. 메리는 신수야. 그것도 유일한 쌍둥이 신수지.”
“예?”
나엘이 바닥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히샤를 번쩍 들어 올렸다.
“히샤의 쌍둥이잖아. 본디 늑대는 쌍둥이 신수로 태어나. 둘이 한 쌍이지.”
“예?”
아까부터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나엘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상하지 않은지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지 않고서야 메리가 신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렇게 잘 지낼 리가 없잖아. 본디 야생 동물하고 신수는 한곳에서 지내지 못해.”
“세상에…….”
정말로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 내가 이곳으로 온 게 메리하고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설이었다.
“이 쌍둥이 신수가 마엘리스하고 가장 가깝다고 알려져 있어. 메리 덕분에 네 신수 친화력이 올라갈 수 있다는 거지.”
“그… 렇군요.”
“덕분에 이번 일에 나서려는 것일 수도 있어.”
“…….”
“자기 약혼식보다 관심이 많잖아?”
앗, 이건 약간 비꼰 것 같기도 하고.
“도와줄 건가요?”
나엘이 내 머리 위에 툭 하고 손을 얹었다.
“하고 싶은 일이면 해야지.”
머리 위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내 머리에서 손 치우시지.
나엘이 피식 웃고는 내 머리를 헝클었다. 뭔가 나는 그날 이후로 나엘을 대하는 게 불편해졌는데 오히려 나엘은 편해진 것 같았다.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선 나엘이 말했다.
“필요할 때 불러.”
이것으로 반지원정대 모집이 끝났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메리를 유심히 관찰했다. 조그마한 게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자고 있었다.
메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분홍색 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무슨 꿈을 꾸는지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녀석, 꿈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
아, 이게 아니지.
쟤가 늑대 신수라고?
“메리, 말 좀 해 봐.”
메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배를 간지럽히니 눈을 슬쩍 뜨고는 불만을 표출했다.
‘나 잘 때 저기압이야. 건드리면 좋지 않은 꼴 보는 수가 있어. 조심해.’
그런 눈빛?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손을 떼자 메리가 다시 머리를 툭 떨구고는 눈을 감았다. 누가 보면 오늘 되게 고생한 줄 알겠어.
한 거라고는 뛰어놀기, 먹기, 싸기, 낮잠 자기, 신수들하고 술래잡기 하기…….
일정이 빡빡하긴 했네.
큼.
그런데 메리가 신수라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
메리가 신수여서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나는 나름 이 삶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아가사를 대신해서 휘둘려야 하는 건 별로지만 그 외의 것들은 괜찮았다.
다이아몬드 수저가 땅바닥에서 주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메리에게서 그 외의 특별한 점은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중에 히샤가 각성할 때나 조금 영향을 받으려나.
“에이… 뭐든 간에, 메리. 항상 건강하게 옆에만 있어.”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역시 달라질 건 없다.
* * *
그리고 나는 내가 무언가를 대단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비드와 이브라임, 마지막으로 나엘까지.
이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을 엄청난 생각을 하다니.
세 사람은 딱딱한 표정으로 나만 보고 있었다.
“나한테만 부탁한 게 아니었군.”
“아가사, 정말로 이 자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공작님…….”
차례로 이브라임, 나엘, 다비드였다. 서로에게 아주 불만이 많아 보인다.
이러다가 오합지졸 되는 거 아니냐. 팀전은 협동이 필수인데.
“……다비드 경은 정보를 모아 줄 거예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보고서도 다비드 경이 준비해 준 거예요. 자, 박수.”
짝짝짝…….
박수는 나하고 엠마만 쳤다. 이브라임과 나엘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브라임은 원딜러……. 아니, 원거리에서 엄호를 해 주실 거고요.”
이브라임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마지막으로 황태자 전하.”
나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왜에. 부르기만 했는데 불만이 뭐야.
“왜 나는 이름……. 아니, 됐다. 계속해.”
“황태자 전하께서는 근접전과 추후 일 처리 쪽을 맡아 주실 거예요.”
나엘이 손가락으로 비스듬히 안경을 밀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 엠마를 보았다.
이거… 괜찮을까?
엠마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 눈빛이 ‘어쩜 모아도 저렇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저는 정보만 모으면 되는 걸까요?”
“아니. 내가 지금 마지막 멤버를 소개 안 했네. 엠마!”
엠마가 차분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여기에 있는 엠마하고 다비드 경이 함께 잠입해 줬으면 좋겠는데. 다비드, 시간이 될까?”
다비드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요. 절대로 저 빼놓으시면 안 돼요.”
으응… 그랬다가는 혀 깨물고 죽기라도 할 기세였다.
“알았어……. 그리고 저는 총괄 지휘를 맡을 거예요. 저는 특히 이걸 제공하죠.”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려 보았다.
“돈 걱정은 말고 다들 열심히만 부탁드릴게요.”
“네, 공작님!”
다비드가 나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고맙다, 다비드. 반응해 줘서. 학교에서 대답 잘하는 학생을 예뻐하던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할 말 많아 보이는 나엘과 이브라임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비드하고 엠마가 암시장에 가서 거래상을 만날 거야.”
“잘 부탁드려요, 다비드 경.”
“네, 엠마.”
“두 사람의 레퍼토리는 이래. 막 결혼한 신혼부부이자 신흥 상인 조합 사람으로서, 돈벼락 맞은 졸부 출신인 거야.”
아주 디테일한 상황 설정이었다. 이럴 때 디테일이 생명인 거, 다들 알쥐?
“그런데 막 태어난 아이가 아파.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신수의 피가 간절한 상황이지. 부르는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아. 연기력이 중요한 역할이지.”
“여보……, 우리 애기 어떡하지? 나 그 애가 잘못되면 못 살 것 같아…….”
엠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다비드가 바짝 얼어붙었다.
엠마 최고…….
이 오합지졸에서 나는 엠마만 믿어야 하는 건가. 심오한 내 표정을 본 다비드가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여보, 나만 믿어.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데이지는 살려 줄게. 절대로 우리 여보 슬플 일은 없을 거야…….”
애기 이름이 데이지였어?
지금 처음 알았네.
두 사람 축하해(?).
나엘과 이브라임이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뻔뻔한 엠마와는 달리 다비드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긴 한데. 다른 준비는 제가 할 거예요. 이번에 암시장이 열리는 시간과 위치는 보고서에 적혀 있어요.”
“……황실 정보국보다 낫군.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지?”
나엘이 서류를 넘겨보다 물었다.
“열심히 구했습니다. 아실 필요 없습니다.”
다비드가 아까와는 다른 온도로 대답했다. 나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