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약혼녀?”
“약혼녀요?”
이브라임과 아가사가 동시에 펄쩍 뛰었다. 나엘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아가사를 당겨 제 뒤에 두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어, 아가사.”
“……후.”
제가 선택한 일임에도 심란해진 아가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생이 개똥밭으로 굴러가는데 두고 볼 수밖에 없다니.
그리고 반면에 이브라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가사의 반응을 보건대 그리 반기는 편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하진 않는다.
‘대마법사나 대신관, 황제, 황태자만이 해 줄 수 있다고 했었지.’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 일과 약혼이 연관이 있는 거라면……. 이브라임이 눈살을 찌푸렸다.
“축하해 줘, 마법사. 우리가 약혼을 하게 됐거든.”
이브라임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나엘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브라임은 그들의 약혼을 축하해 줄 마음이 개미 똥꾸멍 만큼도 없어 보였다.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촉은 맞아떨어지는 법이지.
“저……. 이만 흩어지면 안 될까요.”
아가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습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
아가사의 연약한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치 기운을 다 빨린 기분?
두 사람을 흩어 놓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 우리 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아가사가 단번에 동조했다.
나엘은 이브라임을 향한 끝없는 견제를 보이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이브라임은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대마법사…….”
이브라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입주 마법사?”
나엘이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 입주 마법사.”
그냥 본능적인 미움인 것 같았다. 어휴. 주인공 타도…….
둘 다 내쫓고 싶은 마음이 만만했다. 여기에 루시아까지 더해지면. 어휴!
그 전에 한 명씩 내보내야지.
“그렇군. 그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
마음에 안 들면 너라도 안 오면 돼.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약혼식은 생략하는 거죠?”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엘을 빨리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엘이 삐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약혼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러야겠어.”
“네?”
“남에게 보이는 게 목적이잖아. 그럴 거면 약혼식도 성대한 게 좋지.”
“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꼭 그래야겠지?
……무슨 말이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가사가 귀찮을 일은 없을 거야. 내 보좌관들은 이런 일을 아주 유능하게 처리하거든.”
“……그렇군요.”
아니. 아니이이…….
이거 완전 원작 파괸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약혼을 축하해, 아가사.”
안경 너머로 빛을 흩뿌리는 붉은 눈동자가 유독 선명했다.
“……황태자 전하도 축하드려요.”
그 말을 들은 나엘이 기분 좋게 웃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엘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는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오질 않는다.
그래, 니들 멋대로 다 해 봐라…….
* * *
한편, 아가사를 탐내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황후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나엘이 타이밍 좋게 사일러스를 데리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황후는 아가사를 낚아챌 수 있었으리라.
황후가 황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후계자 문제로 황비를 둘이나 들인 이후로 한 번도 황후에게 남자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불타던 연애도 세월과 함께 퇴색되었다. 과거의 사랑과 지금이 대비되어서일까.
황제를 향한 황후의 미움은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만이라도.
“……제 손을 들어 주십시오, 폐하. 아가사 공작이 탐이 납니다. 공작과 체이스를 짝지어 주고 싶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황제는 대번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는 욕심이 과하오.”
“제가요?”
로살린이 날카롭게 웃었다. 드물게 드러난 로살린의 진심이었다. 황제의 앞에서는 이상하게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모든 바닥을 다 보여서 그런가. 로살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제 욕심이 어디가 과한가요? 폐하께서 우리 사일러스에게 아무것도 챙겨 주려 하지 않으시잖아요. 제가 그 몫까지 하는 것뿐입니다.”
“그놈도 이제 어미 품을 벗어날 때가 됐어! 황후가 너무 끼고도니까 애가 여전히 구실을 못 하잖아.”
“사일러스를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로살린이 파르르 떨었다.
황제가 진실로 사일러스의 아비이기는 한가. 제 핏줄을 저렇게 대할 순 없었다.
사일러스를 한 번 안아 준 적도 없는 냉담한 아비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하. 나엘은 그 나이대부터 기사단을 하나 이끌었지. 브륄스 제국의 황족은 대대로 검을 배운다는 사실을 잊었소?”
“그리고 항상 예외도 있어 왔지요.”
로살린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일러스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은 건 순전히 황제 때문이었다.
그 더러운 야욕에 사일러스가 이용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위험에서 아이를 보호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니던가. 로살린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좋아, 그렇다 치자고. 그러면 최소한 나엘을 방해하지는 말아야지. 곧 나엘이 전쟁엘 나가게 되오.”
“…….”
“그리고 나엘은 슈타디온과 손을 잡고 공작에게서 군자금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지.”
황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의 전쟁, 전쟁! 결국은 이번에도 전쟁을 핑계로 나엘이 아가사를 쟁취한 것이다.
“황후가 그 군자금을 다 대 줄 것이 아니라면 한발 물러서야 하지 않겠소?”
“체이스도 검을 쓸 줄 압니다, 폐하.”
“물론 그렇지. 하지만, 체이스 소백작에게 신수가 있는 건 아니지 않소.”
“히샤는 능력 하나 없는 반푼이 신수입니다! 반푼이는 나엘 황태자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상징적인 의미라도 되어 줄 수 있지.”
로살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통 황자는 사일러스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뒤처져 있었다. 태어난 것도, 다른 것들도 모두.
황제의 관심은 언제나 나엘에게 지극히 편중되어 있었다. 이미 황태자가 결정되고 제국의 관심이 나엘에게 편중되어 있을 때 사일러스가 태어났다.
그래서 황후는 사일러스가 안쓰럽고 또 안쓰러웠다.
“신수가 없더라도 전쟁은 할 수 있습니다. 체이스에게 맡겨 주세요. 그 애도 잘 해낼 겁니다.”
“황후.”
황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긋지긋하군.”
차가운 눈빛이 오갔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더 이상 꺼내지 마. 슈타디온 공작과는 나엘이 결혼할 거요.”
황후가 이를 아득 물었다.
빌어먹을 나엘.
항상 사일러스의 것을 앗아 가는 사생아.
그날, 황비가 죽던 날…….
‘괜한 자비가 지금을 만들어 냈어.’
로살린이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황제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로살린이 힘 빠진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것으로 나엘이 슈타디온을 가지게 됐다.
‘대안을 찾아야 해.’
아직은 멜리슨과 체이스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을 적당한 이들과 결혼을 시켜 세력을 부풀려야 한다.
로살린이 생각에 잠겼다.
* * *
나와 나엘의 약혼 소식은 제국을 뒤흔들었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다. 바깥에 나가질 않았으니까.
물론, 저택이라고 해서 조용한 건 아니었다.
“이, 이럴 줄 알았어요! 흐어어어엉!! 제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다 황태자가 꼬신거죠?”
엠마가 바닥을 치면서 울었다.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겠어……. 나 멀쩡해, 멀쩡하다니까?
“…… 이건 음모가 분명해요.”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요새 잘 안보인다 싶더니. 사실 저택에 소문을 낸 것도 루시아였다.
대체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그런 위험한 소문을 물어오는 거람.
“음모는 무슨.”
“그렇잖아요! 공작님이 갑자기 이렇게 약혼을……. 약혼을……. 그것도 황태자 전하랑.”
혹시…….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건가? 말만 그렇게 하고 나엘을 마음에 품었다던가.
아직 각성 전이지만 서로에게 끌린다던가. 뭐, 그래?
나도 모르게 긴장한 얼굴로 루시아를 응시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던졌다.
“이게 다 황태자 전하의 계략이었던 거죠!”
“무슨 계략.”
루시아가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소설에서 봤는데요!”
요새 서점엘 다니는 거였니?
“거기에 보면 계략남, 흑막남, 후회남. 이런 키워드가 유행하더라구요!”
…… 대체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