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만약 정말로 그것만이 목적이었으면 이 홀이 가득 차 있었을 텐데. 아가사가 혀를 작게 찼다.
‘너무 속이 보이는데.’
대체 황후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아가사에게 찍어 붙이려는 걸까.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한 거지.’
아가사는 아무도 몰래 비웃었다.
“물론, 그 외에도 아가사 공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말씀하소서.”
아가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사실은 내게는 동생이 둘 있습니다.”
“…….”
“그리고 나는 혼인 동맹만큼 단단한 결속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가사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 황후가 하려는 말은 너무도 명확했다.
“나는 사일러스 황자에게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황후가 느릿하게 말했다.
“거기에 슈타디온이 함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 애는 너무 여리고 약해서 지켜 줄 이가 필요하거든요.”
아가사가 눈을 깜빡였다.
나 지금 캐스팅 당하고 있는 거? 하핫, 참.
이러다가 주조연 되겠어.
내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물론, 공작에게도 고민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 예배가 끝나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해요.”
혼인 동맹과 체이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대신관.
모든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나 지금 갇힌 거니……?
나엘은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 개똥 같은 황태자 같으니라고!
예배당의 문이 느리게 닫혔다.
쿵.
나 좀 구해 줄 사람……?
* * *
나엘이 닫힌 예배당의 문 앞에 섰다.
“한발 늦었군.”
황후가 아가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는 알 만했다.
어린 신관들에게 확인을 해 보니 오늘 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고작 셋.
황후와 체이스, 그리고 아가사.
그게 전부였다.
팔짱을 낀 채 닫힌 문을 응시하는 나엘의 뒤쪽에서 작은 은빛 머리통이 고개를 쑥 하고 내밀었다.
“형님, 예배당 문이 닫혔는데요?”
한껏 설렘이 묻어나는 목소리. 사일러스가 생긋 웃으며 나엘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사일러스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가는 듯했다.
나엘과 외출을 하다니!
오늘 아침, 벌써 두 달이나 보지 못한 나엘이 직접 사일러스를 찾아온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사일러스의 유모는 나엘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황태자를 막아설 순 없었다.
그래서 나엘이 가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이런 따분한 델 올 줄은 몰랐지만.
“형님, 우리 그러면 다른 데 갈까요?”
사일러스가 어리광을 부렸다.
“아니, 우리는 여기서 기다린다.”
나엘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히잉…….”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일러스가 입술을 툭 하고 내밀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하면 너는 돌아가도 돼.”
그럴 수는 없지.
“아니에요! 형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형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사일러스가 애교 많은 강아지처럼 나엘에게 물었다.
“글쎄. 네가 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겠지.”
나엘이 입매를 문지르며 대충 답했다. 지금 나엘의 머릿속은 아가사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예배당에서 별일이 있겠나 싶다가도 기다리고 있을 아가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였다.
‘나를 정말로 기다렸을까.’
또는, 아가사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정말 약혼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아, 형님! 그러지 말구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유모가 그러는데 형님은 그간 외교 문제로 바쁘셨다던데.”
“내가 그랬나.”
나엘이 무심히 대답하자 사일러스가 나엘의 앞을 빙빙 돌며 소리쳤다.
“형님, 형니임!”
하지만 나엘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사일러스가 포기했다는 듯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네 어머니가 여기에 있다더군. 네 어머니가 내 손님을 모셔 가서 말이야.”
“형님의 손님?”
사일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부드럽게 사륵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움직였다.
새하얀 아이였다.
사일러스는 제 어미가 지켜 낸 만큼 해맑았다. 세상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에 더 잘 어울리는.
나엘이 한숨과 함께 사일러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 내 손님. 네 어머니가 내 사람을 훔쳐 가려고 하거든.”
“어…….”
물론, 사일러스도 눈치는 있어서 나엘과 황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손님이 중요한 사람이에요?”
“글쎄.”
나엘이 손끝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네 어머니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엘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이 참 매혹적이었는데 아쉽게도 본 사람은 사일러스뿐이었다.
“내게는 아주 중요하지. 어쩌면 내 ‘약혼녀’가 될지도 모르거든.”
나엘이 나른하게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오늘 아가사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그는 거의 9할의 확률로 약혼녀를 얻게 될 것이다.
그게 계약일지라도 특별한 사이가 된다는 건 맞으니까.
“약혼녀……?”
그 이야길 들은 사일러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그건 알아채지 못한 채 나엘의 입에선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래, 약혼녀.”
* * *
아놔, 밖에 나엘이 와 있겠지? 와 있어야 하는데. 제발 와 있어야 하는데!
지옥 같은 한 시간이었다.
설교가 시작되고 나서는 안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수백 번 번민했다.
이 자리에서는 미친 척하고 벗어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황후라는 굳건한 방해물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하, 진작에 누구라도 납치해서 결혼이라도 했어야 했나. 왜 이 세계는 나를 홀로서기 하게 두질 않는 거지?
“그리하여… 성 레시카께서는 우리를 모두 이롭게 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기에 와 주신 신자들에게 마엘리스의 은혜가 깃들기를.”
갑작스러운 마무리 인사와 함께 신관이 예배당을 나갔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자, 본편은 지금부터 시작인가. 황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 공작. 이제는 대답을 들려주셔야 할 시간이로군요. 지난 한 시간이 충분했길 바랍니다.”
충분하긴, 제기랄.
등에 땀이 쭉 흘러내렸다.
“공작께서는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체이스.”
“네, 폐하.”
“이런 일은 당사자끼리 논해야 함이 옳지요. 공작의 옆에 앉으세요.”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망할 신분제. 망할, 망할.
여기서 황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황족 모독이다. 엠마도 황후는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었다.
뭐라더라. 여태까지 아무런 구설수 없이 황후 자리를 유지한 것 또한 대단한 거라고.
맞는 말이지.
소설에서도 황후는 위험한 인물로 묘사되었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문제는…….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다는 거지. 망나니 아가사를 황후도 싫어했으니까.
체이스가 바로 내 옆에 앉았다.
“나란히 앉히고 보니 더 보기 좋군요.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요.”
황후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싸늘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황후 폐하, 저는…….”
“공작. 나는 공작이 내 말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체이스가 황후와 똑같은 미소를 짓곤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어딜!”
당황한 아가사가 손을 빼자 체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포기하라는 듯 덧붙였다.
“아가사 공작, 황후께서 이어 주신 사이입니다. 설마 황후 폐하를 거스르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니,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저런 놈하고? 이건 아니지! 에라이, 차라리 감옥을 가고 말지.
“황후 폐하, 저는 아…….”
“어머니!”
“그래, 어머니? 어머니……?”
갑자기 들려온 활달한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은발의 똥강아지처럼 생긴 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외숙부님도 계셨군요!”
“……황자?”
황후가 중얼거렸다.
“황자가 여길 왜……?”
황자? 사일러스? 황후의 금지옥엽?
“형님께서 데리고 와 주셨어요!”
사일러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덜 빠진 젖살이 귀엽게 패었다.
사일러스의 뒤로 나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뒤로 넘긴 나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지금 저렇게 여유를 부릴 때야? 내 목숨이 간당간당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