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머니! 이것 보세요. 특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가장 큰 꽃은 아니군요. 우리는 지금 가장 큰 꽃을 찾는 내기를 하던 중 아닌가요?”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너무 아름다운걸요.”
“고맙습니다, 황자.”
체이스가 미소 짓는 로살린과 황자를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사일러스 황자 전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으아! 외숙부!”
사일러스가 달려와 체이스를 끌어안았다. 로살린이 미소가 가신 얼굴로 체이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사일러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다시 미소 짓고 있었다.
“내기는 다음에 해야겠군요, 황자.”
“그럼…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될까요? 형님이 보고 싶어요.”
“황태자는 지금 매우 바쁩니다. 공무 수행 중인 사람을 방해해서야 되겠어요?”
로살린이 사일러스를 달랬다. 유독 어리광이 많은 사일러스라 나엘도 좋아했다.
그리고 나엘이 데리고 있는 히샤도 좋아했고.
“내가 황태자의 일정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꼭이에요, 어머니.”
“약속하겠습니다.”
그제야 사일러스가 다시 웃었다. 사일러스가 체이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온실을 떠났다.
“……황자 전하께서 여전히 황태자를 따르는군요.”
“마음이 약한 아이라 그렇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체이스.”
로살린이 가위를 내려놓고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에 대한 답을 주시려 부르신 거지요?”
“체이스.”
로살린이 부드럽게 체이스를 불렀다.
“얼마 전에 멜버리 하우스의 행사에 나엘이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폐하.”
“거기에서 나엘이 아가사 공작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지요?”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일이 트리거가 되어 황후의 마음을 움직인 건가? 체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나엘 황태자가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아가사 공작을 나엘 황태자에게 빼앗긴다면…….”
“그럴 수는 없지요. 내가 어떻게 찢어 놓은 이들인데.”
로살린이 입술을 휘어 올렸다.
“과거엔 아가사 공작의 평판이 워낙 좋지 않아 우리 가문에 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아가사는 이제 데이먼의 위용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는 내가 마련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아가사 공작과 진중한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감사합니다.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협박과 설득, 회유. 무엇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아가사 공작이 황태자와 멀어지도록 하면 됩니다.”
“네, 폐하.”
로살린과 체이스 사이에 거래가 체결되었다. 꽃향기가 좀 더 짙어졌다.
* * *
아가사가 손에 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도 보고 불에 비춰도 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초대장으로 보입니다만.”
엠마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 초대장인 거. 그런데 이걸 보낸 사람이 이상하잖아. 나만 그래?”
엠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도 이상합니다. 로살린 황후가 공작님께 왜…….”
“그러니까. 아침 예배에 함께 참석하자고? 이런 초대장을 나한테 보낸다고? 혹시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내가 로살린 황후하고 어떤 친분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가사는 절대로 나엘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가사가 황후와 가까이 지내면 나엘이 싫어할 게 뻔한데.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적인 연락이 오간 것도 처음입니다, 맹세코.”
그러면 이 주조연께서는 제게 왜 연락을 주신 걸까.
나 조용히 살고 싶다니까!
내향인 기빨린다….
“안 가면 안 되겠지?”
“황족 모독…….”
“나 대신 다비드를 보내면?”
“다비드 경은 남잔데……. 황후 폐하는 여자…….”
엠마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받아들이셔야 할 운명인 것 같아요!”
“왜 안 말려? 황태자 만난다고 하면 완전 극혐하면서.”
엠마가 활짝 웃었다.
“제가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저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지라.”
와우.
저런 처세술을 배워야 해.
“화이팅이에요, 공작님!”
“……그래.”
이것으로 또 한 번의 외출이 확정되었다.
요새 멜리슨이나 체이스가 나한테 접근하려 애쓰는 것을 보아선 황후의 목적이야 명확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랑 나를 다리 놓아 주려는 거겠지.
하.
눈썹을 긁적거렸다.
“이거 정말 위험한데……?”
누군가의 손을 억지로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 투수가 필요할 것 같았다. 황후를 이길 수 있는 건 몇 명 안 된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대마법사나 대신관.
뒤에 두 명은 나랑 완전히 연관이 없으니까 패스.
황제가 나를 도와줄 리는 없고. 지금 황제는 빼앗긴 땅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돌아 있을 테니까.
나엘이 바쁜 것도 그 덕분이기도 했다. 소설이 시작되고 나엘은 전쟁에 참전한다.
총사령관으로서.
그곳에서 신전과 성녀의 지원을 받아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그건 아직 두고 볼 일이었다.
소설 후반부에 나왔었으니까.
완전 멀었잖아.
휴. 그냥 둘 다 같이 손잡고 떠나 버렸으면 싶네. 언제쯤 내 시야를 벗어나 주는 걸까.
요새 내 인생 모토와 삶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자괴감에 서글펐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진짜 이러기 싫은데!
군대에서 화생방 들어가는 심정으로 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