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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34)화 (34/90)

#34화.

멜리슨이 입맛을 다시자 루시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멜리슨 데이먼에 대한 소문은 루시아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저는 슈타디온의 하녀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긴장한 루시아가 최대한 딱딱하게 말했다. 대로변이고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아무리 멜리슨이라고 해도 슈타디온의 이름을 듣고서 루시아를 해하겠는가.

얼른 바라는 걸 들어주고 자리를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깨어진 평화에 젬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멜리슨이 비쳤다.

그 더러운 기운에 젬의 수염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젬이 루시아의 손을 할짝였다.

루시아의 긴장이 젬에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긴. 내가 공작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야. 그런데 그 전에 그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이 근처에 케이크가 맛있는 커피 하우스가 있는 걸 알고 있나?”

멜리슨이 달콤한 미소를 뿌렸다. 그 미소가 썩어 있다는 것을 젬과 루시아가 동시에 알아차렸다.

“시, 싫어요.”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 공작님께서 절 찾으실지 몰라요. 그러니까 저는 공작님께 가 봐야겠어요.”

루시아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등 뒤로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잡힌다, 잡힌다, 잡힌다!’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으어억! 이게 뭐야!”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아가 눈을 슬며시 뜨고 뒤를 힐끗 보았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나무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 멜리슨이 보였다.

놀란 루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멜리슨이 다리를 꼭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거리고 있었다.

“내 다리! 내 다리이! 야, 너 거기서 뭘 보고 있어!!”

멜리슨이 괜한 화풀이를 하며 가문의 시종들을 가리켰다.

“가서 형님이나 아버님을 모셔 와야 할 것 아냐!!”

악을 쓰는 멜리슨을 피해서 루시아가 달아났다.

‘원래 저런 게 있었나?’

하지만, 중요한 건 덕분에 무사히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는 거다. 루시아가 숨을 헐떡이며 슈타디온의 마차 안으로 쏙 숨었다.

루시아는 젬을 쓰다듬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젬. 어휴, 세상이 정말 무서운 것 같아.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되겠어. 오늘 일은 마엘리스 신께서 도우신 게 틀림없어.”

젬이 코를 씰룩거리며 앞발로 얼굴을 문질렀다. 귀를 당겨 세수를 하는 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젬의 붉은 눈동자 속에 빛무리가 일렁거리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아가사가 떠난 공작 가는 조용했다. 무언가 아가사가 떠나고 나니 동물들도 풀기를 잃은 것 같다. 젤리도 내내 같은 자세로 잠만 자고 있었다.

따뜻한 방석 위에 몸을 말고 누운 젤리 옆에 이브라임도 드러누웠다.

이브라임은 귀족이 아니라 바닥에 이렇게 눕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브라임이 한쪽 팔을 베고 누워 다른 한 손으로는 젤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이브라임의 생각을 누군가가 방해했다.

‘아가사 공작…….’

그간 이브라임이 본 아가사는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소탈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악녀라고 해서 솔직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오히려 감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좀 더 솔직할 수도.

“흠.”

청혼서를 들고 온 이들에게 드래곤처럼 불을 뿜으라고 요구할 때도 신선했다.

다짜고짜 이브라임이 머무는 방에 쳐들어왔었지.

‘이브라임, 해 줄 일이 있어요!’

‘해 줄 일?’

처음엔 또 새로운 하천을 흐르게 하려는 줄 알았다.

‘불을 뿜어 줘요! 드래곤처럼, 화르르르륵!’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심부름꾼들을 떼어 달라는 거였다.

‘아휴, 속 시원하다.’

수고했다며 환히 웃던 얼굴이 마음에 밟혔다. 아가사를 보면서 알았다. 돈이 많은 귀족들이라고 해서 항상 행복한 건 아니라는 걸.

아가사는 오히려 귀족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다른 이들의 무시를 받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하고 비슷해.”

이브라임이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다르게, 특별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위험한데. 이브라임이 젤리를 특별하게 여겨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처럼.

아무튼, 그 일로 아가사를 눈여겨보던 차에 그녀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짙은 청색의 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건 또 색달랐다.

귀족의 권위가 도드라지긴 했지만 그 또한 아가사에게는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본디 그런 옷을 입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안 어울려.’

사실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입는 게 더 나아.’

이브라임이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옷보다는 차라리……. 평소에 입었던 대로.

이브라임이 피식 웃었다.

‘잘 어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이브라임이 젤리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굳이 아가사로 머릿속을 채울 이유가…….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브라임이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돌아왔다니!

“냐아아아옹…….”

젤리도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앞발을 낼름낼름 핥는 젤리의 얼굴이 나른했다.

몸을 일으킨 젤리가 기지개를 켰다.

“젤리?”

“니야아아아옹!”

“너도 주인이 돌아온 걸 알았구나.”

이브라임과 젤리가 나란히 방을 나섰다. 꽤나 닮은 모습으로.

“아가사.”

이브라임이 2층 난간에 두 팔을 얹었다. 마침 아가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이브라임. 어쩐 일로 나와 있어?”

“잘 다녀왔어?”

뭐야, 왜 저렇게 친절해?

아가사가 경계의 눈빛을 던졌으나 되려 이브라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치 그래, 젤리처럼.

* * *

“휴, 피곤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그래도 나름 소득은 있었다.

멜버리 하우스를 벗어날 때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어느 정도 바뀐 것이다. 내가 걸치고 다는 것들의 값비쌈과 나엘이 한몫을 했다.

거기에 체이스와의 에피소드까지 있었으니.

“걔는 왜 그렇게 귀찮게 들이대는 거야?”

볼을 부풀렸다. 사실 어차피 이것도 금방 끝날 일이었다. 성녀가 각성만 해 봐.

지금 나한테 추근덕거린 건 잊고 다 루시아한테 갈걸? 그게 원작의 힘이지.

루시아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데.

사실 원작에서 체이스도 루시아에게 추근대다가 패망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이었다.

사일러스 황자가 어리니 체이스를 통해서 성녀를 끌어들이려 한 것인데 나엘이 한발 빨랐지. 아니,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나엘이지 고작 체이스 나부랭이겠느냐고.

하여튼 대단한 자신감.

걔는 자기 객관화를 할 필요가 있어.

“공작님, 목욕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엠마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시아가 반드시 공작님을 뵈어야 한다고 해서요!”

“루시아가?”

“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차에서 돌아오는 내내 뭔가 불편해 보였었다. 겁에 질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불안정해 보여서 얼른 들어가서 쉬라고 했었는데. 괜찮아진 건가?

“공작님.”

“루시아, 무슨 일이지?”

우리 여주인공,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하, 오늘 하루 종일 주인공들을 번갈아 가면서 만나고 있자니 기가 빨리는 것 같다.

이곳에 오고 나서 극한의 내향인이 된 기분이랄까. 특히 주인공들 한정으로.

“오늘, 그곳에서 데이먼 가문의 멜리슨을 만났습니다.”

“멜리슨?”

“아주 탐욕스러운 눈빛이었어요. 그러고는 제게서 공작님을 찾더군요.”

루시아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공작님이 무서워하실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생각해 보니 아셔야 조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멜리슨이 심상치 않아요, 조심하셔야 해요. 혼자 다니시면 안 되고……. 그래요, 제가 지켜 드릴게요! 못해도 저를 대동하세요!”

루시아가 씩씩하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아무리 봐도 솜방망이처럼 보였다. 새하얀 토끼가 귀를 팔랑팔랑 흔드는 것 같다.

“날 지켜 준다고?”

여주인공이 악녀를?

세상 말세네.

“네, 공작님! 미덥지 않으시더라도 저를 믿어 주세요! 열심히 해 볼게요!”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햇살 같음을 보고 있자니 주인공들이 루시아를 왜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정말 귀엽네.

그런데 데이먼의 멜리슨이라……. 멜리슨은 그렇게 대두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며 살다가… 어떻게 됐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데 이렇게 갑툭튀라니.

게다가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드네?

“그러다가 루시아가 다칠 수도 있잖아. 루시아도 조심해야지.”

“저는 괜찮아요. 저는 고작 하녀인걸요. 저 같은 걸 누가 해치겠어요! 하지만, 공작님은 다르시잖아요.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세요.”

휴. 얘 왜 이렇게 착해.

캐릭터성 정확하네. 원작 소설에서도 착하고 햇살 같다고 묘사되지 않았던가.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미워할 수가 없네. 예뻐 보이게.

“그럼 루시아는 내가 지켜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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