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33)화 (33/90)

#33화.

“……없습니다.”

“싫다는 공작을 붙들어 두고 있는 건 자네인 것 같은데.”

나엘이 체이스에게 쏘아붙였다.

“이만 돌아가지.”

“……예, 전하.”

역시 신분 앞에 장사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체이스는 나엘으로부터 위압감을 느꼈으리라.

나와 나엘 둘 다 체이스보다 신분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내 말은 듣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게다가 나엘은 흉통이 두껍고 어깨가 넓은 편이었다. 체이스보다 체급이 월등히 좋았던 것이다.

체이스가 꽁지를 말고 사라지자 나엘이 내 손목을 놓았다.

“경고했었잖아.”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제는 실감이 나나?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건지.”

“……그래도 바라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나엘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엘이 시력이 좋음에도 굳이 안경을 고집하는 것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정말로 맞는지 안경을 벗은 나엘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좀 더……. 나른한 색기가 도는 것 같달까.나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정은 함께하지.”

“…….”

거절할 명분이 없잖아.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 구두. 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들어간 돈이 얼마였더라.

나는 아가사가 절대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

거기에 가장 걸맞은 짝은 아무래도 나엘이겠지.

“……부탁드립니다, 전하.”

쓴웃음을 삼키며 나엘의 팔에 손을 얹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이들 중에 가장 빛나는 남자를 곁에 세웠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역시, 권력자 앞에 약은 없지.

니들 잘 봐.

내가 누구 손을 잡고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고.

‘니 내 누군지 아니?’

이걸 당당하게 외쳐 주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위치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슈타디온이라서, 내가 돈이 많아서, 공작이라서가 아니라. 좀 더 명확한 이유.

‘나’라는 개인에게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 줘야겠다. 그냥 이대로 봉사 활동에 가까운 일만 하면서 지낼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나엘의 영향력에 기댈 게 아니라 혼자 설 수 있도록. 저들이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아가사 유나 슈타디온.

너는 뭘 할 수 있지?

* * *

나엘은 결국 아가사를 곁에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아가사와 팔짱을 낀 채로 넓은 멜버리 하우스를 활보했으니.

이로 인해서 나엘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나엘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침범. 요새 나엘을 움직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조차 모르겠다.

왜 루시아는 그대로 돌려보냈으며, 그녀에 대해서 코델리아에게 전하지 않은 건지. 왜 오늘 일정을 취소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인지.

나엘이 아가사를 힐끗 보았다.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아까 아가사가 체이스에게 붙들려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아가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검? 내가 검을 할 줄 아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

순간 아가사가 고개를 들어 나엘을 보자 나엘이 옅게 웃었다. 아가사의 보랏빛 눈동자가 샹들리에 빛에 반짝였다.

오늘따라 아가사가 유독 눈에 박히도록 반짝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검이라니.”

“제가 뭘로 성공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가사가 뚱하니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나엘은 생각했다.

‘아가사는 겉과 속이 같다.’

나엘에게 집착할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가사는 최소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진 않았으니.

“성공이라. 재산은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

아가사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걸음이 가장 큰 액자 앞에 멈춰 섰다. 유독 아름다운 꽃밭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등나무 아래 비어 있는 벤치, 그리고 그 너머로 비치는 새파란 하늘.

아가사가 나엘을 잡고 반 바퀴 돌았다. 아가사의 뒤로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나엘의 눈엔 아가사가 그 그림 속에 존재하는 요정처럼 보였다. 등나무 꽃잎이 그림 밖으로 빠져나와 아가사의 위로 흩날리는 것 같았다.

아가사가 나엘에게 붙들린 손을 살짝 빼냈다.

“재산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

나엘이 작은 탄성을 터뜨리며 그를 현혹시켰던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재산의 문제가 아니면? 무슨 성공을 하고 싶은 거지?”

아가사가 나엘의 팔등을 툭 하고 쳤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서요. 그게 황태자 전하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아가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거든요.”

“그런데?”

“그래서 검을 쓰는 게 가장 빠른 길인가 했죠.”

“무력으로 상대하겠다?”

“그게 괜찮을 것 같았는데……. 사실 이 몸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진 않고.”

아가사가 제 손목을 조물딱거렸다. 나엘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가사의 말대로 그녀는 검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또 뭘 할 수 있나 생각 중인데…….”

“본디 슈타디온에는 ‘금복’이 흐른다고들 하지.”

“그런데?”

“슈타디온이 손대는 사업은 무엇이든 성공한다는 말이야.”

“사업?”

“사람들이 그대를 무시하는 이유는 지금의 그대가 그저 슈타디온의 부를 누리기만 하지, 다룰 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

“엇……?”

아가사가 눈을 깜빡였다.

나엘에게 정곡으로 핵심이 찔린 기분이었다.

“돈을 쓰기만 하지 새로이 벌질 않고 있잖아.”

나엘은 제법 너그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마도 그림이 부린 마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애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대만의 사업을 찾아봐. 굳이 다른 걸 하려고 하지 말고.”

아가사가 손뼉을 쳤다.

그러다가 이내 묘한 표정으로 나엘을 보았다. 생각보다 나엘은 아가사에 대해서, 그리고 슈타디온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닌 것 같아서요.”

나엘이 피식 웃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과거를 돌이켜 보건대 나엘은…….

“나는 널 싫어한 적이 없어, 아가사.”

“그럼?”

맹목적인 애정이었다. 그게 어떤 형태든 간에 싫을 순 없었다. 아가사가 지긋지긋하고 귀찮았어도 정말로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귀찮았던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달라.”

나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한 너를 완전히 잊어버린 적은 없어.”

나엘과 아가사의 눈이 마주쳤다.

이것 봐라.

아가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나엘의 속내를 엿본 기분이었다.

싫어하진 않았다라. 에이씨. 이런 복잡한 문제는 딱 질색인데.

나엘이 아가사의 어깨를 짚어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만 생각하고 그림이나 봐. 여기는 그림을 보러 온 거 아니었나?”

아가사가 어깨에 힘을 풀었다. 왠지 오늘은 나엘이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얘 요새 왜 이러는 거야……?

어디 알려 주실 원작자 안 계신지……?

* * *

루시아가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시아의 품에는 토끼가 폭 하고 안겨 있었다.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있자. 젬, 오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그런 루시아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젬은 귀만 팔랑거릴 뿐이었다.

루시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다 둘러보고 아가사가 돌아오려면 멀었다.

정원 깊숙한 곳에 들어가는 것은 안 돼도 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다른 수행원들도 저들끼리 뭉쳐 시시덕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루시아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누, 누구세요!”

루시아가 놀라서는 새된 목소리로 외치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안녕.”

“……누구신지 먼저 밝히시는 게 예의 아닐까요?”

루시아가 경계의 눈초리를 던졌다. 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귀족인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다가는 귀찮은 일에 얽히기 쉽지. 루시아가 몸을 움츠린 채로 도망갈 준비를 마쳤다.

“나? 나를 모르다니 섭섭하네. 나는 데이먼 백작 가의 멜리슨. 그러는 그대는?”

멜리슨의 음험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처음에는 아가사의 하녀를 통해 아가사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멜리슨의 매끈한 얼굴과 그간 여자들과 놀아난 화려한 언변이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징검다리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일인가. 황금빛 머리카락에 감싸인 갸름한 얼굴은 독보적이었다.

주인보다 하녀가 더 탐이 날 지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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