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림이야말로 시간 낭비이며 무가치한 일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마음이 바뀌었어.”
“레이디인 양 갈대 같으시군요.”
보좌관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엘을 어찌 꺾겠는가. 그것으로 나엘에게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다.
* * *
그리고 두 사람 더 멜버리의 참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름 아닌 데이먼의 두 아들이었다.
“너도 간다고?”
체이스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이제 다리가 거의 다 아물어 가고 있었다.
느리지만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형을 한심한 눈으로 보던 멜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형이 나 몰래 내 것을 탐내니까 어쩔 수 있나.”
멜리슨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술집 작부들이 판치는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느라 저택에도 잘 돌아오지 않던 멜리슨이 한동안 붙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체이스가 멜리슨의 혼담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차피 네 이름으로 갔으면 문턱도 넘지 못했어!”
“그걸 어떻게 자신해? 형은 가끔 보면 자신한테 너무 관대한 면이 없잖아 있어.”
멜리슨이 빈정거렸다.
“그만큼 잘나지도 않았는데.”
“멜리슨 데이먼!”
“아가사 공작을 직접 만나겠어! 그리고, 데이먼 가의 혼담은 내 이름으로 갔어야 한다고 말할 거야.”
“그런다고 공작이 들어 주기나 하겠어?”
“형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멜리슨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두고 봐. 아가사 공작을 반드시 내 옆에 세우고 말 테니까!”
체이스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이나 내려놓고 말하시지.”
체이스가 받아쳤다.
“너 같은 주정뱅이를 아가사 공작이 거들떠나 보겠어?”
멜리슨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이혼남보다는 나아!”
“결혼은 무효로 돌아갔어! 내 호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체이스. 아가사 공작도 마찬가지지.”
두 형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데이먼 백작이 눈을 돌렸다.
어차피 어떤 결론을 맞이하든 두 놈 중 한 놈이라도 공작의 손을 잡기만 한다면… 성공이다.
* * *
어느새 멜버리 하우스에 가는 날이 되었다. 저택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 있었다.
“흠. 아무래도 루시아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이전에 이루지 못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듣기로는 나엘도 멜버리 하우스의 참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휴, 이 노력을 원작자님이 알아주셔야 할 텐데.
“루시아를요?”
“응. 엠마, 너도 같이 가자.”
“저를요? 세상에, 맙소사……. 공작님,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저희는 그저 하녀일 뿐인걸요.”
앗.
그걸 깜빡했네. 엠마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공작님께 이런 귀여운 면이 있다는 걸 좋은 신사분이 알아봐 주셔야 하는데요.”
머쓱해라…….
“다, 다녀올게…….”
“네. 루시아는 데리고 가셔도 돼요. 가서 옷차림을 다듬어 줄 하녀 한 명쯤은 데려가도 되지 않겠어요?”
“정말?”
“네, 안에는 못 들어가겠지만요! 기억을 잃은 뒤 첫 모임이라 긴장되셔서 그러시는 거 알아요.”
뭐, 그렇게 생각해 줘도 되고. 엠마의 도움으로 루시아도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공작님.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오세요. 엠마의 자존심, 파이팅!”
“화이팅!”
다들 비켜라, 엠마의 자존심 나가신다!
나는 오늘 짙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가벼운 색보다는 짙은 색상의 드레스가 좀 더 진중해 보일 거라는 엠마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보이지 않도록 얇은 은사로 수를 놓았다. 과하지 않은 적당함으로.
거기에 최상급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다.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만.
후우. 이런 드레스를 입어 보는 것도 처음이네.
1층으로 내려가다가 이브라임을 마주쳤다. 난간에 기대서 있던 이브라임이 내게 고개를 까딱했다.
“어디 가나 봐?”
존댓말 했다, 반말했다 지 멋대로야.
“……멜버리 하우스에 갈 일이 있어서. 마법사는 오늘 할 일이 없나 보지?”
“내 고용주가 외출할 예정이시라.”
이브라임이 묶지 않고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그의 주변으로 흘러내렸다.
아휴. 정말 생긴 건 내 취향인데.
“……그 옷보다는 평소에 입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었는데.”
저 자식이. 이브라임하고는 아쉽게도 길게 말을 섞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브라임을 외면하고 마차에 탔다. 하여튼, 이상한 애가 들어와서…….
내 건너편에 앉은 루시아는 긴장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 가는 건 루시아도 처음인 것이다.
“휴우. 저는 들어갈 일도 없는데 이렇게 긴장되네요.”
“……곧 괜찮아질 거야.”
루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암시를 걸었다. 나는 아가사다, 나는 공작이다, 나는… 천하무적이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응!”
멜버리 하우스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내게로 시선을 모았다. 자, 고개를 치켜들고 자세는 꼿꼿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가씨.”
루시아의 배웅을 받으며 완전히 사교계로 들어섰다.
“아가사 공작이에요……!”
누군가가 탄성으로 나의 등장을 알렸다. 우아한 걸음으로 멜버리 하우스에 입장했다.
새롭게 꾸민 전시관이 아늑한 분위기를 뽐냈다. 사실 그림 보는 눈은 조금도 없는데.
엠마 말이, 이럴 때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했다.
그림에 대해 대단히 아는 척하면서 한 그림 앞에서 5분 이상 머무르라고.
좋아, 할 수 있어.
그림 보는 척하면 말 거는 이들도 별로 없겠지.
완전 미술관 온 기분이네. 여유롭게 전시관을 돌아다녔다.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엠마, 최고. 너의 선택은 완전 옳았어.
그러나, 그 평화도 깨어졌다.
참지 못한 이들이 내게 말을 건넨 것이다.
“아가사 공작님.”
하아. 정말 귀찮게 하는구만.
고개를 돌리니 체이스가 보였다. 다리가 멀쩡해지셨나 보지.
“……체이스 소백작.”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군요. 이 기회를 틈타 이전에 다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나눌 대화가 없네.”
체이스를 딱 잘라 냈다.
이 거머리 피해서 얼른 도망쳐야지. 하지만, 거머리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체이스가 나를 졸졸 쫓아오며 수작질을 부린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리고 저 그림은…….”
무슨 말인지 귀에도 안 들어온다. 아놔. 그러다가 체이스가 본색을 드러냈다.
“공작님. 그렇게 피하시는 것보다는 상황을 마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체이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공작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공작님께 청혼하는 이들 중에 제가 가장 낫다는 걸 언젠가는 아시게 되겠지요.”
대단한 자신감이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게 이곳의 시대상이라는 건 아는데…….
니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체이스가 뭐라고 떠들던 더 이상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체이스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황태자의 손을 잡으시렵니까?”
아니. 니가 무슨 상관이냐니까.
체이스가 나를 따라잡았다. 내 손목을 붙든 체이스가 내 앞에 섰다.
체이스의 눈동자에는 욕심과 분노가 끓고 있었다. 내가 체이스를 무시했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이겠지.
체이스가 거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가진 것 없는 황태자를요? 황태자의 모친은 한미한 가문 출신입니다. 황태자가 정말로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 손 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엘이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황태자 전하.”
체이스가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엘이 우아한 손짓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것을 대충 장식품 위에 던져두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엘의 날카로운 적안이 낱낱이 드러났다. 나엘은 체이스를 노리는 야생동물 같았다.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나엘이 체이스의 손목을 쥐었다.
“윽.”
나를 놓친 체이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나엘이 체이스의 손을 오물처럼 내던졌다.
나엘이 나를 제 뒤로 세웠다.
“못 알아듣는 건가?”
“나, 남녀 간에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전하. 끼어드실 일이…….”
“정말로 그래, 아가사? 영식과 나눌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나엘이 조금은 다정하게 물었다. 이상했다. 왜 나엘이 나를 감싸 주는 건지, 나를 걱정하는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