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31)화 (31/90)

#31화.

아가사는 무엇을 하든 사람들의 관심을 몰고 다녔다. 그게 악의든, 호의든 간에.

이 자리에 앉아서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가사는 어떤 의미로는 ‘사랑’받고 있었다.

“흐음…….”

여자가 커피를 느리게 마셨다. 눅진하게 녹아드는 짙은 커피 향이 여자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자의 귀는 귀부인들을 향해서 활짝 열려 있었다.

“어머, 어머! 지금 슈타디온 공작이 베클린 의상실에 들어가는 거 봤어요?”

“봤어요! 사교 모임에 참석하려나……. 큼, 내가 이번에 초대장을 보내긴 했거든요. 우리 남편 생일이라.”

“크흐으음, 그쪽보단 내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 고모할머니 생신이라 초대장을 보냈거든요. 우리 고모할머니가 황족이신 건 알죠?”

“크흠.”

귀부인들이 서로를 견제했다.

아가사는 의상실에 들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교계의 여성들을 긴장하게 한다.

“어떤 옷을 샀을까요?”

“조금 있다가 베클린 의상실에 가는 건 어때요? 내가 수선 맡겨 둔 게 있는데…….”

“좋은 생각이에요. 큼, 어떤 옷을 샀는지 알아야…….”

알게 모르게 아가사가 입는 옷, 신는 구두, 걸치는 장신구와 같은 모든 것들이 인기몰이를 하곤 했다.

아가사는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저 유명세를 이용만 한다면…….’

여자가 부지런히 커피를 마시면서도 생각을 이어 나갔다.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어.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공작을 끌어들이냐인데…….’

이건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여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 커피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부인.”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그럼 가지.”

여자의 감색 드레스가 살랑 움직였다. 살짝 드러난 여자의 목덜미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여자는 뼈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고 낯빛이 푸르스름했다.

햇빛 앞에 나서니 그것이 더 티 날 정도였다.

양산을 펼쳐 얼굴을 가린 여자가 기사를 쫓아 재게 걸음을 놀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부인의 안위를 항상 걱정하고 계십니다. 콘트윌로 내려가지 않으신 걸 아신다면…….”

“자네가 알리지 않으면 될 일이지. 루시아가 사라지지 않았나. 그 애를 찾을 때까지는 나는 어디도 갈 수 없네.”

루시아가 황궁에서 쫓겨난 뒤에도 수도에 있다면, 코델리아는 그녀를 데리고 콘트윌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루시아를 찾을 수 없었고, 여자의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다.

결국 여자는 루시아를 찾기 위해 제도에서 살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평생을 황성에서 지내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황비는 오래전 서거했고 장성한 황태자의 유모가 공식 석상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잖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위험하다 싶으면 자네에게 말하겠네.”

기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부인.”

“쉿.”

여자가 마른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댔다.

“메리, 또리! 얌전히 굴기로 했잖아. 자꾸 이러면 곤란해. 드레스를 못 쓰게 만들면 되겠어?”

“깡!”

“끼잉.”

“잘못한 게 없기는. 이럴 거면 집으로 돌아간다?!”

“깡! 깡! 까앙!”

“끼이이잉…….”

“약속한 거야.”

강아지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던 아가사가 그들을 안아 드는 것이 보인다.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 귀여워라…….”

“아가사 공작이 신수들에게 공을 들인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엄마, 나도 강아지 키울래!”

“쉿. 엄마는 너 하나로도 힘들어.”

“그러면 인형이라도 사 줘, 응?”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들이 여자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인형이라……. 인형.’

여자의 눈이 번뜩였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가사의 유명세와 신수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아가사를 설득할 방법만 생각하면 된다. 여자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 * *

쇼핑은 성공적이었다.

엠마의 자존심은 상승했고 나는 돈 쓰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니, 분명 지금도 모자람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눈이 호화로울 정도로 반짝이는 것들을 보고 오니 마음도 훈훈해졌다.

새로 구매한 드레스들과 장신구, 구두들이 드레스룸에 진열되었다.

“이렇게 된 거 참석할 만한 사교 모임이 있는지 한번 찾아볼까?”

“정말요?”

엠마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좋아요, 공작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앞으로 온 초대장을 전부 엠마에게 미뤄 주었다.

“티 파티 같은 소규모 모임보다는 큰 모임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공작님이 그간 칩거하셨잖아요? 임팩트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엠마가 잘 골라 줘.”

사실 이런 일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다 모르는 사람인데, 뭐. 나는 파워 I였다.

거기 가는 것보다 메리하고 노는 게 더 좋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실타래를 물고 구르는 메리를 보고 있었다.

“껑!”

고개를 번쩍 든 메리가 나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뛰어왔다. 실타래가 죄다 풀어진 채로 메리에게 엉켜 있었다.

“바보.”

키득거리며 메리에게서 실타래를 거둬 냈다. 내가 그것을 돌돌 말고 있으니 실타래를 쫓아 메리가 깡충깡충 뛰었다.

“토끼야? 왜 이렇게 뛰어다녀. 메리는 실이 좋아?”

메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메리는 뭐가 제일 좋아?”

반대쪽으로 갸웃.

“까까?”

메리가 바로 벌떡 일어나서 꼬리 풍차를 돌렸다. 역시, 의사 표현이 확실할 나이지.

고구마말랭이를 꺼내 줬더니 실타래 위에 뭉개고 앉아서는 먹기 시작했다.

귀여운 똥강아지 같으니.

메리와 함께하는 매 순간은 즐거웠고 행복했다.

넋 놓고 강아지멍을 때리고 있는데 엠마가 나를 일깨웠다.

“공작님, 골랐어요!”

“뭐, 뭐?”

“사교 모임이요! 어딜 참석하셔야 하는지 골랐어요!”

“내가 어딜 가야 하는데?”

엠마가 당당하게 초대장 하나를 척 하고 내려놓았다. 아이보리색의 초대장에는 짙푸른 잉크로 <멜버리 하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 멜버리 하우스에서 새로운 전시관을 개관한대요.”

엠마가 들뜬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멜버리 하우스?”

“네, 멜버리 백작 가가 원래 예술에 조예가 깊잖아요.”

“왜 하필 미술이야?”

“혼자 가셔도 되니까요.”

엠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교 모임은 에스코트해 줄 남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슈타디온에는 그렇게 해 줄 분이 안 계시니 다른 곳에서 신사분을 구하셔야 하는데…….”

엠마가 고개를 저었다. 주근깨가 박힌 뺨이 씰룩거렸다.

“공작님께서는 혼자 가시는 게 좋아요.”

엠마의 위로 으르렁거리는 케르베로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을 둔 오빠 같은 얼굴이랄까. 뭐라고 해야 하지.

아주, 든든해.

“이상한 남자들이 자꾸 꼬이시잖아요. 제가……. 혹시, 주제넘었을까요?”

“아니, 내 걱정해 주는 거는 엠마뿐이잖아. 엠마 말이 맞아. 오랜만에 사교모임에 가 보겠네.”

엠마가 활짝 웃었다.

내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이렇게 귀엽고 든든한 하녀가 있으니 이번 생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가사의 외출 소식은 나엘에게도 전해졌다. 원하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가사의 일거수일투족은 반나절 만에 사교계에 퍼지곤 했으니.

아가사가 멜버리에서 온 초대장에만 답변을 했다는 소식이 황태자 궁을 넘었다.

나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나엘은 멜버리에 방문할 예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상하게 그림이나 보는 취미는 없었던 것이다.

나엘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하고 쳤다.

“멜버리라.”

초대장은 나엘도 받았다.

멜버리의 모임은 3일 뒤에 예정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청혼서를 잔뜩 받았었다는 이야기와 아가사가 기상천외하게 그들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가사를 고소하지 않았다. 아가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을 테지.

결국, 나엘의 예언대로 된 셈이다. 체이스는 끊임없이 아가사에게 추근덕대고 있었으며 이제는 다른 남자들도 뛰어들었다. 혹은 그 남자들의 어머니들이 말이다.

아가사가 새로운 대답을 들려줄 준비가 됐을까?

나엘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안경에 가려진 날카로운 눈매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하하…….”

왠지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가사는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나엘에게 손을 뻗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가사가 먼저 나엘을 찾아와 계약 약혼에 대해서 언급할 확률은 제로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엘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나엘의 부름에 들어온 보좌관에게 명을 내렸다.

“3일 뒤의 일정을 비우게. 나는 멜버리 하우스에 갈 일이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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