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절대로 그러실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다비드가 손을 내저었다.
“신전에 대해 무엇을 알아봐 드리면 될까요?”
내가 알기로 현 신전에는 정말로 성력을 쓸 수 있는 신관은 아무도 없었다.
원작에서 신관은 고수익 직종 중 하나였다. 덕분에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청탁을 넣는 귀족들과 상인 계급의 자제들이 파다했다.
지금의 신전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귀족 가의 자제, 혹은 돈 많은 상인의 자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곳으로 변했다 보니 루시아가 처음 들어갔을 때 따돌림을 당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심지어 수습 신관이 아닌 일반 신관들도 루시아를 무시했었다. 그 따돌림은 대신관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신관들을 통솔하는 그마저도 루시아를 따돌렸다.
덕분에 루시아는 꽤 힘든 수습 기간을 보내게 된다.
신전은 지금의 황후와 결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루시아가 나엘의 편에 서고 난 뒤에는 괴롭힘이 두드러지게 심해졌었다.
결국 그것을 계기로 루시아는 신전을 떠나오게 된다. 루시아의 성력을 통해 세를 불렸었던 주제들이 루시아에게 너무했던 거지.
아무래도 이것저것 변한 게 많다 보니 불안했다.
루시아가 그곳에서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신전의 재정 상태에 대해서 알아봐 줘.”
“재정이라면…….”
“큰돈이 필요할 일이 있다거나, 돈을 받을 의사가 있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워낙 신실해야지.”
“……?”
다비드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루시아를 후원하는 형태로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성력을 각성한 성녀가 신전을 거치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에 돈을 잔뜩 짊어지고 간다면?
그들은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루시아를 괴롭히는 일을 지양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건 그거였다.
“마엘리스 신께 기도를 올릴까 하고.”
아직 각성한 것은 아니기에 많은 걸 말할 수는 없었다. 다비드가 충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이 정도면 루시아의 호감을 잔뜩 살 수 있을 것이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들 하지만.
이건 루시아가 반드시 알아야 했다. 각성하고 나면 생색 잔뜩 내야지.
그게 목적인데, 암!
* * *
루시아는 씩씩하게 그녀에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갔다. 바라던 대로 슈타디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루시아는 그녀의 특기를 십분 살려서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자연이 더 친밀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생각이 많아질 때면 나엘이 떠오르곤 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루시아는 열심히 일했다. 그런 루시아의 옆을 젬이 맴돌았다.
붉은색 리본을 나폴거리며 루시아의 주변을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마음에 들면 씹어 보기도 하고 루시아의 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도 했다.
작고 앙증맞은 젬의 꼬리가 루시아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으, 젬. 너는 정말 귀엽고 완벽해.”
젬이 고개를 갸웃했다.
루시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비질을 이어 나갔다.
“젬, 내 이야기 들어 볼래?”
젬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앞발로 얼굴을 긁적였다. 마치 세수를 하듯이.
루시아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젬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젬, 내가 얼마 전에 황태자 궁엘 다녀왔거든. 황태자 전하 알아?”
젬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왠지 젬이 루시아의 말을 전부 알아듣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분을 보는데 여기가 막……!”
루시아가 심장을 가리켰다. 젬이 콧잔등을 씰룩거렸다.
“……예전엔 그런 적이 없었거든. 황태자 전하를 하루 이틀 봤던 것도 아니고.”
젬이 콧잔등을 좀 더 씰룩거렸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듯이.
“황태자 전하는 절대로 사용인들에게 여지를 주실 분이 아니시거든. 정말로 아니시거든? 나도 그런 꿈을 꿔 본 적 없었고. 근데 그날은 조금 달랐어.”
젬이 루시아에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곤 앞발로 루시아의 옷을 파바바박 파헤쳤다.
“이상하지?”
루시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였다.
“제에에에에에엠!!”
사육사가 눈물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사육사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루시아가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토, 토끼가… 원래, 신수가 아닌 토끼가 잡식성인 건 알고 있나요?”
“그… 렇군요.”
“그나마 젬은 아무거나 먹진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사육사의 손에는 치렁치렁한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어…….”
“흑흑, 장신구가 남아나질 않아요.”
루시아가 어색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는 목재로 된 구슬을 다 씹어 놓았더라구요. 그, 그래서 비싼 돈 주고 마련했는데……. 토끼 이빨이 금속은 못 끊을 거라고 그랬다구요!”
사육사가 쭈그리고 앉아서 눈물을 터뜨렸다. 루시아가 자신의 심란함은 접어 두고 사육사의 등을 토닥였다.
“제, 젬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거짓말……. 저 순진한 척하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어요! 알고서 저지른 일이라고!”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젬이 루시아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루시아에게 몸을 딱 붙였다.
“젬이도 반성을 하고 있…….”
“아니에요! 나, 나는 그만둘래요. 더 이상 못 하겠어!”
“사육사님?”
루시아가 다급하게 사육사의 치마를 붙들었다. 사육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는 우리 언니 일자리를 빼앗은 것뿐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사육사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몸을 홱 하고 돌렸다. 젬이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가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루시아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다.
의도치 않게.
* * *
아가사는 사교계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사교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커피 하우스에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반드시 아가사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렸다.
“아가사 공작이 요새 정말로 얌전하긴 하죠?”
“그러게요. 공녀 시절의 버릇을 싹 버렸나.”
“아버지의 죽음이 트리거가 되었을 수 있지.”
“큼. 듣기론…….”
귀부인들이 목소리를 죽였다.
“체이스 데이먼이 눈독을 들인다고 하더군요.”
“아, 사기 결혼을 당했다고는 들었어요. 결국, 결혼이 무효로 돌아갔다는…….”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결혼을 했었던 건 사실이죠. 다들 아는 이야길…….”
“슈타디온의 값이 그만큼이나 떨어졌다는 것일 수도 있지요.”
“흐음.”
귀부인들의 부채질이 빨라졌다. 짙은 분내가 퍼져 나갔다. 커피 하우스 특유의 고소한 커피 볶는 냄새 사이로 귀부인들의 향기가 퍼졌다.
그건 소문이 퍼지는 속도만큼이나 빨랐다.
“그 정도면… 우리 조카가 청혼을 넣어 봐도 되겠는데요.”
“그러게요. 아니 우리 아들이 뭐가 모자라서. 한번 청혼서를 보내 봐야겠어요.”
“슈타디온의 황금이야 다들 아는 바가 아닙니까. 그 정도면 아가사 공작의 흠결 정도야…….”
“흠결? 아가사 공작에게 흠결이 있긴 했나요?”
모두가 눈을 마주쳤다.
귀부인들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사가 예전 황태자에게 집착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젊을 때의 치기로 치부할 수 있었다.
“요새는 슈타디온의 명성이 그토록 높다지요? 유기된 신수들이 길을 더럽혔었는데 슈타디온 덕분에 거리도 깨끗해졌다고 하고.”
“신수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던 제국민들도 안정을 되찾았어요. 왜, 민가를 습격해서 먹을 걸 훔쳐 갔었잖아요.”
“여러 가지로 슈타디온이 자정 작용을 했죠. 그 정도면 우리 가문에 먹칠할 정도는 아니니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귀부인들이 부채 너머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야겠어요. 약속이 생각났네요!”
“오늘 손님이 오신댔는데!”
“만찬이 있어서요!”
귀부인들이 없던 스케줄을 만들어 내곤 몸을 홱 하고 돌렸다. 그러곤 한시바삐 떠났다.
틀어진 운명은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 * *
“젬이 사육사가 그만뒀다고?”
“네, 공작님. 그래서 지금 젬이를 돌보는 자리가 공석이온데…….”
“루시아가 잠시 그 자리를 맡아 주면 되겠네.”
둘이서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 루시아도 일이라도 하면서 지내면 좋지.
모든 상황이 한 가지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시아는 빼박으로 너네 집에서 지낼 거야……! 아하하하학!’
그래, 될 대로 되라니까?
책상 위에 늘어져 누웠다.
“네, 공작님. 좋은 생각이신 것 같아요.”
엠마가 생긋 웃었다.
“요새 마법사는 뭘 하면서 지내고 있어?”
“그게…….”
그래, 젤리나 쫓아다니고 있겠지. 진정한 휴가를 왔구나, 이브라임은.
그럼 내 파라다이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동물 센터는 연일 성황이었다.
버림받은 신수들이 늘다 못해 더 이상 그들을 책임질 생각이 없는 주인들이 자진해서 신수들을 데려다 놓기도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늘어나는 신수들에 대해서 불만이 많던 사용인들도 점차 적응하고 있었다. 돈의 힘과 더불어 신수들 본연의 사랑스러움이 도움이 된 것이다.
그래, 모든 게 자리 잡아 가고 있는데. 내 인생만 꼬이고 있었다. 누가 그랬냐.
“하아.”
“공작님, 수심이 깊어 보이세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고개를 저었다.
“으아아아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도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 니들이 뭘 알겠느냐고.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해일이 나를 향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