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28)화 (28/90)

#28화.

“물 한 잔이라도 좋습니다.”

체이스가 말도 안 되는 대답과 함께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았다. 제멋대로 구는 손님을, 그것도 귀족을 끌어낼 수 있는 사용인은 없으니까.

대체 어떤 자신감일까.

들어나 보자.

팔짱을 끼고 체이스의 건너편에 앉았다. 굳이 불편한 심기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공작님, 전에 아버님께서 편지를 보내신 일이 있는 걸로 압니다.”

“아. 기억하고 있네. 데이먼 백작의 의견은 적용하였네만. 더 이상 저택 밖으로 어떤 소음도 빠져나가질 않아.”

“아버님께서 예민하게 구신 것 같아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흠.”

체이스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담을 두고 이웃하여 지낸 세월이 얼마입니까. 고작 그런 일을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지요.”

“흐으음…….”

“사실… 아버님께서 요새 고민이 많으셔서 그러신 듯합니다. 가문에 안 좋은 일이 있다 보니.”

“…….”

“제가 사기 결혼을 당했습니다, 공작님.”

체이스 데이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족속이었다. 체이스는 원작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혼인 무효 소송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이후에 다른 부유한 상인 가문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타깃을 나로 정한 건가? 왜? 흐름에서 너무 벗어난 전개 아닌가.

“처가의 빚을 갚다가 저희 가문이 파산 직전까지 갔었지요. 다행히 결혼은 무효로 돌아갔으나 가족들의 상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죄송합니다.”

체이스가 한껏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속에 든 능구렁이가 보이니 안타깝기는커녕…….

“그랬군. 자네 사정은 알았네. 그럼 이만 돌아가게.”

“제가 그래서… 네?”

체이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웃이기는 하나 이렇게 방문한 것도 무례한 일이지. 나도 일정이 있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말했네.”

“저, 공작님……?”

더 이상 체이스를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다. 체이스가 나를 붙잡는 걸 무시하고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이사를 가야 하나. 여기 터가 너무 안 좋아…….

* * *

체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사교 클럽에 발을 디뎠다. 체이스와 그의 친구들이 주도하는 사교 클럽이었다.

클럽 안에 있던 한량들이 체이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체이스의 배경과 외모에 홀린 영애들 또한 몰려들었다.

“어머, 체이스. 다리가 왜 그래요?”

“……마차 사고를 당해서.”

“세상에, 그 소문이 진짜였군요. 이제는 괜찮은가요?”

“아니.”

체이스가 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후우, 요새 정말 되는 일이 없군.”

“언젠가 먹구름도 물러가기 마련이죠. 항상 나쁠 수는 없어요.”

영애들이 너도나도 동조하며 체이스에게 위로를 건넸다. 개중 몇몇은 체이스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졌다.

“위로하는 의미로 제가 차를 한 잔…….”

“저는 식사를 한 끼…….”

“산책을…….”

체이스가 눈을 번뜩였다.

‘이것 봐. 내 작전이 안 먹힐 리가 없는데.’

이상한 건 아가사다. 체이스를 문전박대 하지 않았던가.

‘콧대는 높다는 건가. 슈타디온 공작이라고?’

체이스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다리를 다친 이후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목발은 멋이 살질 않는다.

‘꼴에, 여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 보지 못한 주제에. 아니, 왜 그랬는지 알 만하군.’

체이스가 이를 악물었다.

과거의 악명에, 아가사의 성질머리라니. 어쩔 수 없지.

체이스는 슈타디온을 가지고 싶었다. 정말로. 아가사가 탐이 나는 게 아니라 그 황금이 탐이 났다.

‘누구에게도 넘겨줄 순 없지. 그건 내 거야.’

체이스는 한 번 가지고자 한 것을 놓친 적이 없었다.

조사를 해 보았는데 아가사 주변엔 다비드라는 보좌관 외에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분도 낮은 보좌관과 아가사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해.’

체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사실 아가사를 억지로 가질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체이스가 사교 클럽의 한량들과 어울리다가 자리를 뜬 것은 새벽 5시경의 일이었다.

딱 황성의 이른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 * *

황후의 티타임에 체이스가 난입했다.

잔뜩 구겨진 셔츠와 흐트러진 차림새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황후가 미소를 지운 채로 말했다.

“그 꼴로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예요, 체이스 데이먼.”

“황후마마, 아니 누님,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체이스가 가타부타 하지 않고 로살린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로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인가요?”

“아가사 슈타디온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있으십니까?”

로살린 황후가 눈을 깜빡였다.

물론, 아가사 슈타디온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슈타디온 공작이자 슈레이른 영지의 주인이고, 수많은 광산과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매우 탐나는 황금 사과였다.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누님을 걱정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데이먼 백작 가가 누님께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하시지요.”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길까.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먼 백작 가가 세를 불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 교두보로 슈타디온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슈타디온?”

“네, 누님. 분명 슈타디온의 막대한 부는 누님께서도 욕심내실 만한 것입니다.”

“그게 체이스의 이혼과 관련이 있습니까?”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황후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체이스의 이혼은 사교 사회에 큰 돌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혼도 드문데 결혼 무효라니. 그런데 그것과 슈타디온의 관계성이라니?

“공작과 사랑이라도 나누고 있다는 말인가요?”

로살린이 불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슈타디온의 공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 열병이 쉬이 나았을 리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되기를 소망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님께서도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슈타디온이 맺어진다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체이스가 말하는 의도를 파악한 로살린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는 정말로 나를 닮았습니다. 실상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건 내 아드님이 아니라 그대가 아닙니까?”

“그거야…….”

체이스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쳤다.

“그런데 그런 일로 나를 찾아왔을 땐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맞습니다, 누님. 공작의 콧대가 도도해서 저를 돌아보지도 않더군요. 누님께서 이 일에 힘을 보태 주신다면 데이먼과 사일러스 황자 전하의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로살린이 주판알을 튕겼다.

체이스의 말대로다. 그 황금 사과를 데이먼이 쥘 수만 있다면 사일러스의 복이다.

그 황금 동산이 사일러스의 기반이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아가사 공작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새 봉사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버려지는 신수들을 거둬다가 키운다고? 민중들의 정서뿐만 아니라 신전조차 아가사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저를 도와주세요, 누님.”

로살린이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군침이 돌았다.

“……이런 일일수록 신중해야 합니다, 체이스. 내가 연락을 할 때까지 자중하고 기다리도록 해요.”

“누님 말씀은…….”

“황제 폐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나요?”

미소를 띤 로살린의 눈과 체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떨어졌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만 믿겠습니다.”

* * *

코델리아를 포기했으니 결국 루시아를 돌보고 그녀를 신전으로 보내는 건 내 몫이 되었다.

그래, 여자 주인공한테 호감 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 길로 다비드 경을 불러들였다. 다비드가 이번에도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입주 마법사는 어떻습니까? 일을 잘합니까?”

“……일은 아주 잘하는 편이지.”

“다행입니다, 공작님. 더 이상 마탑에 연락을 할 일은 없겠군요. 바라시던 대로!”

“그러게.”

한숨을 삼켰다.

연락할 일은 없는데 피하고 싶었던 재앙덩어리가 굴러 들어와서. 지금 젤리 옆에 배를 까고 있는 이브라임이 그 주인공이었다. 어휴.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비드를 불러들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혹시 신전에 대해서 알아봐 줄 수 있어?”

다비드가 눈을 깜빡였다. 사실 이런 대사는 음모를 꾸미기 딱 좋은 느낌이긴 하지.

“큼. 나쁜 의도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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