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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26)화 (26/90)

#26화.

“거절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저승사자가 ‘안녕하세요, 이제 저승 가실 시간입니다. 제 손을 잡으세요.’ 하는 소리야.

“아하.”

나엘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직 여유로우시군.”

“제 앞가림은 잘해 보겠습니다. 염려해 주신 것은 감사드리오며, 여기에 얼른 서명을…….”

시간 끌기고 뭐고.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나엘이 미친 게 분명했다. 나한테, 그니까 아가사한테 계약 약혼을?

이 무슨 클리셰야.

야가 너가 되고, 너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는 거 아니냐고!

나엘이 비뚜름히 웃으며 가볍게 서명했다. 계약서를 착착 챙기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소태양의 앞날이 평안하시기를!”

쟤가 대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기는 위험해 보였다.

“메리, 가자!”

“끼이잉…….”

불쌍한 표정으로 바닥을 박박 긁는 메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다시는 이쪽 방향을 향해서는 쉬야도 해선 안 돼, 메리.

안녕! 나는 이만 떠나 볼게!

* * *

홀로 남은 나엘이 손으로 입매를 쓸어내렸다. 아가사가 거절할 건 알고 있었지만.

“후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아주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아가사와 계약 약혼이라니. 아가사가 변한 이유를 옆에 두고 살펴보겠다는 심산이었나.

스스로의 심리를 짚어 보며 나엘이 피식 웃었다.

“꽁지에 불붙은 새 같군.”

포르르 날아 가 버리는 모습이.

나엘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나엘은 지금 ‘루시아’라는 하녀를 찾는 데 집중해야 했다.

사람을 풀었으나 그 누구도 목격한 자가 없었다. 그 시간대에 지나다닐 사람은 마구간 지기, 정원사를 비롯한 이들뿐인데.

그들 전부 루시아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혹은 정말로 사라져 버렸거나.

코델리아는 루시아를 황후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뭘 남기신 거지.’

분명 코델리아도 숨기고 있는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코델리아나 어머니가 나엘에게 해가 될 일을 벌일 리 없으니 루시아와의 약혼을 고려해야 하는데.

‘아가사와의 계약 약혼이라.’

계약이라고는 하나 그게 어떤 결과를 파생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 제의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아가사를 그 굴레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가득했다.

그런 나엘의 상념을 히샤가 방해했다.

[네가 공작을 괴롭혔지!]

“뭐?”

[메리가 금방 가 버렸잖아! 정말 그 성질머리하고는. 그래서 누가 데리고 가겠어! 결혼은 이번 생에 글렀네, 글렀어.]

“닥쳐.”

제발 이 신수가 입을 다물어 줬으면. 나엘이 이를 아득 갈았다.

* * *

루시아가 잰걸음으로 마구간을 찾았다. 그간 루시아에게 호의적이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코델리아 백작 부인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다들 모르는 척 입을 다문 것이다.

사실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고 쫓겨난 데다가, 황후가 연관되어 있으니 얽히고 싶지 않은 거다. 그나마 루시아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줬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저씨만큼은……!’

깊은 친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루시아를 보는 눈빛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거기에 기대 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가 마구간 지기를 찾았다. 황태자궁인 데다가, 나엘 황태자가 검을 잡는 기사인 만큼 마구간은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마구간 지기도 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루시아가 찾는 이를 발견한 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의 일이었다.

“아저씨……!”

루시아를 본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행히 멀쩡하였구만!”

슈타디온이 루시아를 받아들이는 것만 확인하고 자신은 그 길로 돌아서 나왔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멀쩡한 루시아를 보니 잘하였지 싶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이를 살렸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오게, 이쪽으로.”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태자조차도 루시아를 찾는 눈치였다.

“황태자 전하가 자네를 찾고 있어. 어떤 일에 연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아가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다들 입을 조심하고 있는 추세야. 잘못했다간 코델리아 시녀장님 꼴이 난다고들 하더군.”

“저, 저는 코델리아 시녀장님을 찾으러 왔어요!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나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밖으로 보내 드린 건 알고 있지. 지금 황성 내에는 안 계셔.”

“어…….”

루시아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어떤 것도 건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슈타디온 공작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었다. 아가사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루시아 스스로가 염치없게 굴 수 없었다.

“그럼… 코델리아 시녀장님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새하얗게 질린 루시아를 마구간지기가 안쓰럽게 응시했다.

“내가 정말로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 지금 같은 세상에 남을 함부로 믿고 그러나.”

그만큼 기댈 사람도 없다는 거겠지. 저렇게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면.

“답은 황태자 전하만이 알고 계실 걸세.”

루시아가 처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만약, 연락처를 알게 되신다면 슈타디온 공작 가로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마구간 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렇게 돌아서서 심호흡을 했다.

‘황태자 전하만이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건가? 아까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야 했던 거다.

루시아가 이를 악물고는 달렸다. 황태자가 있던 정원의 위치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루시아의 볼이 햇빛에 붉게 상기되었다.

황태자는 나쁜 주인이 아니었다. 공명정대하고 아랫사람들의 불편을 살펴 주는 사람이다.

분명 루시아의 이야기도 들어 줄 것이다. 루시아의 마음에 작은 희망이 불꽃을 틔웠다.

정원에 도착한 루시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도홧빛으로 물든 뺨이 싱그럽게 반짝였다.

“황태자… 전하.”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나엘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한 프레임 속에 담긴 화보 같았다.

그 순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저 먼 우주에서 운명의 여신이 실을 잡아당겼다.

[옳지.]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바람이 싸르르 불었다.

나엘의 은빛 머리카락이 휘어 감기듯 바람결에 춤을 추었다.

안경 너머의 선명한 적안이 나른한 빛을 띠었다. 나엘의 발밑 아래에 웅크리고 잠든 작은 강아지까지.

완벽한 평화였다.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엘은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게 무엇인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루시아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루시아가 뒷걸음쳤다. 나엘과 눈이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다.

“……누구지.”

루시아는 나엘을 아는데, 나엘은 루시아가 누군지 모른다.

루시아의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루시아, 루시아입니다.”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시아가 자세를 똑바로 했다. 아까 이 자리에 서 있었던 아가사처럼.

“루시아……?”

나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사가 데리고 온 하녀, 맞나?”

“네, 황태자 전하.”

루시아가 모든 감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나엘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루시아라면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말했었던, 성 레시카의 후손이었다.

이번 대 성녀 후보라던.

나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와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그를 위해 안배한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엘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계약 약혼을 제안하지.’

스스로 내뱉었던 그 제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다.

아가사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달아나 버렸지만, 머지않아 아가사 또한 그 운명에 수긍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언제부터인가 나엘의 눈에 밟히는 단 한 사람.

“……무슨 일이지? 네 주인을 찾고 있나?”

“아, 아닙니다.”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의 아름다운 금발이 찰랑였다. 누구라도 홀릴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그 순간 나엘은 아가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높게 묶고 있던 아가사를 말이다. 루시아하고는 완전히 다른 그녀가, 머릿속을 차지하고 나가질 않는다.

나엘은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면 네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차가운 축객령을 내렸다.

“잠깐만요!”

루시아가 절실하게 붙들지 않았더라면 나엘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떠났을 것이다.

“잠시만요, 황태자 전하. 혹,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어디에 계신지 아시나요?”

루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

“예, 그분이 계신 곳을 아신다면 말씀 주실 수 있을까요? 제 은인이십니다.”

루시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항상 사용인들에게는 다정하고 평등했던 나엘이 아니다. 루시아를 보는 눈동자는 무감했다.

잠시간 나엘에게 설레었던 심장이 놀라 멎을 만큼.

루시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발……!’

나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에게 루시아가 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코델리아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분명 나엘에게 루시아와의 약혼을 밀어붙일 것이다.

피하고 싶었다.

지금 코델리아는 나엘이 소유한 콘트윌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다. 코델리아만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려 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나엘의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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