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24)화 (24/90)

#24화.

“……요새 공작님께서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응?”

무슨 말을 하려고. 나 긴장해야 하니.

“보기 좋습니다. 예전에는 날이 서 계신 날이 많았는데 요새는… 잘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악녀 이미지는 좀 망한 것 같기는 했다. 사실 그렇지. K-유교걸이 어디 가겠느냐고.

아무리 해도 아가사처럼은 안 됐다.

“예전에는 저를 ‘개같은 새끼’라고 부르셨었는데 지금은…….”

지금 뭐라고……?

“저를 사람처럼 대해 주시는군요.”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아가사, 어디 안드로메다 인성이세요?

사람을 두고 개같은 새끼? 물론, 다비드를 보면 리트리버가 떠오르긴 했다. 충성심 강하지, 잘생겼지, 착하지!

그래도 저 입에서 사람처럼 대해 준다는 말이 나오다니.

내가 너무 패기 넘쳤던 거지. 악녀 아가사처럼 살아 보겠다니. 언감생심. 꿈에서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크, 크흐으으음… 내, 내가… 사춘기가 좀 길었지……. 오춘기였나 봐.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아가사가 싼 똥을 내가 치워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다이아 수저를 물려줬는데.

새로 태어난 내 부모님은 아가사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아닙니다, 공작님.”

다비드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작님을 평생 곁에서 모실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하하… 보면 볼수록 아깝기는 한데,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다비드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세기의 사랑을 할 용기도 없다.

아깝긴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미안해.”

“그러면…….”

다비드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면, 식사 한 번 사 주시겠습니까?”

“식사?”

“네,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식사 한 번쯤이야.

“좋아. 다비드가 시간 될 때면 언제든.”

다비드가 환하게 웃었다. 내 마음도 환해질 정도로.

* * *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바다가 되는 기적을 마주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천둥 번개가 쾅쾅 울려 대는 것 같다.

하하하하하하.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이브라임이 나를 향해서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오늘 오기로 한 입주 마법사가……?”

“네, 접니다.”

다비드, 너 밥 사 주기로 한 거 완전 취소.

지금 나한테 이런 대왕 똥을 던져 주고… 밥을 사 달라고…….

눈물이 눈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이브라임이 내 눈앞에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1년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만? 혹시 불만이 있으신? 지?”

네가 더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데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이브라임을 피하기 위해서 입주 마법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낸 것인데, 본인이 굴러들어온다고?

세상 완전 말세네.

여기가 바로 세기말인가.

말투를 보면 지가 상전이다.

“이쪽은 저를 도와 일을 해 줄 수습 마법사이자, 보좌관인 델코. 입니다.”

그냥 반말을 해, 이 자식아.

“……마탑에 있는 걸로 알았는데.”

“아.”

이브라임이 피식 웃었다. 델코가 아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아주 많은데 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마탑주께서는 아주 자비로우신 분이라. 1년간의 휴가를 허락하셨지.”

“그래?”

이브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간의 휴가면… 휴양지엘 가야지, 왜 여기에? 혹시 휴가 떠날 비용이 부족해서?”

이브라임이 ‘설마 그렇겠니, 멍청아.’ 이런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후우.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본 거겠니? 나와 이브라임 사이에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튀었다.

“절대로 착각하지 마.”

이브라임이 도도하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젤리 때문에 온 게 아니야.”

“……?”

젤리가 여기서 왜 나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브라임을 노려보았다. 이브라임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시종일관 당당했다.

“나는 여기에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서 조사하고 마법에 대한 심층 탐구를 하기 위해서 온 거야. 절대로 젤리 때문이 아냐.”

델코가 억울한 표정으로 이브라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젤리 때문이구만.

몰랐는데 고양이 덕후였나?

하아.

머리를 짚었다.

우리 애가 예쁘기는 하지만… 물론! 사람을 홀릴 만큼 예쁘긴 하지만 이러는 건 아니지.

내 표정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이브라임이 선수 쳤다.

“이 계약은 깨질 수 없어.”

“왜?”

“그… 조항에 추가되어 있거든요.”

델코가 계약서의 가장 밑부분을 소심하게 가리켰다.

“이 계약은 마엘리스 신의 보호를 받으며, 영혼에 맹세코 절대로 깨어질 수 없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단 생각에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았지만 정말로 그랬다. 다비드, 이리 좀 와 볼래?

“내가 반드시 이 문구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이브라임이 어깨를 폈다.

뭔가 되게 뿌듯한 표정인데.

“근데 너 왜 반말해?”

“너도 반말하잖아.”

이브라임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설마, 나─이 따지고 신─분 따지는 꼬─온대는 아니겠지?”

뿌득.

이가 갈렸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델코가 하얗게 질려서는 두 손을 흔들어 댔으나 이브라임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왜 이브라임이 마탑에서 괴짜 취급을 당했는지 알 것 같달까.

하.

이쯤되면 그런 생각이 된다.

될 대로 돼라.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보자.

* * *

한편, 루시아는 홀로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인공 하천 근처에 앉아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코델리아 백작 부인을 찾을 수 있을까?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무사하신 걸까?”

루시아의 청명한 분홍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본디 루시아는 쾌활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고초를 겪고 있을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루시아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눈물을 닦았다.

‘루시아, 최대한 숨어 있어야 한다. 이번 일은 심상치 않아. 황후가 작정하지 않고서는 황태자궁에 손을 댈 리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렴. 네 살길만 생각해.’

어떻게 저 혼자 살 생각을 해요, 코델리아 백작 부인…….

길거리를 떠돌던 어린 소녀를 황성으로 데리고 간 게 바로 코델리아였다.

코델리아가 없었다면 지금 루시아의 삶은 어땠을까? 길바닥의 비렁뱅이들과 다를 게 없었겠지.

어쩌면 술집에 팔려 갔을지도 모른다. 루시아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할짝.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목 인근에 축축함이 느껴진 것이다.

래빗키스(Rabbit Kiss).

작고 귀여운 분홍빛 혀로 핥고 있었다. 루시아가 먹먹한 목소리로 젬을 불렀다.

“……젬?”

젬이 코를 씰룩거리며 루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오늘따라 유독 희어 보이는 게 솜털처럼 보였다.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젬이의 콧잔등을 문질렀다.

젬이 루시아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듯 루시아의 품에 고개를 비집기도 했다.

“젬, 나를 위로해 주는 거야?”

젬이 그게 맞다는 듯이 커다란 귀를 흔들었다. 루시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젬…….”

루시아가 울먹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고마워. 흐윽…….”

젬이 울지 말라는 듯이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러다가 앞니에 씹혀 머리카락이 조금 끊어지긴 했지만.

젬의 기다란 귀가 루시아의 뺨에 비벼졌다.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젬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젬이 눈을 깜빡였다.

젬의 귀는 예민하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루시아가 만져 주는 건 편안했다.

‘재수 없게 빨간 눈이야. 악령이 든 것도 아니고! 너 같은 게 있어서 우리 사업이 계속 망하는 거야. 에라이, 퉤!!’

젬의 전 주인은 모든 불행을 젬의 탓으로 미뤘다. 그럴 때마다 젬의 붉은 눈이 핑계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달랐다.

‘정말 예쁜 눈동자네. 루비 같아.’

젬의 눈동자를 재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예쁘다고 말해 주었다.

그때의 다정함을 어떻게 잊겠는가. 젬은 루시아에게 똑같은 다정함을 전해 주고 싶었다.

젬의 눈동자가 오로지 루시아를 담고 반짝였다.

젬을 찾는 사육사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젬이를 찾는 다른 말썽쟁이들의 목소리도.

* * *

나엘이 편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편지를 덮어 두었다가 다시 펼쳐서 읽기도 했다.

히샤가 앞발로 편지를 팡팡 두드렸다.

[뭔데 그래? 나도 보여 주게.]

나엘이 편지를 빼앗았다.

“내가 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있잖아. 설마 글씨 읽는 법을 까먹은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