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엘이 차가운 얼굴로 렌디아 시녀장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에 의하면 전에 있었던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돈을 빼돌렸다는 거군.”
나엘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지금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어디에 있지?”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죽은 황비, 즉 나엘의 어머니가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나엘의 사람.
정말로 코델리아 백작 부인이 비리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회유할 방도가 보이질 않으니 시녀장을 갈아치우기로 한 것이겠지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쓰면서도 뻔뻔한 족속들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엘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경을 벗으니 날카로운 나엘의 눈동자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본 궁의 지하에 갇혀 있습니다.”
다행히 멀리 끌려가진 않은 것 같고.
“증거는?”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황후 폐하의 온정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분께서는 항상 황태자 전하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나엘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좋아.”
사실 여태까지 로살린이 참고 있었던 것도 대단한 거다. 그 여자야말로 유순한 가면 속에 독을 품고 있으니까.
“여기까지는 마음대로 해.”
나엘이 이를 악물었다.
“다만, 코델리아 백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나엘의 잔잔한 붉은 눈동자와 렌디아의 갈색 눈이 맞부딪혔다. 렌디아는 왠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엘의 기백에 눌린 것이다.
“큼…….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제 죗값을 받고…….”
“렌디아 시녀장.”
나엘이 서늘하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렌디아의 등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일말의 온기조차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저리도 찰 수가 있는 걸까?
“이곳은 내 궁이네. 여기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몰라.”
“저, 저한테 위해를 가하시면…….”
“나 또한 자네가 약간만 협조를 해 주면 얌전히 굴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하루가 다른 곳이 황성이지 않나. 누가 사라지든 간에 아무도 관심이 없지.”
렌디아가 침을 삼켰다. 그녀는 알아차렸다. 나엘이 진심이라는 것을! 렌디아가 코델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그는 절대로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나엘이 내뿜는 흉흉한 기백이 그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엘의 다리 뒤에서 고고하고 지엄한 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 작은 강아지처럼 생긴 생물이 신수라는 건 렌디아도 알고 있었다.
신수가 같잖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래 봐야 능력도 없는 반푼이 신수 주제에.’
저것이 사일러스에게는 없단 말이지. 그 덕에 로살린의 시름이 깊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신수를 훔쳐다가 로살린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전하.”
“이만 물러가게. 코델리아는 곧 풀려나게 될 거야.”
로살린과 전면으로 부딪힐 때가 아니다. 황제가 저렇게 정정하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아버지를 베고 그 자리에 앉을 게 아니고서야.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실각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숨만은 살려 거둘 수 있었다.
“3일 주지. 그 안에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가져오게. 그전까지 코델리아 백작 부인은 죄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게.”
“네, 전하.”
나엘이 한발 물러서니, 렌디아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코델리아를 밀어내고 렌디아가 이 자리를 차지하는 거였다.
나엘의 식사를 총괄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시녀장의 자리를 말이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에게는 내 기사를 붙이겠네.”
렌디아가 불만스러움을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이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히샤를 훑어본 렌디아가 물러갔다.
나엘이 안경을 도로 썼다.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용할 날이 없군.”
히샤가 앞발을 날름날름 핥으며 대꾸했다.
[인간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워. 차라리 신수가 낫다니까. 다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거지? 귀엽지 못해서 그런 건가.]
나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전에 하녀가 그러던데. 그러고 보니 그 하녀가 요새 안 보이네. 아무튼 그 하녀 말이 나는 귀여운 걸로 할 일 다 한 거라더군. 내가 그렇게 귀여운가.]
히샤가 늠름하게 나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봤자 작은 강아지 신세였지만.
[말해 봐. 네가 보기에도 내가 귀엽냐고.]
……더 피곤해졌다. 나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행히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간 시간을 끌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순식간에 말이다.
이브라임도 갔고.
나엘도 조용하고.
하, 여기가 다시 나의 낙원인가.
물론, 아직 예기치 못한 손님은 남아 있었다. 이틀을 내리 잔 여자가 깨어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깼나?”
여자가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어디……?”
“아무 기억도 안 나나? 황태자궁의 마구간 지기라는 남자가 업고 왔더군.”
“아…….”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엠마가 부축했다. 따뜻한 물을 입에 대 주니 순식간에 마셨다.
엠마가 여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제 기억이 나는 게 있나? 의사 말로는 요양을 하면 금세 나을 거라더군.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거라고.”
여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 돌봐 주시던 코델리아 백작 부인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끌려가셨어요……. 그게, 다 저 때문에…….”
여자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그 물갈이 당했다는 시녀장의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갈 곳은 있나?”
여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눈물을 퐁퐁 쏟는 걸로 봐서는 멘탈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한 듯싶었다.
“저는…… 제 집은 황성이었어요.”
아무래도 지금 당장 내보낼 상황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이곳에서 일하게 하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슈타디온은 요새 들어서 계속해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들어오는 신수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돌봐야 할 신수들이 많아지니 사육사들도 늘고,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사용인들만 죽어나는 중이었다. 이번 기회에 충원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곳은 슈타디온 공작 가야. 원한다면 이곳에서 지내도 좋아.”
“정말요?”
여자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엠마가 일을 안내해 줄 거야.”
“공작님?”
금시초문인 소리에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그렇게 됐다!
엠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거예요.”
펑펑 우는 여자의 침대 위로 메리와 또리가 기어 올라갔다. 계속 이불에 매달려서 낑낑거리더니. 여자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궁에도 이렇게 생긴 강아지가 있었어요. 이름이 히샤였는데…….”
“아, 이름. 그러고 보니까. 넌 이름이 뭐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고용할 뻔했잖아.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분홍빛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무언가 데자뷔가 들었다.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카락에 분홍 눈동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생김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불안감을 호소하는 것처럼.
대체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루시아라고 해요. 루시아.”
쿠쿵.
머리 위로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선조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내다보시고…….
‘루시아라고 해요, 루시아.’
그 말이 메아리쳤다.
『성녀 루시아에게 집착하지 마세요』의 여자 주인공이 등판했다.
내 집에.
* * *
이런 상황을 두고 ‘제 무덤 제가 판다.’라고 하는 거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뇌 맑은 상태로 루시아에게 일자리를 제안했으니.
아오, 아오, 아오! 생각 좀 하고 살자, 제발!
사실 루시아는 슈타디온으로 오는 게 아니라 신전으로 가야 했다.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시아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는 것이 마구간 지기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코델리아 백작 부인!
사과주 사업으로 성공해서 루시아의 조력자가 되어 주는 인물이었다. 코델리아 백작 부인의 뒤에는 황태자가 있었고.
어쩐지 익숙하더라.
어쩐지! 머리카락이 황금색이더라!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냐고!!
신전으로 가야 했던 폭탄이 이미 여기 떨어져 버렸는데!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 위를 굴렀다.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또리하고 메리가 나를 슬금슬금 피했다.
1m쯤 떨어진 곳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니들 눈에도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니?
“내가 사실 지금 좀 그래……. 흑흑.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 것 같아, 메리?”
메리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니가 보기에도 답이 없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조상님 말씀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댔어.”
원작 시작 시점까지 이제 한 5개월 정도 남아 있었다.
여자주인공이 길바닥에 버려졌다는 건 곧 각성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각성을 하면 반드시 신전으로 가야 하니까……. 그래, 그때까지만 잘 돌보다가 보내면 돼. 별로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래, 그러면 돼.
억지로 불안감을 억누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