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집사장이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집사장이 다급하게 나를 향해 손짓했다.
누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불안해.
또 체이스나 나엘이 찾아온 거 아니야?
에휴, 그래도 저렇게 다급해 보이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얼른요!”
가지고 나온 산책 용품을 엠마에게 전부 넘겨주었다.
“엠마, 애들 보고 있어.”
“네, 공작님!”
연락도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동물들이 정문 인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동물들이 내게 모여들었다. 골골거리며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구, 아이쿠, 그랬어요! 저녁은 잘 먹었고?”
“냐아아아!”
“킁, 킁!”
“카르르…….”
“옳지, 옳지.”
“저, 공작님……!”
“아!”
아주 마성의 블랙홀이란 말이야.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아가들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아가들이 내 다리에 낑낑대며 매달렸다.
“먼저 확인부터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큼! 알았네.”
내 악녀 이미지 다 망가졌네. 휴.
그리고, 슈타디온에 온 손님은…….
허름한 행색을 한 남자였다. 50대를 막 넘었을 것 같은 외양이었다. 남자의 등에는 무언가가 얹혀 있었다.
책이나 신발, 그런 건가?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남자가 숨을 헐떡였다.
달빛 아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등 뒤에 매고 있던 거적때기 같은 것의 정체도.
“그건…사람이잖아.”
* * *
체이스가 이를 아득 갈았다. 갑자기 마차의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른 것이다.
비싼 값을 들여서 사 온 백마들은 멀쩡했지만, 마차는 반파되었다. 사고 이후 마차를 확인한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마차에 손을 댄 것 같다고 했다.
‘누가 감히.’
데이먼 백작 가의 위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잡아 와. 알겠어?”
체이스가 보좌관을 닦달했다. 오른쪽 다리가 똑하고 부러져 버렸다. 목발이나 부축, 혹은 휠체어 없이는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예, 예! 소백작님!”
목발로 얻어맞은 보좌관이 달아났다. 체이스가 이를 악물고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후우.”
체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결혼 무효 소송을 시작한 이후로 아내는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처음에 그녀를 선택한 것은 체이스의 의지였다. 돈이 많겠다, 얼굴도 그만그만하겠다, 성품도 그럭저럭 괜찮겠다. 이 정도면 아내로 삼을 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체이스의 선택은 옳았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서 데이먼 백작 가의 사업을 한층 더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먼 백작 가는 숙박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운 호텔을 짓는 데 처가의 영지에서 나는 목재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호텔 건축이 끝나자 더 이상 얻을 이득이 사라진 것이다.
와중에 더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아가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아가사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어디 들어가서 정신 수양이라도 하고 나온 건지 사람이 되었다.
누가 보아도 탐나는 신붓감이 된 것이다. 데이먼 백작이 침을 흘릴 만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멜리슨이 뭐야. 그게 먹히겠느냐고.’
체이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잘못했다가는 체이스의 기회도 날아갈 수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낚아채서 다행이지. 그런데 이 꼴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얼마 전에 저택에 나타난 황태자라니.
그날 황태자의 손을 잡고 사라지던 아가사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미친 새끼.
‘지가 거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사실 아가사와 나엘 사이는 아주 옛날에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엘이 슈타디온을 얻는 것이 싫었던 로살린 황후가 약혼을 훼방 놓은 것이다.
황제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로살린은 황제에게 나엘에게는 타국의 공주가 더 어울린다고 속삭였다. 사실 그때는 아가사의 악명이 위상을 떨칠 때라 황제를 설득하는 것도 쉬웠다.
황제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로 기분이 상했던 슈타디온과 황실은 한동안 틀어졌었다.
그러던 와중에 공작이 죽고 아가사만 남았다.
“또 슈타디온에 눈독을 들이는 건가.”
체이스가 묘한 눈길로 제 부러진 다리를 응시했다.
여자들은 다친 남자를 보면 모성애가 발동되지 않나?
게다가 아가사 공작은 버려진 신수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또한 연민일 것이다.
“이거……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
체이스가 입맛을 다셨다.
* * *
나는 또리 이후로 계속해서 버려진 동물들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몇몇 사람들이 직접 슈타디온 앞에 동물을 버리는 일도 있었다.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지고 있었지만 인간이라니.
“……여기는 병원이 아닙니다만.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집사장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오! 나는 지금 이 아가씨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 왔소!”
“도울 사람……?”
“네. 여기에 가면 버려진 것들은 전부 받아 준다고 하더군요.”
남자가 파르르 떨었다.
‘버려진 것.’
업혀 있는 저 여자가 버려졌다는 건가?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집사장을 뒤로 물렸다. 케르인은 다 좋은데 나를 과보호한다니까.
“간략하게라도.”
“……사실 황태자 전하의 궁에서 일하던 하녀입니다.”
“그런데?”
나엘의 궁에서 일하던 하녀라.
“갈 곳 없는 이 아이를 시녀장이 거둬서 황성에서 살면서 일하게 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시녀장이 바뀌었습니다.”
세력 구도 개편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라인을 따라서 사람들이 줄줄이 잘려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 아이가 이용되었습니다. 전 시녀장을 음해하기 위해서 이 아이를 모질게 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밖으로 내쳤지요. 새벽이슬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을 업고 온 것입니다! 병원도 돈이 있어야 받아 주지 않습니까.”
남자는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슈타디온에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버림받은 신수들을 돌봐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비를 이 아이에게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할 말이 뭐가 있어.
“……들이게.”
“예, 공작님.”
집사장이 길을 텄다. 남자의 등에 업힌 작은 여자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처연하게 늘어졌다.
왜 저게 거슬리지?
“베리타 부인.”
“네, 공작님.”
“의사를 부르고 방을 내어 주게. 한동안 지내게 해.”
“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들 하긴 하지만……. 그래도, 뭐.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 결심을 후회했다.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들이는 게 아니다.
* * *
의사의 진료가 끝났다.
“다행히 한동안 요양하면 나을 겁니다. 식사를 오래 하지 못한 데다가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던 탓에 혼절했던 것 같습니다. 요양하면 금세 좋아질 겁니다.”
응접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아는 사이인가?”
“아, 아닙니다.”
남자가 들고 있던 모자를 쥐어짰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남자를 좀 더 수더분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황태자 전하의 궁에서 일하는 마구간 지기입니다. 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 아이와는 오다가다 인사나 주고받는 사이였지요. 아무래도 딸하고 또래다 보니 좀 더 신경 쓰이기도 하고……. 우리 딸은 집에서 배부르게 누워 있는데 저 아이는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딸 같아서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의미로 딸 같아서 데리고 왔다는 거네.
“저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고?”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도 모릅니다.”
“……수고했네. 깨어나면 건강을 회복시키고 살길을 찾아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이야.
이렇게 인류애가 회복되기도 하는구나. 딸 같아서 성희롱을 하고, 딸 같아서 사람을 괴롭히고.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남자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황태자의 마구간 지기, 그리고 황태자의 하녀.
대체 거기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람. 황태자궁의 시녀장이 바뀌었다는 건…….
나엘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쓸데없는 관심인 걸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났다.
“어휴. 무슨 상관이람.”
고개를 얼른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