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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18)화 (18/90)

#18화.

하.

이런 소름 돋는 대사라니. 내 입에서 나간 말이라는 게 믿기질 않는다. 근데 또 그게 꽤 효과적인지 내 주변에 있던 자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다.

저들도 아가사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을 터였다.

“황태자 전하도 이만 가셔야 할 곳으로…….”

“오늘 내 파트너는 너야, 아가사.”

나엘이 피곤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안경 너머의 파리한 붉은 눈이 나를 향해 번뜩였다.

“아니면 체이스 같은 놈과 파트너라도 할 텐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내가 뭐라고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곧 예배가 시작됩니다! 다들 착석해 주십시오!”

작고 동그란 얼굴의 어린 신관이 구르듯이 들어와서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어린 신관은 나와 나엘을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나엘과 함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에휴. 인생 뜻대로 되는 게 없어.

* * *

아가사는 모든 의식이 끝난 후 나엘을 두고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아니, 나엘만 두고 간 게 아니었다. 아가사와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서 혈안이 된 이들을 피해서 달아나 버렸으니까.

“아까 자네 들었나?”

“뭘?”

“그 왜. 나 아가사야! 그 말 말이야. 하여튼, 저 계집애는 고분고분해지는 법이 없어.”

“어휴. 예전 지랄발광을 안 봐서 다행이지 뭔가. 그러게 저런 망나니는 찍어 먹어 보는 것도 위험하다니까.”

남자들이 낄낄거렸다.

“그래도 혹시 알아. 자네가 유혹하면 혹할지.”

나엘이 떠들어 대는 영식들의 면면을 살폈다.

전혀 잘난 면모를 모르겠다.

‘어디서 말라비틀어진 감자 같은 놈이.’

나엘이 불만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 정도면 어떤가.”

나엘이 뒤를 힐끗 보았다. 매끄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체이스가 나섰다.

“자네가?”

“요새 자네 가정에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더니. 정말로 이혼이라도 하는 건가?”

“이혼이라니. 사기 결혼이지.”

“뭐?”

“알고 보니 처가에 빚만 잔뜩이더군.”

체이스가 안쓰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그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세상에……. 그걸 자네보고 갚아달래?”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하지.”

체이스가 처연한 척했다. 자신은 오로지 피해자인 것처럼. 나엘이 안경 밑으로 눈가를 훑었다.

‘미꾸라지 같은 새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 정도면 아가사 공작에게 어울리느냐고 물었잖나. 자네들 생각은 어때?”

“세상에. 자네도 아가사 공작을 노리는 건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가사를 꽤 좋게 생각했었거든. 안쓰러운 사람이야.”

체이스가 사람 좋은 척 굴었다. 나엘이 역겨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체이스는 로살린 황후와 똑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훌륭한 외모를 지녔다는 뜻이다.

그 덕분인지 사람들을 곧잘 선동시키곤 했다.

“자네는……. 참, 보는 눈이 없군. 자네가 결혼 시장에 풀려난다면 일부 영식들이 아주 슬퍼하겠어.”

“아가사 공작에게 자네는 과분하지. 체이스, 정말로 그 자리에 도전해 보려고?”

체이스가 고민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과거에 아가사를 좋아했었던 적도 있고.”

체이스와 아가사는 8살 차이다. 그런 꼬맹이에게 마음을 품었을 리가. 체이스가 망아지처럼 뛰어다닐 때 아가사는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게다가 체이스의 취향은 원숙한 미녀였다. 체이스가 풍기는 비릿한 내음을 맡은 나엘이 사정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체이스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대체 아가사가 뭐가 모자라서 저런 놈에게.’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나엘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미친 새끼들.’

신전을 빠져나온 나엘이 이를 아득 물었다. 나엘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보좌관을 불렀다.

“네, 전하!”

“데이먼 백작의 장남이 탈 마차를 찾아서…….”

나엘의 눈동자가 새빨간 빛으로 번뜩였다. 말을 끝마친 나엘이 싸늘하게 웃었다.

‘주제를 배울 필요가 있지.’

감히, 제깟 게 뭐라고.

* * *

이브라임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슈타디온에 방문했다.

그의 목적은 젤리……. 아니, 아니지. 공사를 마무리 짓는 거였다.

“……오늘은 공사가 마무리되겠지요?”

수습 마법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브라임의 곱디고운 하얀 손에는 깃털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이브라임이 차가운 얼굴로 수습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빨리 끝내고 싶으면 네가 해.”

“예?”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인 것 같아? 지금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이브라임이 볼을 붉히고 부르르 떨었다.

그게 공사 이야기가 맞는 걸까요. 젤리하고의 관계가 아니고요……?

“젤리, 젤리! 이것 봐.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이브라임이 젤리를 찾아 공작 가 정원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인부들과 수습 마법사가 허망하게 응시했다.

“에이씨, 오늘 공사도 공쳤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습 마법사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백 번이고 대신해 주겠는데. 이브라임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은 건 수습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인부들이 욕설을 걸쭉하게 내뱉고는 사라졌다.

“이브라임 님!”

수습 마법사가 잰걸음으로 이브라임을 쫓아갔다. 여전히 젤리를 쫓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이브라임을 수습 마법사가 힘껏 불렀다.

“이브라임 님!!”

“왜.”

이브라임이 깃털 장난감을 손에 들고 몸을 돌렸다.

“지금 그러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공사 마무리 안 하실 겁니까?”

“할 거야.”

이브라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별짓을 다 했는데 젤리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다. 얘는 뭘 먹고 이렇게 도도한 거야?

마음에 안 들어.

이브라임이 깃털 장난감을 거칠게 흔들었다. 제 자리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이브라임을 보며 수습 마법사의 마음만 타들어 갔다.

“이러다가 정말 혼쭐이 나실 거예요. 아무리 마탑주님이라도 이브라임 님을 항상 비호해 주실 수는 없어요!”

이브라임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젤리의 분홍색 발바닥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도도하게 치켜든 턱과 식빵처럼 부드러워 보이던 노란 등도.

이렇게 이브라임을 애태우다가도 살짝살짝 나타나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하품을 하며 분홍색 입 안을 내보인다.

그러다가 이브라임의 발밑을 빙글빙글 돌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이브라임을 수습 마법사가 재촉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시면 공작님께 말씀드려 보시면 되잖아요!!”

“뭐?”

“젤리 님을 입양하는 방법은 어떠세요?”

수습 마법사가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큼,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가 아니긴.

“물론, 이브라임 님은 그러실 수도 있지만……. 젤리 님의 의사도 확인해 보셔야지요. 같이 가고 싶으실 수도 있잖아요.”

“……그럴까?”

“네!!”

수습마법사가 강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겠지만, 이브라임을 일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젤리 님 수발은 제가 전부 들게요!”

“네가 그걸 왜 해?”

이브라임이 날카롭게 물었다.

“설마, 너도 젤리하고 친해지고 싶은 거야?”

마치 적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에라이, 이 가족같은 놈아.

* * *

그날 이후로 나엘은 보지 못했다. 대신, 체이스 데이먼이 마차 사고를 당해서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이브라임은 벌써 일주일째 슈타디온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없었는데.

“공사할 게 그렇게 많은가?”

“그런가 봐요. 마법사님 말로는 해야 할 게 많아서 한동안 계속 오게 될 것 같다고……. 땅에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

어쩔 수 없지.

“공사가 언제쯤 끝날 것 같대?”

“그건…….”

엠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엠마가 뭘 알겠어.

내가 바깥출입을 안 하는 수밖에. 덕분에 나와 메리, 또리의 산책 시간은 이브라임이 돌아가 버린 저녁 시간대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날이 선선하니 이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메리, 물어 와!”

“깡!!”

메리가 촐랑거리며 뛰어갔다. 하얀 강아지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흔들렸다.

또리는 메리와는 약간 성격이 달랐는데 저런 것을 쫓아가는 것보다 저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좋아요 스팟을 꾹꾹 누르는 것이다. 하도 동물이 많다 보니 많은 냄새가 묻어 있어서 그런지 맡을 냄새가 많은 것 같았다.

메리는 메리대로, 또리는 또리대로 행복해 보였다.

이거지. 이게 바로 내가 바란 파라다이스지!

공사가 완공되고 나면 이브라임도 더 이상 오지 않을 거고……. 황태자에게도 사료를 배송해 주기로 했으니.

나는 자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늦은 밤, 절대로 손님이 오지 않을 시간에 누군가 우리를 찾아왔다.

“공작님!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문에 웬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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