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17)화 (17/90)

#17화.

이른 아침이 밝기 무섭게 엠마가 나를 깨웠다. 나를 깨우는 속도가 젤리보다 빨랐다. 엠마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엠마도 알다시피 나, 아무런 기억도 못 하잖아.”

엠마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아침 예배에 참석해야 해서요. 지금부터 일어나셔야 할 것 같은데.”

창밖을 보니 이제야 해가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가사를 위해서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양옆에 웅크리고 있던 녀석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냥!”

“끼잉…….”

“까웅!”

메리가 배를 드러낸 채로 온몸을 뒤틀며 발로 고양이 세수를 했다. 요, 귀여운 자식.

분홍빛 배를 간지럽혀 주자 메리가 눈을 깜빡이다 하품을 했다. 아직 젤리와 또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늦장을 피웠다.

그리고 엠마와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서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집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공작님?”

“응.”

앞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녀석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집사장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잠들었다.

“무슨 일이야?”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이 시간에?”

시간을 확인해 보니 고작 7시였다.

“네, 공작님. 그……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엠마, 준비가 다 된 건가?”

“네, 공작님.”

엠마가 내 손에 검은 레이스 장갑을 끼워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대체 이 시간에 초대도 안 한 손님이 누구야.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절대로 인생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응접실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황태자 전하……?”

“아가사.”

우리 안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냐.

게다가 손님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엘의 옆에는 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학자처럼 생긴 남자였다.

쟨 또 누구래.

엠마가 얼른 내 귀에 속삭였다.

“데이먼의 장남, 체이스예요. 차기 데이먼 백작이 될…….”

그 유부남?

“안녕하세요, 공작님. 오늘 의식에 앞서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체이스 데이먼이라고 합니다.”

“……와 줘서 고맙네.”

황태자와 체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나엘은 체이스를 무시했고, 체이스는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그, 공작님 이만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엘과 체이스가 동시에 일어섰다. 마치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이.

냉랭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휘어 감았다.

이건 완벽한 진퇴양난이다.

앞은 소똥이고 뒤는 개똥이네.

아이씨, 뭘 밟아도 기분 더러운데……? 버팅기는 내게 나엘이 손을 내밀었다. 뭔가 심기가 불편한 듯, 차가운 표정이었다.

“가자, 아가사.”

너무 당연한 듯한 요구에 나도 모르게 떠밀렸다.

그래, 유부남보단 낫지…?

* * *

마차 안에 고요함이 흘렀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아가사를 만나러 왔는데,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체이스라니.

그, 체이스 데이먼이라니!

체이스가 결혼하기 전에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던 인재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체이스가 아가사에게 가당키나 한가.

나엘이 이마를 꾹 눌렀다.

“저 미친놈은 대체…….”

날 선 말에 아가사가 나엘을 힐끗 보았다. 얼결에 마차에 타긴 했지만 아가사는 이 자리도 불편했다.

그런데 체이스가 미친놈이라는 데에는 아가사도 동의했다.

‘처음으로 마음이 맞네.’

데이먼 백작 가에서 혼담을 보내올 때부터 기가 찼었다.

“설마 체이스 데이먼과 데이트하는 사이인 건가?”

“미쳤어요?”

아가사가 혀를 물었다.

그리고 마차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엘이 안경을 벗고는 눈가를 문질렀다.

“후우.”

나엘이 누그러진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적인 이유는 뒤로 하고 나엘은 아가사가 체이스와 어울리는 게 마뜩잖았다.

“아가사, 체이스는 결혼을 한 몸이야.”

“나도 알아요.”

아가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결혼 무효 소송 중이지.”

그건 몰랐는데. 아가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아가사가 요새 사교계를 등졌다는 건 진실인 듯했다. 나엘이 안경을 바로 하고는 말을 이었다.

“요새 데이먼 백작 가가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아. 아마도 그 결혼 무효 소송은 받아들여질 거야.”

황제는 전쟁을 벌이려 하고 데이먼의 조력이 필요했다. 황후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소송은 데이먼이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체이스 데이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드러낸 것 같은데.”

아가사도 동의했다.

오늘따라 황태자하고 마음이 맞는 것 같다.

“아가사. 어린 여자 가주는 좋은 먹잇감이 되길 마련이야. 제2의 체이스가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어.”

아가사가 눈을 깜빡였다. 그간 나엘과는 날 선 대화만 주고받았다. 나엘은 아가사를 오해했고, 아가사는 그런 나엘을 피하기에 급급했으니까. 아가사에게 있어서 나엘은 아주 먼 미래에,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장본인이었다.

피해야 할 1순위!

“아가사. 너는 그를 대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지?”

지난 6개월 동안 그나마 잠잠했던 건 나엘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이다.

나엘은 그런 아가사를 일깨워 주었다.

“사교계를 등지는 건 좋아. 하지만, 네가 슈타디온인 이상 세상을 등질 순 없어.”

나엘의 적안이 아가사를 응시했다. 가로수가 창문을 통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엘의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아가사를 직시하는 적안.

고요한 숨소리.

덜컹이는 마차.

그리고 아가사를 걱정하는 눈빛.

‘짜증 나.’

아가사는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정말… 더럽게 잘생겼네.’

사람 설레게.

* * *

히샤가 방문을 박박 긁었다.

[이 나엘 놈!!]

히샤의 작달막한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갈 거면 데리고 가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나엘은 히샤를 방 안에 가둬 두고 사라져 버렸다.

[건방진 어린 인간! 혼꾸녕을 내 줄 테다!]

히샤가 앞발로 문을 팡팡 내리쳤다. 아무리 씩씩대도 거대한 문은 꿈쩍도 하질 않는다.

성체로 변하기 위해서는 나엘의 기운을 빌려 써야 했다. 이 모습으로는 발코니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박박박박!

히샤가 문이나 실컷 긁고 있는 이유였다.

한참 그러고 있었을까. 나엘의 침실 문이 아주 슬그머니 열렸다.

“얘.”

하얗고 작은 손이 히샤를 향해 손짓했다. 쭈그리고 몸을 낮춰 앉은 여자가 환히 미소 지었다.

“배고파서 그래? 아니면 혼자 남겨져서 서러운 거야?”

다정한 물음에 히샤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낑…….”

왠지 서러운 기분에 히샤가 여자의 품에 폴싹 안겼다. 나엘이 없을 때 그의 침실을 정돈하러 오가는 하녀라 안면이 있었다.

종종 히샤를 위한 간식을 가져오곤 했다. 마음은 따뜻한데 센스가 없어서 그런지 신수에게 고기를 내밀기는 했지만.

“끼이잉…….”

하녀가 히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자 무서웠구나?”

히샤가 저도 모르게 배를 발라당 까 보였다.

‘큼. 한두 번 만져 본 솜씨가 아니군.’

배를 긁어 주는 게 아주 시원했다. 히샤가 눈을 감고 하녀의 손길을 즐겼다.

“귀여워…….”

게다가 하녀는 보는 눈도 있는 것 같았다. 히샤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열심히 히샤의 배를 쓰다듬는 하녀의 머릿수건 사이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화사한 황금빛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 * *

마차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건 나엘이 잘생기기도 했지만…….

“맞는 말만 골라 했어.”

나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엠마는 분명 오늘 그리 많은 사람이 참석하진 않을 거라고 했었다. 죽은 자의 1주기를 애도하는 자리에 관심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아가사 공작님. 요새 사교계에 모습이 뜸하시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만나 뵙길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네.

아까 나엘과 체이스가 찾아온 건 지금 이 순간을 경고한 거였나.

나 이렇게 인기 많았어?

“요새 자선 사업에 열을 올리고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중앙 신전에 키브르 대신관도 공작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는군요.”

“맞습니다! 능력을 잃은 신수들을 거둬 돌보는 일이라니! 위대한 마엘리스 신께서 탄복하실 일입니다!”

엠마가 내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더니.

차라리 악녀일 때가 나았지.

이게 바로 이미지 세탁이라는 건가. 의도치 않게 나는 신수들의 메시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저 인간들 봐.

‘능력을 잃은 신수들을 거둬?’

그게 아니지.

‘버림받은 신수들을 거둬.’

이게 맞는 거 아니냐고. 하여튼 혀 매끄러운 거 봐. 쌀이 아니라 버터를 씹어 먹고 사나.

“……그만들 하게.”

그들을 물려 준 건 나엘이었다.

“지금 공작은 모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왔네. 자네들의 무례를 공작이 달가워할 것 같진 않은데.”

황태자와 눈을 마주친 이들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피했다.

“큼큼!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예민하시네요. 안 그렇습니까, 공작.”

자, 나는 악녀 아가사다.

할 말 가리지 않는 아가사다.

나는 아가사 유나 슈타디온이다, 아자!

입에 정기를 모아 쏘아붙였다.

“자네가 나를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불쾌한데. 나는 황태자 전하의 말에 동의해. 다들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우리가 친해?”

“윽!”

나엘을 예민남으로 몰아가던 남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를 압박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나. 아가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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