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브라임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전에 봤던 고양이가 이브라임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다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니야아옹!
분홍빛 혀로 제 발바닥을 낼름거렸다.
“젤리…?”
이브라임이 천년의 분노가 녹아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니야!
그게 맞다는 듯이 고양이가 대답했다. 이브라임은 결정했다. 이 공사는 반드시 완벽하게 마무리 짓겠다고.
젤리가 사는 곳은 완벽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로드고가 하얗게 질린 채로 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 * *
“공작님!!”
나는 이대로 집무실이 무너지는 건가 생각했다.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자네, 이러면 안 돼! 공작님 앞에서 무슨 무례인가!”
“집사장님! 밖에서 저 난리가 났는데 그럼 제가 참아야 한다는 겁니까! 놔 보십시오!”
“로드고! 전에 공작님과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않았소!”
“하녀장님! 베리타 부인! 지금 선을 넘지 않았습니까! 저는, 저는 도저히…….”
우당탕탕.
결국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울 것 같은 얼굴의 로드고와 그의 허리에 매달린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물었다.
“방금 전에 인부들과 마법사가 들어와서 정원에 난장을 놓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난장?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걸세.”
“저는…….”
로드고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물론, 저는 더 이상 정원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기로 하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모두 필요한 일이네. 마법으로 구획을 나눠서 각자의 생존 환경에 맞도록 조성해 줄 생각이야.”
“공작님!!”
“로드고. 루나가 밥을 먹지 못한다더군.”
로드고가 하려던 말을 잊고 말을 삼켰다. 루나라면……. 로드고가 직접 데리고 온 수달의 이름이었다.
털 색이 달처럼 은빛이라 이름을 루나라고 붙였다.
그런데, 루나가 식사를 못 한다고?
“아무래도 환경이 맞지 않는 걸 테지. 수달은 흐르는 하천에서 사는 생물이니까. 게다가 신수다 보니 더 예민하지 않겠나.”
“…….”
“산목숨은 살려야지.”
로드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뜩이나 버림받은 충격으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야. 자네가 이럴 게 아니라 루나에게 더 신경을 써 줘야 하지 않겠나.”
어쩜. 나 말 너무 잘하는 거 아냐? 로드고가 완전히 넘어간 게 보였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게 있지.
사람을 설득할 때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스토리텔링도 중요했다. 그런 말도 있잖아.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크. 찬양해, 나.
“……제가 구한 목숨이…….”
“그래, 자네가 구한 목숨.”
로드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로드고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게 보였다.
* * *
로드고가 제 다리에 비비적거리는 루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엉망으로 뒤엎어지고 있는 정원을 보면 숨이 쉬어지질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귀한 신수가 버림받는 걸로도 모자라 밥도 못 먹고 있다니. 마음이 미어졌다.
“후우…….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뀨웅…….”
“밥은 왜 안 먹고 그래. 뭔가 먹어야지 기운을 차리지.”
로드고가 뭄을 굽힌 채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루나가 고개를 그 위에 얹었다.
목에 둘러진 낡은 리본이 마음에 걸렸다. 전주인의 흔적이리라.
“새 리본을 사 주랴?”
“뀨우우웅…….”
“예쁜 푸른 리본을 사 주마.”
루나가 뽀르르 로드고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어깨에 자리 잡은 루나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루나가 지친 고개를 로드고의 뺨에 기댔다.
로드고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로드고가 정원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런 로드고의 어깨에는 루나가 함께였다.
* * *
오오.
로드고와 대화를 마치고 슬금슬금 나왔다. 대체 어떤 상태길래 난장이라는 말까지 하는지.
그리고 나는 로드고의 멘붕 상태를 어느 정도 이해해 버렸다. 인부들이 열심히 땅을 뒤엎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허공을 수놓은 마법이라니. 마법사의 금발이 허공을 나부끼고 있었다. 그가 연창을 할 때마다 대지가 솟아오르고 물이 흘렀다.
나도 옛날에는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던 시절도 있었지. 때가 되면 호그와X에서 입학 허가서가 날아올 줄 알았다.
일을 하던 인부들도 한 걸음씩 물러서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마치 서커스 쇼를 보는 것 같달까.
우리 아가들 보금자리가 잘 지어지고 있나 확인을 하러 나온 것이었는데 신기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메리, 진짜 신기하다. 그렇지?”
“깡!”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던 메리가 폴짝폴짝 뛰었다. 으응, 너 저기에 관심 없구나. 메리가 맹렬하게 보고 있던 건 내 손에 들려 있는 간식이었다.
너 안 줘.
닭고기를 바짝 말려 만든 저키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낑……!”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풀기를 잃은 메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큼, 우리 아가들을 위해서 이렇게 신비한 마법 쇼도 보여 주는데 인사는 제대로 한 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큼큼.
“안녕하세요.”
못 들은 건가?
“저기요, 안녕하세요!”
금발 남자 옆에 있던 수더분한 남자가 그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왜.”
날카로운 반문이 들려왔고.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엄마야…….
천사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이 저렇게도 생기는구나.
“커흠! 슈타디온의 아가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생긴 건 예쁜 데 영 까칠한 고양이과인가. 그래, 예쁘면 그럴 수도 있지. 남자 옆에서 수더분한 남자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당신 고생이 많겠어.
“……이브라임.”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잠깐만.
이브라임?
이브라임이라고?
여기서 횽이 왜 나와……?
이브라임은 소설의 서브 남주였다. 여자주인공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간헐적인 플러팅을 던지던.
어쩐지 생긴 것부터가 남다르더라. 나 눈 뜨고 승천한 줄 알았잖아.
그나저나.
이브라임이 원작 아가사와 인연이 있었던가? 아직 원작의 시작 전 시점이라 알 수가 없었다.
전과 달라진 거……. 바뀐 건 물론 있었다. 내가 아가사의 몸에 들어와서 운명을 틀어 버렸다. 황태자에게 집착하면서 여주를 괴롭히는 루트로 갔어야 했는데 나는 나만의 사업을 찾아 버렸으니까. 사업……? 그게 문제로구나.
이브라임은 마법사다.
그것도 마탑에서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키던 마법사.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브라임을 불편해했고 외부에 출장 갈 일이 생기면 모든 걸 떠넘기곤 했었다.
원작에서 이브라임이 여주와 얽히는 것도 신전에서 마탑에 일을 의뢰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여주의 강력한 성력 각성으로 신전에서는 시설을 증축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했고 공사를 빠르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 마탑에 의뢰를 넣었었다. 그때마다 이브라임에 신전에 가야 했고.
아무튼, 이브라임이 출장을 나오는 상황에 내가 계속해서 요청을 넣었다.
방음 마법을 걸어 달라.
숲을 만들고 강을 만들어 달라.
제기랄.
자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나 때문이로구만.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면 당연히 그곳으로 가겠지? 그럼 공사하는 동안만 피해 다니면 되는 건가.
도망치자, 아가사.
“하하하하.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
“예? 공작님, 제가 모르는 일정이 있으셨나요?”
엠마가 눈치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서 들어가면 되는데……. 이번엔 오히려 이브라임이 나를 붙들었다.
“잠깐.”
쿵.
심장이 떨어졌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소설에 빙의하면 악녀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 첫눈에 반했다, 나를 외면하는 여자는 처음이다, 그런 건가?
“무, 무슨 일인가요?”
뭐, 이브라임 정도면 괜찮지. 대단한 마법사기도 하고……. 어차피 남주는 나엘 아니겠어? 이브라임 정도야 나한테 양보할 수도 있는 거……. 정신 차려!
이브라임 얼굴을 보니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공들하고 얽혀서 좋은 꼴 못 본다니까! 그중에서 여자 주인공의 것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었다. 잘못 먹었다가는 탈 나지, 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 것이 아닌 건 먹는 게 아니야.
아무리 이브라임이 완벽한 내 스타일로 생겼어도.
내 기대를 깨 버리듯 이브라임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공작, 커흠. 공작님? 이곳에서 젤리가 지내게 되는 건가? 요?”
젤리?
젤리는 귀여운 고양이였다.
젤리 또한 누군가가 유기하고 있는 것을 데리고 온 거였는데 내 모닝 알람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내 배 위로 뛰어내리거든. 쥬르를 유독 좋아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식빵을 굽는 게 할 일인 녀석이었다.
종종 담벼락 위를 타고 올라가서 돌보는 이 심장을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바깥이 위험하다는 걸 아는지 그 이상은 벗어나질 않는다.
깃털을 흔들면 배를 발라당 까고 드러내 주는 애교쟁이였다. 핑크색 발바닥으로 안마를 받고 나면 여기가 극락이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 젤리가 왜?
“……젤리는 저택 어디서든 지내고 있습니다만.”
“커흠. 여기 이 물을 마시게 되는 건가? 요?”
저 이상한 말투는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