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엘이 자기 반려견을 찾아 돌아가고 나서 내게 다시 평화의 시간이 도래했다.
슈타디온은 나와 동물들을 위한 파라다이스였고 돈이 물처럼 샘솟는 광산과 사업체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나는 돈 걱정, 출근 걱정 할 필요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주인공들하고 엮이는 일만 없으면 평생이 평탄하리라. 사교 모임도 일절 끊어 버리고 이렇게 수도승처럼 사는 거다.
계획은 완벽했다.
“메리!”
“꺄앙─!”
나를 향해 작은 발바닥을 굴러 달려온 메리가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개들은 주인의 겉모습이 바뀌어도 알아본다던데. 우리 똑똑한 메리는 나하고 소설 속에 같이 들어오고 나서도 나를 알아봤다.
내 겉모습이 완전 다르게 변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결이 실크처럼 좋았고 굵은 웨이브가 져 있다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가장 다른 것은 눈동자 색. 평범한 고동색 눈동자가 아니라 짙은 자색의 눈동자를 가졌다는 거였다.
게다가 생김새는…….
악녀는 본디 예쁜 법이다. 아가사는 아주, 아주 예뻤다. 괜찮아, 유나야. 너 조금밖에 안 꿀려. 음, 아주 조금 많이?
아무튼 기특한 메리.
얘는 절대로 메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 준 목걸이를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잘 놀고 왔어?”
“깡!”
내 얼굴을 세수시켜 줄 기세로 핥는 메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신이 났는지 귀가 쫑긋 서 있었다. 메리의 꼬리가 붕붕붕 헬리콥터 날개처럼 움직였다.
오, 조금만 더 하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공작님.”
“응?”
엠마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엠마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바로 옆에 기거하는 데이먼 백작 가에서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엠마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무슨 불만?
편지 봉투를 즉시 뜯었다. 최대한 조용히 살기 위해서는 어떤 말썽에도 얽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향해 불만을 제기했다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음,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보호하고 있는 동물들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겠으니 ‘이 미친 짓을 그만두고’, ‘돈과 시간이 남아돈다면 사교계나 와서’, ‘내 아들과 맞선을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의 편지였다.
돌려 돌려 말하지만, 이런 거야 뻔하지. 사회생활 만렙을 찍은 내게 이런 돌려 까기 화법이 뭐가 어렵겠는가. 엠마가 내 눈치를 살폈다.
편지를 엠마에게 주고는 읽어 보라고 했다. 엠마가 편지를 읽고는 혀를 내둘렀다.
“파렴치하네요.”
“어째서?”
“맞선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아들은 데이먼 백작 가의 차남일 거예요. 장남은 이미 결혼했으니까요. 차남은 아주 호색한으로 소문이 나 있어요. 얼마 전에 케이트 자작 부인과 불륜설로 난리가 났었는데 이게 두 집안의 합의로 빨리 묻힌 일도 있었어요!”
엠마가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말했다.
반년 넘게 함께 해 보니 엠마는 꽤 괜찮은 소식통이었다. 하녀들에게는 하녀들만 통하는 네트워크가 따로 있다나?
그나저나. 그런 놈을 나한테 붙여 주려고 했다고?
“사실 공작님 자산을 탐내는 거죠. 정의롭지 못하게! 소문에는 숨겨 둔 아이도 있다고 하던데요?”
하핫.
이놈은 소금이 아니라 똥을 뿌려 줘야겠구만. 내 전 남친을 뛰어넘는 거대한 똥차였다.
“일단 소음이 일어날 수 있는 건 사실이니까 불만을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해야겠어. 그리고 맞선 이야기는… 다비드 경에게 맡기면 될까?”
“네, 그럼요! 원래도 그러셨는걸요! 그럼… 영지로 내려가실 준비를 할까요?”
맨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땐 영지로 내려가는 걸 고려했었다. 그리고 동물들을 거두게 되면서 더 그런 생각이 강해졌고. 그런데, 대부분의 귀족들이 수도에서 신수를 기르다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수도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기엔… 게다가 규모가 커졌잖아. 쟤들을 데리고 어떻게 며칠씩 걸려서 이동을 하겠어.”
“그러면요?”
“마법사를 불러. 방음 마법을 걸 거야. 저택 전체에.”
이 세계에는 마법사가 있었다. 다만, 마법사의 수가 현저히 적어서 국가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주고 마법을 사야 하는 형태였다. 약간 반공무원 같달까? 그래서 이렇게 필요할 때는 요청을 해야 했다.
“그게… 많이 비싸지 않을까요?”
물론, 공급은 적은데 수요는 많은 일이니 마법을 사는 것은 금액이 꽤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상관인데?”
내 손에는 끝없이 긁을 수 있는 블랙 카드가 들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깨어난 뒤로 내가 뭘 하면서 돈을 써도 통장 잔고는 끝없이 불어났다. 돈이 돈을 불러온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돈은 상관하지 말고 해.”
여유롭게 손에 든 다이아몬드 수저를 휘둘렀다.
엠마가 두 손을 모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마법을 부리는 요정 할머니 보듯 간절히 바라보며. 하긴, 돈은 종종 마법을 부리기도 하니까.
“네, 아가씨!”
이게 바로 플렉스지.
진정한 다이아몬드 수저의 삶이었다.
* * *
데이먼 백작이 슈타디온의 인장이 박힌 편지를 받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 발칙한 계집이 제 분수를 모르고 우리 제안을 거절하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오, 체이스.”
데이먼 백작이 자랑스러운 큰아들에게 받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체이스가 편지 겉면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고는 편지를 읽었다.
“설마, 슈타디온에 혼담을 넣은 겁니까?”
“맞다. 네 동생이 하도 저러고 돌아다니니 결혼이라도 시킬 요량이었지. 아마 죽은 네 어미도 좋아했을게다.”
“그래서 슈타디온을….”
“지금 슈타디온 공작의 옆자리를 놓고 사내들이 다 침을 흘려 대고 있지 않니. 거기에서 내가 구해 주려고 했던 거다.”
데이먼 백작이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슈타디온은 먹음직스러운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었다. 아가사가 기행을 일삼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슈타디온은 마르지 않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슈타디온의 이름값이라니. 슈타디온이 지금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가문인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슈타디온의 깃발이 꽂힌 땅에는 황실의 기사도 허락 없이는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슈타디온이 그간 이룩해 온 명예와 재물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데이먼 백작은 그것이 탐이 났다. 주제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아가사라는 계집애가 그걸 쥐고 있는 것도 배가 아팠다.
그래서 차남인 멜리슨을 보내서 그것을 틀어쥐려고 한 것이다.
데이먼 백작 가는 현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 덕에 이 비싼 땅 위에 타운하우스를 짓고 살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위상은 황후가 황자를 낳는 순간 급상승했다. 거기에 슈타디온만 더해진다면?
“이 혼사가 성립되면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만 되면 나엘 황태자를 제치고 우리 사일러스 황자를 황태자로 만들 수 있겠지. 황후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체이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아버지 말씀이 옳군요. 하지만, 멜리슨으로는 공작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슈타디온이 잘났다고는 해도 얼결에 공작이 된 계집일 뿐이고, 멜리슨은 이 데이먼 백작의 아들이야! 지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들을 무시할 수야 있겠느냐!”
“무시할 수 있지요. 아버지, 공작은 과거에 나엘 황태자의 약혼녀로 거론되었던 인물이에요. 사일러스 황자가 태어나면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황후가 분탕질을 쳐서 무산시킨 거였다. 사일러스가 태어난 마당에 나엘이 슈타디온이라는 패를 쥐게 놔두겠는가.
“게다가 멜리슨은 행실이 너무 바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니.”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그저 욕심만 부리는 데이먼 백작의 행동에 체이스가 경멸을 삼켰다.
황후, 로살린과 체이스는 어머니인 백작 부인을 닮았다. 백작 부인은 숨죽여 참고 있다가 기회를 잡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데이먼 백작은 돈을 쓸 줄만 알지 벌 줄은 모르는 인물이었다. 로살린이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어머니의 수완이 좋았던 덕분이었지 데이먼 백작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황제에게 사랑 고백을 받은 황후가 몇이나 되겠는가. 정략결혼도 아닌 무려, 연애 결혼이었다.
하지만, 임신만큼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황비가 둘이 들어오고 1황비가 나엘 황태자를 낳을 동안 로살린은 임신을 하지 못했었다.
데이먼 백작의 살진 얼굴을 응시하던 체이스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먼 백작이란 방패막이는 항상 필요한 법이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너는 결혼을 했잖아!”
“이 결혼도 이제 끝낼 때가 됐지요.”
체이스가 음습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