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5)화 (5/90)

#5화.

“너 소설을 너무 많이 봤네. 그거 그만 읽어. 좀 더 현실적인 걸 읽어야지.”

“현실적인 거요?”

“빙의나, 환생이나. 그런 거 있잖아, 왜.”

“그게 더 비현실적인 거 아니에요?”

그게 내 현실이야, 엠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기억을 되찾을 일은 없을 거라는 거지. 거기에 대체 뭐가 있길래 그래?”

나는 엠마가 하도 겁을 내길래 그 방에 황태자를 가둬 두기라도 한 줄 알았다.

아가사가 끝까지 간 거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나한테 떠넘긴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며 엠마가 이끄는 대로 비밀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툭.

“이, 이게 다 뭐야.”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기억을 되찾으신 건 아니죠? 다시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시게 되었다거나!”

“……소설 끊으라니까.”

비밀의 방 안은 나엘의 초상화로 가득 차 있었다. 초상화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엘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 이 스토커 같으니라고… 너 범죄야, 인마.

이런 걸 저택에, 그것도 내 방 옆에 버젓이 두고도 몰랐다니. 나엘이 이걸 알고 있었으면 이 저택을 불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소설에 언급된 적이 없었으니 아마 나엘도 몰랐을 것이다. 반드시 몰라야 한다. 이걸 나엘이 알게 되면 소름 끼쳐서라도 날 죽이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이, 이… 미친X.

“전부 불태워 버려. 하나도 남기지 말고. 여기에 있는 먼지 한 톨도 불태워 버려.”

“네, 공작님!”

엠마가 다행이라고 덧붙이는 동안, 나는 이렇게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광경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심각했던 거라면 나엘이 아가사를 싫어할 만도 했다. 상대가 바라지 않는 감정을 강요하는 것은 서로에게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가사는 뭐가 그렇게 외로웠을까.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황태자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할 만큼.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방 안의 물건들을 소각장으로 가져갔다. 그러던 중에 황태자의 웃는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발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손바닥 크기나 될까.

어린 시절의 모습인 듯했다.

나는 그것을 슬그머니 주워 들었다.

이거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되겠지.

이건 원래 아가사의 마음을 위로하는 차원이었다. 그 애가 황태자를 좋아했던 건 사실이었을 테니.

불쌍한 아가사.

너는 실제론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초상화 뒷장에 아가사의 풀 네임을 적어 일기장에 끼워 두었다. 그 애의 것이라는 뜻으로.

* * *

그 시각.

묵직한 고동색 원목을 바탕으로 지어진 방 안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둠과 잘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밀어 올렸고 콧잔등 위에 얹혀 있던 안경 너머의 적안은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남자가 서류의 표지를 덮어 내려놓았다.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서류에는 슈타디온과 황실의 관계뿐만 아니라, 아가사와 나엘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들의 역사는 서류철의 두께만큼이나 길었다. 그럼에도 나엘은 아가사와 결혼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건 하나.

아가사는 절대로 나엘에게 필요한 황후가 되어 주지 못하리라는 것! 이 년 전, 아가사와의 약혼을 깬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그런 남자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부르셨습니까?”

“아가사는 요새 조용하군. 어떻게 지내고 있지?”

나엘이 상상만으로도 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사는 나엘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아가사와의 인연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또래의 고위 귀족과 황족이 어울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울리던 고위 귀족 영애와 황태자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약혼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아가사와 나엘의 구두 약혼도 자연스럽게 깨지게 되었다. 아가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나엘을 찾아와 귀찮게 하던 아가사가 요새는 웬일인지 잠잠했다.

“요새도 저택에서 나오질 않고 계십니다. 다비드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기는 하셨습니다만.”

보고를 하던 수하가 눈을 반짝였다.

“비밀의 방에 있던 것을 전부 태우셨습니다.”

나엘이 멈칫했다.

비밀의 방에 대해서는 나엘도 알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물건들도.

아가사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엘과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즐겼다.

비밀의 방은 그것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나엘이 쓰던 손수건, 아가사와 나엘이 함께 갔었던 박물관에서 나눠 준 인형 등등.

나엘은 거기를 쓰레기통이라고 불렀다.

“……정말로 정신을 차린 건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모르겠군.”

나엘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요새 마물들의 침공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신수들이 있었던 옛날이야 그들이 제국을 수호했을 테지만 지금은 인간들만의 힘으로 제국을 지켜야 했다.

거기에 쓸 시간도 없는데 아가사가 귀찮게 하지 않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계속 지켜봐. 또 이상한 짓을 하면 보고하고.”

“예, 전하.”

수하가 물러가고 방 안에는 나엘만 남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으나 아니었다. 나엘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덩어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낑?”

나엘이 서늘한 눈빛으로 발밑을 내려보았다.

그러곤 책상 위에 있던 간식을 책상 밑으로 던져 주었다.

“히샤.”

나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강아지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 * *

비밀의 방 사건 이후, 나는 황태자의 흔적을 온 저택에서 지워 냈다. 굿이라도 하고 싶네. 어휴. 나의 뉴 라이프에 부정 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첫째로도 황태자를 피하고, 둘째로도 황태자를 피하는 거다.

그리고 다비드에 대해서 알게 된 것 중에 또 하나. 다비드는 아주, 매우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지 고작 3일 만에 인부들이 공작 가 안으로 들어왔다.

것 참, 일 똑 부러지게 하는구만.

“얼른 완성됐으면 좋겠다. 그렇지, 메리? 또리?”

“깡!”

“낑!”

각자만의 언어로 대답한 강아지들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후후훗, 기다려, 내 새끼들.

너희를 위한 파라다이스를 지어 줄 테니까.

정원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에게 달려온 것은 그날 오후 3시쯤의 일이었다.

“저 작자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공작님?”

“음.”

뭐가 문제지? 아주 잘하고 있는데. 엠마가 계속해서 정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상황을 체크해 주고 있었다.

공사는 순조로웠다. 한쪽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또 한쪽에는 바닥에 대리석을 깐 작은 수영장, 큰 수영장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시설들이 설치될 예정이었다.

“슈타디온은 역사가 아주 깊은 가문입니다. 그간 슈타디온은 그 명성과 체면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태껏 제가 그에 일조해 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정원사가 심각한 얼굴로 따다다 말했다. 모자를 말아 쥔 정원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여태 열심히 가꿔온 정원이 망가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복장이 뒤집히고 서글픔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이야기 같은데.

아, 이런 일은 보통 정원사하고 논의하고 해야 하는 일이었어……?

“내가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큼.

정원사가 눈을 크게 뜨고 얼음처럼 굳었다.

“지금, 지금 무슨 말씀을……?”

아, 앗차!

잠시 내 포지션을 잊을 뻔했다. 나 악녀였지. 이런 일로 사과를 할 리가 없잖아.

“물론, 나도 고맙게 생각해. 미안이 아니라 고맙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정원사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물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무례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공작 가를 위해서 제가 여태껏 가꿔 온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작님.”

가슴이 뜨끔 했다.

“이만 퇴직하겠습니다.”

정원사가 내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나로 인해서. 소시민이었던 내 가슴을 후려치는 말이었다. 퇴직이라니, 퇴직이라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는 나도 안다.

퇴직을 하게 되면 고정 수입이 사라진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적금과 보험, 그리고 내 대출 이자…….

아, 이게 아니지.

아무튼 간에 정원사 로드고의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다.

나로 인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막고 싶었다.

“물론, 로드고가 많이 속상한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일이 공작 가의 위신에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을 거야. 로드고가 돌봐야 할 정원은 아직도 넓으니까.”

“아니요, 공작님. 저는 아이를 돌보는 심정으로 정원을 돌봐 왔….”

“로드고의 노고는 잘 알고 있고 열심히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 상심한 것도 알겠고. 그래서 이렇게 보상금도 준비했는데.”

로드고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내가 내민 봉투를 확인했다. 종이 지폐가 들어 있는 봉투였다.

“이, 이건……!”

봉투가 얇다고 무시해선 안 되지. 백지 수표라고 들어는 봤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