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메리를 만난 것은 23살 크리스마스의 일이었다. 고아원에 살 적에 내가 뻔질나게 숲을 드나들었던 것은 전부 강아지 때문이었었다.
나중에 커서도 여력만 된다면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는데.
23살 크리스마스에 정처 없이 떠돌던 메리를 만났다. 그날은 믿었던 전 남자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날이었다. 나쁜 자식. 군대를 꼬박 기다려 줬더니 군화를 거꾸로 신어?
세상 인간 믿을 거 없다더니.
그놈 옆에 있던 새파랗게 어린 신입생을 떠올리며 길거리에서 눈물 죽죽 뽑고 있다가 메리를 발견했다.
‘깡!’
춥지도 않은지 코를 내게 부비던 작고 귀여운 메리를 말이다. 그때부터 나와 메리는 떨어진 적이 없었다.
“메리…….”
엠마가 나를 따라 중얼거렸다.
“까앙! 컁!”
“마음에 드나 봐요!”
엠마가 내 품에 안긴 메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데 엠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저는 그냥 공작님이 이렇게 멀쩡하신 것만으로도 좋아요. 공작님이 눈을 뜨고 계시고 저랑 이야기를 나누시고.”
엠마가 붕어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억에 관련된 이야기는 역시 숨기는 게 좋겠어요.”
“어째서?”
“다 저 같지는 않으니까요, 공작님.”
엠마가 별안간 내 손을 붙들었다.
“옛날에 공작님이 저를 구하고 지켜 주셨잖아요. 이젠 제가 공작님을 지켜 드릴게요. 약속해요. 엠마의 영혼을 걸고.”
영혼을 걸고.
이곳의 세계관은 특히 영혼을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영혼에 모든 기억과 추억이 깃들어 있으니 모든 생명의 정수라고.
그 모든 것을 거는 맹세야말로 가장 값어치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맹세하는 장면은 독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었다.
‘나는 당신이며, 당신은 또한 나라는 것을 잊지 않을게. 내 영혼을 다해 당신을 사랑해.’
그런 대사였었다.
나는 남자 주인공 대신에 엠마에게 비슷한 부류의 고백을 받은 것이다.
“고마워, 엠마.”
세상에 좋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살 만하다는데, 엠마 같은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살 만할 것 같았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으니 나도 좀 더 용감해졌다.
* * *
며칠 동안, 일단 이것저것 파악했는데 문제는 우리 메리를 위한 용품이 저택 내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다.
심지어 장난감까지도… 그리고 그것을 간과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내가 깨어나고 며칠이 지나자, 엠마와 저택의 사용인들이 갑자기 나타난 메리에게 적응한 것처럼 메리도 이곳에 금세 적응했다.
정말로 슈타디온에서 나고 자란 개처럼.
어느 정도였냐면 온갖 곳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메리 봤어?”
“아니요, 공작님.”
빨래 바구니를 들고 가던 하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메리 봤어?”
“아니요, 못 봤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개가 안 보일 때는 무조건 ‘안 돼!’를 외치라고. 그런데 이 넓은 저택에서 외쳐 봤자 들리기나 하겠냐고.
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 메리를 찾아 온 저택을 뒤지고 다니는데.
“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비명이 울렸다.
소란이 있는 곳에는 보통 털 뭉치들이 있는 법이다.
찾았다.
소란이 벌어진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거기에선 한 사람과 한 강아지의 대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노로 파랗게 질려서 바들거리고 있는 엠마와 태연한 낯짝으로 귀를 탈탈탈 긁고 있는 메리.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메리가 멈췄다.
“깡!”
그러고는 해맑게 짖으며 나한테 쪼르르 달려온 메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재롱을 부렸다.
“어어……. 잘 놀았어?”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고는 메리의 머리에 들러붙은 레이스 잔해들과 실밥을 털어 주었다.
오늘 메리는 드레스룸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낸 모양이다.
드레스룸 안에 있던 대부분의 드레스 밑쪽이 뜯겨 있었다. 바닥엔 그 잔해들이 널려 있었고 중간중간에는 반짝이는 돌들이 섞인 것으로 보아 보석도 예외 없이 뜯긴 듯했다.
“엠마……?”
엠마가 울먹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음.”
곤란하네. 엠마가 비명을 지를 만했다.
우리 강아지. 큰돈 해 먹었네? 저게 다 얼마람. 그나마 내가 돈을 물 쓰듯이 쓸 수 있는 것은 이곳의 화폐 단위와 한국의 화폐 단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많이 들 것 같은데.
현실 자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도토리처럼 알뜰살뜰 모아오던 적금을 깨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부르주아 아가사.
“분위기도 쇄신할 겸 다 새로 사야겠네.”
엠마가 코를 훌쩍였다.
“쇼핑하러 갈까?”
새로 사면 되지, 뭘 울고 그래.
“……여기에 있는 것들은 어떡할까요?”
“밑에만 손봐서 내놓는 건 어때?”
“공작님께서 입으시던 드레스를 파신다고요!?”
“그러면 보통 어떻게 하는데? 기억이 안 나서.”
뒷말은 엠마에게만 들리게 소곤거렸다.
“보관하죠!”
돈이 저택 안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구만. 드레스에 붙어 있는 보석들만 떼다 팔아도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이 저택 한번 날 잡고 뒤져 볼까? 다 내 거라면 처리하는 것도 내 것 아니겠어?
아니, 아니지!
너는 이제 달라졌다니까!
본캐인 소시민과 새캐인 다이아몬드 수저 사이에서 혼동이 오고 있었다.
“뭐,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고.”
상심한 엠마를 위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인들에게 드레스룸에 메리가 못 들어오게 철창을 치라고 할까? 요 정도 높이로 말이야.”
“……그럼 저택의 미관을 해치게 될 거예요.”
“그러어면…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지, 뭐. 얘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엠마, 그만 울어. 내가 메리한테도 들어가지 말라고 할게.”
큰 사고를 친 메리는 이미 모든 걸 잊은 얼굴로 태평하게 내 다리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졸리구나, 너.
* * *
메리의 드레스룸 습격 사건으로 우리는 대대적으로 쇼핑을 하게 되었다. 드레스 중에 살아남은 것은 몇 벌 되지 않았기도 하고,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메리를 위한 물건도 사야 했다.
“외출하실 준비를 도울게요. 이렇게 공작님이 쇼핑을 하러 가신다고 하시니까 일어나신 게 정말로 실감이 나네요. 그리고 외출을 하시면 기억이 돌아오실지도 모르죠!”
엠마는 금세 뜯겨진 드레스를 잊은 듯했다. 다행이네.
신나서 준비를 돕는 엠마를 바라보곤 메리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우리 메리, 엄마랑 장난감 사러 갈까요?”
“꺙!”
장난감이라는 이야기에 신난 듯 꼬리를 붕붕 돌리는 메리를 보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오구오구, 귀여운 내 새끼. 가자, 이 엄마가 널 위해 오늘 다 쏜다!
“아, 공작님! 도착했어요.”
엠마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스트리트였다.
“여기는 11번가예요. 마르소 거리에서도 가장 번화가죠. 여기엔 아직 신수 용품점이 남아 있어서 메리를 위한 물건들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네.”
내려가고 싶은지 낑낑거리는 메리를 안은 채로 거리를 걸었다. 얼른 하네스 같은 걸 찾아서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 팔려나.
하지만, 나와 엠마는 본의 아니게 용품점보다 다른 걸 먼저 발견했다.
“너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어!”
얼굴이 새빨개진 어린 귀족 영애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야니스 자작 가의 차녀이시네요.”
대체 그걸 다 어떻게 외우고 다니는 거냐. 마치 인물 검색 사전 같은걸. 나는 그걸 다 외우고 있는 엠마를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애가 소리를 빽빽 질러 댔다. 그 앞에는…….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고 흰 강아지가 있었다. 예전에는 예쁨받았던 듯 낡은 분홍색 리본을 매고 있었다.
“신수였다며! 신수라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도 안 지켜 주니?”
“끼잉…….”
“따라오지 마!”
지금 내가 실시간으로 반려동물을, 아니 반려신수를 유기하는 현장을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길을 오가는 사람들 중에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신수인 게 중요해? 어떻게 반려로 받아들인 동물을 저렇게 버릴 수가 있는 거지?
전생에서 애견 보호소에 봉사를 다닐 때만 해도, 키울 여력이 되지 않는 나는 강아지를 버리는 사람들을 욕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참을 필요가 없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재력과 힘이 있으니 말이다.
정의의 사도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엠마, 잠깐 메리 좀.”
엠마에게 메리를 안겨 주고 내가 나섰다. 여자와 그런 여자를 아무것도 모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졸졸 쫓아가는 강아지를 향해 다가갔다.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면 제가 데리고 가는 건 어떨까요?”
내 말에 당황한 듯 벙쪄 있는 어린 귀족 영애의 반응을 본 나는 내가 공작임을 깨닫고 속으로 소리쳤다.
정신 차려! 말투가 그게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