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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20화 (에필로그 완) (120/120)

에필로그 4화

로위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연미복은 아니어도 새카만 정장을 차려입은 킬리언이었다. 쓸어 올린 머리카락은 잔머리 하나 없었고 목 끝까지 올라간 넥타이는 금욕적이고 묘하게 야릇한 느낌이었다.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멀거니 서 있는 로위나를 향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가지.”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반쯤 넋을 놓은 로위나의 손을 힘주어 잡은 킬리언이 카펫으로 이끌었다. 걸음걸음마다 화관으로 장식한 램프가 일자로 놓여져 어두컴컴한 주변을 신비롭게 밝혔다. 주례대에 선 제레미와 가까워질수록 로위나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사흘쯤 전부터.”

“외삼촌과 다툰 건 그럼…….”

“당신 이목을 돌려야 했으니까.”

“……데미안도?”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한 킬리언은 얄미울 정도로 당당했다.

“앞으로 당신도 나도 점점 더 바빠질 거야. 내 눈이 완전히 좋아진다면 다시 한번 결혼을 해야 하고, 그땐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고위 귀족들과 외국 사절에게 둘러싸여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야 하겠지.”

“…….”

“생각나? 당신이 그 예전 기차에서 했었던 말.”

“너무…… 오래돼서 기억 안 나요.”

맞잡은 손이 뜨끈했다. 눈을 내리깐 로위나에게 킬리언이 속삭였다.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했었지.”

“킬리언…….”

“그걸 이뤄 주고 싶었어.”

그땐 그저 시골 아가씨다운 소원이라 생각했었다. 귀족에겐 결혼마저 집안끼리 결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수단일 뿐이니까. 더불어 당시 그에겐 소중한 사람이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되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이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그랬었죠…….”

뒤늦게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로위나가 문득 떠오른 한 사람 때문에 불쑥 눈을 크게 떴다.

“데미안은…….”

“로위나.”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제레미가 그녀를 불렀다. 못마땅한 얼굴로 킬리언을 흘깃 곁눈질한 제레미가 들으란 듯 제안했다.

“솔직히, 난 아직도 이 결혼은 반대다.”

“외삼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비록 이미 신 앞에 맹세했다 한들, 상관없다. 당장이라도 엎겠다고 한다면 같이 이곳을 나가 주마. 마차도 준비했다.”

다툼은 일부러 연출한 거였다고 해도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 일을 공조했을까 싶을 정도로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시선은 살벌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냉기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로위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떻게 중재할지 고민하는 사이, 대뜸 단호한 말이 옆에서 들려왔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뭐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제레미에게서 시선을 옮긴 킬리언이 로위나를 바라봤다.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 안에 무엇보다 뜨겁고 집요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킬리언…….”

“내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부부를 물끄러미 쳐다본 제레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차가운 질문에 킬리언이 로위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만약 내가 당신 질녀를 또다시 상처입힌다면, 그땐 당신이 날 쏴 죽여도 됩니다. 설령 그런 상황이 온다면 당신에겐 그 어떤 죄도 묻지 않겠습니다.”

놀란 하객들이 숨을 들이켰다. 명예가 최고의 가치인 귀족에게, 그것도 고위 귀족에게 이름을 건다는 건 전부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간내기가 아니군.”

대답이 마음에 든 제레미가 씩 웃는 순간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로위나가 끼어들었다.

“안 돼요.”

“로위나?”

숨죽여 세 사람을 지켜보던 하객들도 로위나의 말에 얼어붙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로위나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내 권리에요.”

“…….”

제레미에게서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검지로 킬리언의 가슴을 꾹 밀었다.

“예전처럼 내게 상처 준다면, 당신은 내가 죽일 거예요. 진심으로요.”

싸늘한 정적이 식장에 흘렀다. 로위나의 돌발 행동에 놀란 건 킬리언도 마찬가지인지 드물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누군가의 웃음이 터져 나온 건 몇 초 뒤였다.

“풉…… 푸하하하하!”

“외삼촌?”

“하하하! 하…….”

예상치도 못한 외조카의 반격에 배를 움켜잡은 제레미가 겨우겨우 웃음을 그쳤다.

“그래. 그렇게 하렴. 네 말을 들으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구나.”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레미가 약속했다.

“언제든 말만 하렴. 총은 내가 아주 잘 드는 걸로 구해 줄 테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직접 총을 쥐여 줄 테니까.”

“하하, 내 조카사위는 그것참 믿음직스럽군.”

기껏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다시 한번 기 싸움이 벌어지려는 때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죽어요?”

“데미안!”

새하얀 맞춤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데미안이 품 한가득 꽃다발과 반지함을 들고 뒤에 서 있었다.

“당연히 농담이지. 고맙다, 데미안.”

순진무구한 질문에 부드럽게 대꾸한 킬리언이 아들에게 꽃다발과 반지함을 건네받았다. 약속된 절차에 흠흠, 헛기침을 한 제레미가 주례를 시작했다.

“틀에 박힌 주례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만 묻죠.”

“물어보시죠.”

“킬리언 맥시밀리안 데본셔. 록포드의 공작 저하. 방금 한 맹세를 평생 지키겠습니까?”

“전부를 걸고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로위나 필로네. 내 사랑하는 조카.”

이만하면 만족한다는 듯 빙긋 웃은 제레미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로위나를 불렀다.

“네.”

“앞으로 데본셔 공작 부인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단다. 아무리 신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절대 바뀌지 않는 세상은 있으니까. 그게 바로 지금 네가 선 자리고.”

이미 신 앞에서 맹세한 순간 돌이킬 수 없었다. 로위나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각오도 했고요.”

이 자리에 서기까지 자신을 덮쳤던 시련을 기억했다. 많은 오해와 갈등과 절망과 슬픔이 있었다. 몇 번이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이나.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만약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더라면 데미안도 없었을 테고 지금 이 순간도 없었을 테니까.

“그럼 신께는 이미 맹세했으니…….”

로위나의 흔들림 없는 눈을 확인한 제레미가 주례를 끝맺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합니다.”

엉거주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하객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쉬움과 기쁨, 그리고 씁쓸함이 오가는 얼굴들을 로위나는 슥 훑었다.

“로위나.”

고마움을 담아 한 명씩 눈으로 인사하는데 킬리언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로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지는 예배당에서 이미 주었잖아요.”

“그건 이전에 한 번 주었던 거지.”

기만과 어긋남 속에서 받았던 반지였다. 일을 벌이기 전, 방에 놓아두고 떠났었던.

“이건 내가 새로 만들게 한 거야. 당신을 위해.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5캐럿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붉은 기를 띈 다이아몬드였다. 심플한 디자인이 보석의 아름다움을 더 강조했다. 홀린 듯 반지를 내려다본 로위나가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사이, 로위나가 기존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낸 킬리언이 새로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웠다. 딱 맞게 들어가는 반지는 로위나의 희고 긴 손가락과 어울렸다.

흐트러진 금발을 귀 뒤로 넘겨 준 킬리언이 속삭였다.

“날 용서해 줘서 고마워. 로위나.”

“…….”

“당신을 사랑해.”

행동으로 시선으로 말해 준 적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그것도 이리 사람들 앞에서는 처음 듣는 고백이었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을 숨기려 슬며시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짐짓 매정하게 반응했다.

“누가 당신을 용서했대요? 이전에 당신을 떼 내려고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그런가.”

침묵도 잠시, 납득한 건지 킬리언이 순순히 대꾸했다.

“그럼 말을 바꾸지.”

“무슨.”

“날 받아 줘서 고마워.”

호기심에 다시 고개를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턱을 잡혔다. 원한다면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로위나의 속내를 다 읽어 낸 듯 의기양양하게 웃은 킬리언이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당신이 날 죽이지 않게 최선을 다하지.”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잡아먹을 듯한 키스도, 욕망만 가득한 키스도 아니었다. 허락을 구하듯 아랫입술을 깨무는 킬리언의 입술을 로위나가 한 손으로 막았다.

“그럼 일단 안약 꼬박꼬박 넣어요. 귀찮아하지 말고.”

“그러지.”

“수술도 가능해지면 일정 넉넉하게 잡아요. 바쁘다고 이틀 쉰다던가 하면.”

“로위나.”

인내심이 닳은 듯 지긋이 내려다본 킬리언이 미소 지었다. 목줄이 당장 끊길 것 같은 불안감에 로위나가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 앞이라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다음은 밤에…… 아!”

눈앞이 휘청하더니 공주님처럼 넓은 품에 안겼다. 귓가에 더운 숨이 닿았다.

“지금이 저녁이야.”

“여기까지 와 준…….”

“인사는 나중에.”

“데미안도 있…….”

“충분히 이해할거야.”

또다시 말허리를 끊은 킬리언이 아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피식 웃은 로위나가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에필로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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