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데미안과 로위나는 평민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수행하는 인원 또한 경호를 겸해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 한 명만을 동행했다. 공작령 안이라 안전한 데다가 시장엔 사람들이 많아 위험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엄마! 이거 봐요!”
킬리언의 앞에서는 쭈뼛쭈뼛하며 호칭을 바꾸던 데미안이 다시 익숙한 호칭으로 로위나를 불렀다. 빙긋 웃은 로위나가 아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작은 울타리 안에 새끼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쭈그려 앉은 아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데미안이 홀린 듯한 눈으로 토끼를 쳐다봤다.
“두 마리 데려갈 거니 잘 골라 봐.”
“알았어요!”
로위나의 말에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최대한 집중해서 토끼 한 마리 한 마리를 관찰했다. 금방 고를 줄 알았지만 삼십여 분이 지나고 아이들이 대부분 일어난 뒤에도 데미안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결국 몰래 뒤에서 따라오던 수행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쩐지 오래 걸리실 것 같군요. 마님, 저 의자에 좀 앉아 계시겠습니까? 마실 것을 사 올 테니.”
“그래 주실래요?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가볍게 묵례한 경호원이 음료를 사기 위해 멀어졌다. 로위나는 데미안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앉았다. 북적이는 시장에는 나이 차가 나는 형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와 젊은 연인,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아이를 안고 나온 부부 등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흥미로운 얼굴로 행인들을 관찰하던 로위나의 옆에 친구로 보이는 여자 세 명이 앉았다. 로위나는 모자를 아래로 내려 얼굴을 더 꼼꼼히 가렸다. 그런 다음 데미안을 계속 바라보는데 벼락같이 어느 대화가 귀에 꽂혔다.
“그 이야기 들었어? 저하가 결혼하셨다는 이야기.”
“뭐? 말도 안 돼. 어처구니없는 소문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사촌 중 한 명이 공작저에 식료품을 배달하거든? 그런데 거기서 식료품을 나르던 중 웬 못 보던 여자 뒷모습을 봤대.”
“뭐? 정말이야?”
“그럼 되게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대. 먼발치서도 그건 확실했대.”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아무도 몰래 비밀리에 진행한 식이었다. 거기다 공작저의 고용인들 모두 2대, 3대에 걸쳐 충성 서약을 한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었다. 공작 부인이란 자리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높은 자리였고 언제까지나 공석이어서는 안 되니까.
다만 두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킬리언의 시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그녀는 공작 부인이란 막대한 중책을 조금씩 배워 나가는 중이었다.
“친척이나 그런 거겠지.”
약간의 정적 후에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여자가 끼어들었다.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안 그래? 공작저에 있던 여자라고 다 공작 부인이겠어? 뭐. 비밀리에 교제하는 여성일 수도 있는 거고.”
“그, 그건 그렇지. 몇 년간 아예 여자 소식이 없다 보니 낯설어서.”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불경죄로 잡혀가기 싫으니까.”
언제 속닥거렸냐는 듯 그 말을 기점으로 세 여자가 화제를 바꿨다. 안도하던 로위나의 눈에 때마침 음료를 사러 갔던 수행원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 * *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데미안은 보물을 껴안듯 작은 토끼를 꼭 껴안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토끼 골라서 기분 좋아?”
“응!”
“두 마리 고르라고 했는데 왜 한 마리만 골랐어?”
“얘만 눈에 띄었는걸.”
데미안이 품에 안은 토끼는 열 마리가 넘는 토끼 중 가장 왜소하고 힘이 없는 토끼였다. 다른 토끼들이 형제들하고 이리저리 장난치는 가운데 혼자 구석에 박혀 덜덜 떨고 있었다.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로위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데미안은 또래보다 더 의젓하고 성숙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아끼고 사랑하는 애완동물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작고 순수했다.
고민은 이튿날까지 이어졌다. 로위나의 고민에 대해 킬리언은 짧고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혹시 모르니 똑같은 걸 준비하지.”
“알아차릴지도 몰라요. 데미안이 얼마나 똑똑한데.”
“전국을 뒤져서라도 똑같은 걸 찾아내면 되겠지.”
남이 하면 농담이지만 그가 입 밖에 낸 순간 사실이 되어 버렸다. 로위나가 말문이 막힌 사이, 소매의 단추를 모두 잠근 킬리언이 힐긋 그녀를 돌아보곤 덧붙였다.
“유능한 수의사를 데려와도 죽은 동물을 되살려 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건 그렇죠.”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가차 없는 태도에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로위나의 눈치를 본 제녹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도련님이 잘 보살펴 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제녹 씨.”
고맙다는 인사 대신 로위나가 살짝 묵례했다. 웃음으로 화답한 제녹이 문을 열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다녀오지.”
몸을 돌린 킬리언이 로위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공작저를 비울 때마다 반복되는 의식이었다. 처음에는 낯간지럽고 어색해서 몸이 굳었지만 반복되니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다녀와요.”
남편의 옷매무새를 고쳐 준 로위나가 킬리언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마님.”
마차가 도개교를 건너는 것까지 확인한 로위나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서류를 한 묶음 안은 집사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로위나가 옅게 웃었다.
“수업 시작이군요.”
공작 부인으로서 할 일은 해도 해도 넘쳤다. 노련한 집사가 자잘한 일을 맡아서 처리해 주기는 해도 큼지막한 성안 살림이나 다른 유력가와의 교류에 관해서는 오롯이 로위나의 몫이었다.
로위나의 공작 부인으로서의 업무는 일단 이 나라의 고위 귀족 연감을 전부 보고 외우는 것이었다.
킬리언이 그간 쌓아 온 영향력과 권력으로 반강제로나마 여왕의 혼인 승인을 받아 냈다고 하지만, 로위나가 앞으로 직접 부딪히고 상대하게 될 사람들은 다른 고위 귀족들이었다. 후에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공작 부인으로서 입지를 쌓아 나가려면 그들에 대해 파악하는 건 필수였다.
“오늘은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님.”
“아니에요. 많이 미숙한데 도와주어서 감사해요, 집사님.”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 따라와 주시고 계신걸요.”
서류를 정리한 집사가 겸손한 제자이자 다정한 주인마님인 로위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었다.
인사치레처럼 말했지만 칭찬은 사실이었다. 남들이라면 하루 한두 장이나 겨우 외울까 싶을 정도의 빼곡한 귀족 연감을 로위나는 하루에 다섯 장을 외워 나갔다. 더불어 이전에 잠시 맡은 적 있는 성안 살림에 대해서도 큰 어려움 없이 하나둘 배워 나갔다. 이대로라면 일 년 후엔 모든 살림을 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 할까요?”
“괜찮아요. 그보다 데미안은 뭐 하고 있나요? 수업은 끝났을 텐데.”
“아, 그게 잠시 제레미 님과 나가셨습니다.”
“혹시 호수는…….”
“아닙니다. 수행원을 붙여 보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믿음직스러운 집사의 말이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미심쩍었다. 한 번 결심한 건 웬만해선 무르지 않는 외삼촌의 성격상, 킬리언의 반대가 있었다 한들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으니까.
“토끼 사료를 사러 간다시더군요. 하인을 보내 사 와도 되는데 직접 보고 고르고 싶으시다고…….”
“……그런가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결국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호수가 보이는 발코니의 유리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공기가 공단처럼 부드럽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전에는 감옥처럼 느껴졌던 공작저가 이제는 아름답고 편안한 집이 되었다. 무구한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무수히 바뀌어도 그 자리 그대로 우뚝 서 있는 성이었다. 이 성에 시집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우고, 이 성에서 눈을 감은 역대 공작 부인들처럼 그녀 또한 이곳에서 언젠가 평온하게 영면에 들리라.
사색에 잠겨 눈을 감고 있는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로위나를 깨웠다. 뒤를 돈 로위나가 들어오라 대답하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마님!”
노크를 한 사람은 그녀의 잔심부름을 맡고 있는 어린 시종이었다. 믿을 만한 가신의 차남인데다 똑똑하고 성실해서 데미안의 좋은 말벗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니?”
“지금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빨리요!”
“뭐?”
땀으로 범벅이 된 시종이 새파래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요!”
* * *
시종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공작저의 작은 숲이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사유지인데다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 있어 해 질 녘임에도 숲은 어두웠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로위나는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참다 참다 뭐라 입을 열려는 때였다.
“대체 어디까지…….”
“저기 보세요!”
갑자기 우뚝 멈춰 선 시종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여긴…….”
눈앞에는 마치 요정의 결혼식장처럼 꾸며진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화려하게 흐드러진 연보라색 등꽃이 통로처럼 아치형으로 감싼 가운데, 길고 붉은 카펫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하객석이 놓여 있었다. 맨 앞으로는 주례대가 보였다. 그 주례대 뒤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외삼촌?”
그뿐이 아니었다. 넓은 간격으로 놓인 양측 하객석에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로렌, 백작 부인, 세드릭, 헤리엇과 그 남편까지.
“모두…….”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어쩌면 다시 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데 모여 있으니 울컥 눈물이 났다.
선물처럼 놓인 상황에 로위나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로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