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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18화 (118/120)

에필로그 2화

“……안약?”

“원래 지금 안약 넣을 시간이잖아요!”

킬리언이 주춤한 사이 그를 밀어내고 엉거주춤 일어난 로위나가 협탁 서랍을 뒤졌다.

“여기 있다. 앉아 봐요.”

로위나의 지시에 짧게 한숨을 쉰 킬리언이 순순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나를 올려다봐요. 눈 깜박이면 안 돼요.”

바뀐 분위기에 내심 안도한 로위나가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젖히게 했다. 그대로 그의 양쪽 눈에 안약을 한두 방울씩 떨어뜨리려는데, 슬금슬금 허리를 휘감은 손에 얼어붙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다 흘리겠어요.”

“그래도 참아 봐. 나도 참고 있으니까.”

무엇을 참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재회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귀국하고 정식으로 결혼하기까지. 킬리언은 로위나가 원하지 않는 한 그저 유혹할 뿐 잠자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깊어지는 스킨십과 밀어붙임에 그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싫은 건 아니지만, 워낙 오랜만이라 부끄럽고 어색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결국 체념한 로위나가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잡아 위를 향하게 고정시킨 뒤 다른 한 손으로 안약을 조심스레 기울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단 한 순간도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 눈빛에 로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순히 제 의도에 따르는 그가 제단에서 순종적으로 제 몸을 바친 제물 같다가도, 이렇게 집어삼킬 듯한 눈으로 바라볼 때면 수풀 속에서 언제 어떻게 먹잇감의 숨통을 끊을지 기다리는 맹수 같았다.

“……됐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왼쪽 눈에 안약을 넣은 로위나가 바로 다음 눈에 안약을 넣으려 그의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렸다.

눈을 깜박인 킬리언이 그녀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두 방울 넣는다는 게 모르고 더 많이 떨어뜨렸는지 눈을 깜박이는데 남은 안약이 뺨을 타고 한 줄기 흘러내렸다. 흠결 없이 대리석 같은 볼 위로 흐르는 게 마치 눈물 같았다. 당황한 로위나가 그의 턱을 잡은 손을 놓았다.

“미안해요. 잠시만…….”

손수건으로 그의 뺨을 닦으려는데 손목을 붙잡혔다. 멀뚱히 눈을 깜박이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핥아요.”

“……네?”

“괜찮아. 인체에 무해하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귀를 의심한 것도 잠시, 이번엔 도리어 로위나의 얼굴이 잡혔다. 그녀의 얼굴을 훅 제게로 끌어당긴 킬리언이 재촉했다.

“어서.”

“…….”

야릇한 분위기가 될 때마다 제레미가 난입하고, 요 며칠간 킬리언의 속을 살살 긁어 놓는 바람에 그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기분을 제게는 숨기려 했으나 알게 모르게 살얼음 같은 공작저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로위나가 결심한 듯 혀를 내밀었다. 매끈한 뺨을 핥자 물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액체가 느껴졌다. 겨우겨우 안약을 핥은 로위나가 얼굴을 물렸다.

“……됐…… 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입술이 다가왔다. 홱 몸을 뒤로 물린 로위나가 두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안 돼요.”

“…….”

“……안약 다 넣고.”

아쉽고 기대되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홧홧해진 얼굴로 시선을 떨군 로위나가 작게 속삭였다.

“커튼은 물론 다 치고…….”

“……그러지.”

잠긴 목소리로 대꾸한 킬리언이 그녀를 붙잡으려 뻗었던 손을 거뒀다. 다시 다가가 그의 뺨을 잡은 로위나가 오른쪽 눈 위로 안약을 기울였다. 똑똑 떨어진 안약에 킬리언이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부채처럼 퍼진 속눈썹 아래로 흡수되지 못한 약간의 안약이 방금처럼 흘러내렸다. 옷소매로 그것을 닦아 낸 로위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번에 울지 않았어요?”

“…….”

얼굴 위로 떨어졌던 뜨거운 액체. 그때는 경황이 없어 무엇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 눈물이었다.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조차 안 되는 모습이었는데, 방금 그의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분명…….”

“그보다.”

로위나의 말허리를 끊은 킬리언이 털썩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제 밑에 눕혔다. 순식간에 다시 침대에 누운 로위나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대로 몸을 돌리는데 어깨가 잡혀 다시 위를 보고 누웠다.

“커튼…… 닫아야 하잖아요.”

“대신 침대 휘장을 닫지.”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요?”

“눈치 빠른 집사가 잠글 거고.”

“…….”

“더 할 말은?”

서늘한 손끝이 목을 쓸어내렸다. 닿은 피부마다 열이 올라 뜨끈했다. 나직한 숨결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킬리언이 안절부절못하는 로위나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손 치워.”

명령조였으나 부드러운 어조였다. 숨을 크게 들이켠 로위나가 새빨개진 제 얼굴을 드러냈다.

안간힘을 다해 따라잡은 기차에서의 약속을 킬리언은 지켰다. 귀국한 이후,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일까지 웬만해선 모두 그녀의 의견을 따라 주었고 성안 사람들이 눈을 비빌 만큼 그녀 위주로 행동했다. 그렇게 길들여진 맹수처럼 구는 이 남자가 유일하게 제 목줄을 거두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였다.

이대로 다시 주도권을 뺏길 순 없었다. 어떻게 손에 넣은 목줄인데.

“……로위나.”

“잠시만요.”

목덜미에 입을 맞춘 킬리언이 드러난 그녀의 쇄골을 매만졌다.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는 때, 크게 결심한 로위나가 몸을 홱 모로 돌려 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잡지 말아요.”

그리고 자신을 다시 제 아래로 깔려는 킬리언에게 명령했다.

“내가 위에요.”

“…….”

그의 어깨를 잡은 로위나가 방금 자신이 누웠던 것처럼 천장을 보고 눕게 했다.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며 그의 배 위로 올라탔다. 로위나가 슬그머니 제 허리를 만지려는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만지지 말아요. 가만히 있어요.”

“미치겠군.”

“잡는 순간 난 침대에서 나갈 거예요.”

당돌한 말에 코웃음 친 킬리언이 슬쩍 이를 드러냈다.

“내가 안 놓아준다면?”

“놓아주겠죠. 영원히 금욕할 게 아니라면.”

“…….”

“눈도 다 안 나았잖아요. 그러니 내가 리드할게요.”

그의 완패였다.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인 킬리언이 패배를 선언했다. 달래듯 그의 뺨을 한 번 쓰다듬은 로위나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목깃을 하나둘 풀어 내려갔다. 긴장 속에서 세 번째 단추쯤 풀었을 때였다.

“벗기는 데만 한 시간 걸릴 것 같은데.”

비아냥에 발끈한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단단하고 굴곡 있는 복근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킬리언이 앓는 듯한 숨을 토했다. 그러고는 당황해 손을 치우려던 로위나를 도발했다.

“사슴 같군.”

“……뭐라고요?”

“저 멀리서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놀라서 도망치는 사슴 같다고.”

울컥한 건 한순간이었다. 약이 오른 로위나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문득 꾹 다물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힘을 준 턱도. 동시에 뭔가 묵직한 게 둔부 아래로 느껴졌다. 깨달음을 얻은 로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알겠다. 지금 일부러 날 도발하는 거죠?”

“…….”

“그래서 이 상황을 벗어나 주도권을 잡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정곡을 찔린 킬리언이 대답 대신 그녀를 노려봤다.

“안 통해요.”

또박또박 응수한 로위나가 몸을 아래로 숙였다. 긴 금발이 폭포처럼 내려와 그의 뺨을 스쳤다. 차라리 안 보고 말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린 킬리언이 시선을 피했다. 장난기가 돋은 로위나가 불쑥 요구했다.

“입 맞춰 달라고 부탁해 봐요.”

“……뭐?”

희번덕거리는 눈이 잡아먹을 듯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전이라면 겁을 집어먹고 이쯤에서 물러서든가 항복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빙긋 웃은 로위나가 도리어 여유 있게 속삭였다.

“제발 입 맞춰 달라고, 부탁이라고 애원해 봐요. 저번에 내 발에 입 맞췄던 것처럼.”

팽팽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넓은 침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킬리언이 뭐라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방문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뒤늦게 정신이 든 로위나가 허겁지겁 그의 위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아내의 어깨를 단단히 껴안은 킬리언이 반격하듯 웃었다. 소름이 쫙 끼친 로위나가 안간힘을 쓰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무반응에 그대로 멀어지나 싶었던 상대는 의외로 강적이었다.

“엄마!”

“……데미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긴장감이 맥없이 탁 풀렸다. 킬리언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난 로위나가 도망치듯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뛰어든 데미안이 로위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환하게 웃은 데미안이 침대 쪽을 발견했다.

“아버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데미안이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엄…… 아니 어머니, 왜 얼굴이 새빨개요?”

편하게 반말하던 데미안이 깍듯하게 존대하기 시작한 건 킬리언이 엄하게 훈육한 결과였다.

“아.”

로위나가 손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니?”

“잊었어요? 우리 같이 토끼 사러 가기로 했잖아요.”

“맞아! 그랬지. 깜박했네. 미안해.”

번뜩 떠오른 약속에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아들의 어깨를 잡아 복도 쪽으로 돌렸다.

“어서 가자.”

“응.”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문이 닫히기 직전 흘깃 방 쪽에 눈길을 던졌다. 눈이 마주친 부자가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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