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왕진 가방을 마부에게 건넨 의사가 결론을 말했다.
“당장 수술은 불가능하고 꾸준히 약물 치료와 안약을 병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숨죽이며 의사의 이야기를 들은 로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회복될 가능성은 얼마나 있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반반입니다.”
“반반……이요.”
“일찌감치 치료를 받으셨다면 좀 더 확률이 높았을지도 모르죠.”
“…….”
“지금으로선 예후를 지켜봐야 합니다.”
담담한 대답에 로위나는 침음을 삼켰다. 함께 의사를 배웅 나온 제녹이 끼어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료비는 이미 비서를 통해 받았는데요.”
제녹이 내민 봉투에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매번 먼 길을 출장 오시니 더 보태 드려야죠.”
빙긋 웃은 제녹이 의사의 외투 주머니에 두툼한 봉투를 넣었다. 일종의 입막음비였다. 주치의가 따로 있음에도 의사를 구태여 먼 곳에서 데려오는 것도.
“이거 참…….”
결국 못 이기는 척 받아 든 의사가 마차에 올라타고, 마차 문을 닫은 마부가 고삐를 휘둘렀다.
동시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도개교가 올라갔다. 마차가 긴 다리를 모두 건너고 도개교가 다시 올라갈 때까지 로위나는 멍하니 마차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한 시간이고 계속 서 있을 기세에 제녹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역시 귀국하는 건 무리였을까요?”
꼼짝도 안 하고 닫힌 도개교를 바라보던 로위나가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제녹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계속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반쯤 자포자기한 킬리언이 치료를 거부했기에 제아무리 소문난 명의라 해도 그를 고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서 괜찮아지면 좋을 텐데.”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근심 어린 얼굴에 제녹이 그녀를 다독였다.
“좋아지실 겁니다. 이제 공작 부인께서 옆에 계시니까요.”
정식으로 신에게 맹세하고 혼인 서약서를 쓴 건 불과 열흘 전이었다.
킬리언의 상태도 있고 로위나가 외부에 노출돼 정적의 표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결혼식은 귀국하자마자 공작저의 예배당에서 치러졌다. 그를 포함한 단 두 명의 하객이자 증인 앞에서.
또 다른 한 명의 증인은 성안에 있었다. 제녹의 위로에 로위나가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하녀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마님?”
“무슨 일이죠?”
상념에서 빠져나온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우물쭈물 하녀가 입을 달싹였다.
“손님께서…….”
* * *
거칠게 짐을 트렁크에 구겨 넣은 제레미가 씩씩댔다.
“너도 제정신이 아니고 공작도 제정신이 아니야.”
“외삼촌.”
“내가 미쳤다고 증인을 섰지. 또 너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건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야 제가 알죠.”
한숨을 푹 내쉰 로위나가 문 앞을 막아섰다. 외투를 걸치고 트렁크를 들고 나가려던 제레미가 조카 앞에서 결국 속을 털어놨다.
“아니. 내가 친척 할아버지로서 조카 손자랑 물놀이하는 것도 안 되냐?”
“물……놀이요?”
뜻밖의 단어에 로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제레미가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이 주변이 넓은 호수라서 좀 데리고 수영도 가르치고 물놀이도 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서는 공작놈이 날 부르는 게 아니냐.”
“하…… 외삼촌…….”
이제 겨우 이 상황이 이해가 갔다. 로위나는 일단 제레미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았다.
“로위나!”
“일단 제 얘길 들어 보세요. 제 잘못이네요.”
“뭐?”
“데미안이 귀국하기 전에 호수에서 익사할 뻔했었어요. 거의 죽다 살아났고요.”
청첩장과 더불어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에 제레미는 길길이 날뛰었다. 부리나케 이곳으로 오기는 했으나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서는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제레미는 죽을 고비를 해치고 겨우겨우 탈출했는데 미쳤다고 다시 그 성에 돌아가느냐고 힐책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장이라도 제 손을 잡고 돌아가려는 제레미와 그런 그를 매섭게 바라보는 킬리언이 충돌했다. 두 남자 사이에 서서 로위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전부 이야기하려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했기에 데미안이 호수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은 생략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리 말을 하지!”
“죄송해요. 저도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바로 결혼식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어디 가세요?”
트렁크는 이미 제 손에 있는데 외투를 벗은 제레미가 그녀를 지나 문을 열었다. 다시 외삼촌을 붙잡은 로위나가 재차 물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다시 네 남편에게 간다.”
“……왜요?”
외삼촌의 성격상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거나 사과할 리는 없었다. 그건 킬리언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은 결코 맞닿지 않은 평행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자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까지고 물을 무서워할 수는 없지 않으냐? 아들을 겁쟁이로 키울 것도 아니고. 극복해야지. 그걸 말하러 가야겠어.”
“다시 호수로 데려가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 일단 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지.”
“외삼촌!”
기겁한 로위나가 제레미를 뜯어말렸다.
“데미안은 아직 물을 무서워해요. 씻을 때 욕조를 쓰는 것도 싫어할 정도라고요.”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그 공포증을 해소해야 할 것 아니냐. 방치할 셈이야?”
“그건!”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로위나가 주춤할 때였다. 서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끼어들었다.
“아이는 부모 관할이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여보.”
언제 왔는지 로위나의 손을 잡은 킬리언이 그녀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제레미가 따라잡을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서재로 이끌었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로위나는 등 뒤에서 세게 끌어안겼다.
“킬리언……?”
“기다렸잖아.”
가녀린 어깨에 턱을 얹은 킬리언이 왼쪽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에 왼쪽 귀부터 시작된 열기가 뺨, 목덜미까지 번지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로위나가 그의 손을 풀려고 허리에 손을 갖다 댔다.
“외, 외삼촌이 짐을 싸신다고 해서. 미안해요.”
“미안해할 것까진 없어. 저 늙은이가 떠나 준다는데 뭐가 문제지?”
“킬리언!”
손을 거두기는커녕 더욱 힘을 주어 허리를 휘감아 안은 킬리언이 그녀의 목덜미에 쪽 입 맞췄다. 헉, 짧게 숨을 들이켠 로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밀어냈다.
“그는 내 하나뿐인 혈육이에요.”
“당신 가족은 나랑 데미안이지.”
“그런 말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다시 마음이 통한 이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레미는 날 키워 주신 분이에요. 내 부모님과 다를 바 없다고요.”
“그러니까 참고 있잖아.”
“…….”
담백한 대꾸에 로위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킬리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결혼도 비밀리에 한데다 신혼여행까지 생략됐다. 대신 성에서라도 자주 단둘이 있고 싶어 했던 킬리언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제레미의 방해로 가로막혔다.
―로위나! 찾고 있었다. 이리 오렴.
―로위나! 여기 이것 좀 봐 볼래?
―로위나!
부부가 야릇한 분위기가 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제녹을 비롯해 하인과 하녀들이 가로막았으나 공작 부인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외삼촌이라는 점 때문에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못했다. 킬리언의 미온적인 태도 또한 단단히 한몫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읍.”
“그만.”
살기 등등한 말을 내뱉으려는 얼굴에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린 로위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더 말하지 말아요. 다시 말하지만 내 외삼촌이에요. 당신 아내의 핏줄.”
대답 대신 킬리언이 제 입을 막은 손을 스윽 내리고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
“명심하지. 하지만 당신도 하나 알아 둬야겠어.”
“킬리언!”
“난 당신 남편이야.”
작게 잇자국이 난 검지를 혀로 핥은 킬리언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아내를 내려다봤다. 뒷걸음질 친 로위나가 시선을 피했다.
“여신처럼 모시겠다면서?”
“침대 위에서는 아니라고 했지.”
이를 드러낸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위압감에 로위나가 더듬거렸다.
“아, 아직 침대 위는 아니잖아요.”
“그럼 모셔다드리죠.”
“꺅!”
팔을 뻗은 킬리언이 순식간에 로위나를 공주님 안 듯 안아 올렸다. 당황한 로위나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아, 아직 벌건 대낮이에요!”
“잘됐군. 밤이면 쳐들어오는 방해꾼이 안 올 테니.”
“킬리언! ……아응!”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푹신한 침대가 등 뒤에 닿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위로 올라탄 킬리언이 제 목깃의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천천히 드러나는 넓고 단단한 어깨, 두드러진 쇄골에 로위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로위나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갠 킬리언이 제 뺨을 만지게 했다.
“구경은 충분히 했습니까, 부인?”
은밀한 눈빛이 마치 외도라도 저지르는 귀부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다른 한 손마저 붙잡은 킬리언이 그대로 몸을 숙였다. 훅 다가온 얼굴에 로위나가 숨을 참았다.
매일매일 보고 있어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맞댈 때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각 잡힌 눈썹과 살짝 가라앉은 새파란 눈동자, 색소가 짙은 입술. 처음 만났을 때와 무려 십 년이 흘렀지만,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몸에 밴 우아함과 숨 막힐 듯한 색기가 더해 갔다.
그대로 입술이 닿기 직전, 눈을 질끈 감은 로위나가 가까스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