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여기 기차표 나왔습니다. 목적지 확인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매표소 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권한 기차표를 손에 쥔 로위나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첫차였지만 플랫폼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넘기는 중년의 남자와 카트를 끌고 다니며 청소하는 역무원,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기차를 기다리는 학생 무리가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친 로위나가 멀리서 킬리언을 발견한 순간, 경적과 함께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선로로 기차가 들어섰다. 끽, 하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기차가 일으킨 바람에 로위나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킬리언!”
첫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기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어진 탑승 행렬에 승무원과 승객들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로위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방금 킬리언이 서 있던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겨우 도착했다 생각했을 땐 등 뒤에 기차를 타러 줄을 섰던 승객들이 모두 탑승한 뒤였다. 더불어 킬리언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허겁지겁 달려온 바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혹시 올라탄 걸까 싶어 로위나는 급하게 기차 창문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전부 커튼이 내려가 있어 안이 보이질 않았다. 참다못해 결국 올라타려는데 누군가 가로막았다.
“여기는 일등석 객차 전용 입구입니다. 혹시 탑승권 확인 가능할까요?”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살핀 승무원이 손을 내밀었다.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꽉 쥐느라 잔뜩 구겨진 승차권을 내밀었다.
“아, 여기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묵례하며 로위나의 승차권을 받아 든 승무원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이건 일등석 표가 아닙니다. 삼등석 전용 입구는 저쪽인데요. 안내해 드릴까요?”
“혹시 일등석 객차를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네?”
“제가 아는 사람이 여기 탄 것 같아서요. 금방 내릴게요. 부탁드립니다.”
놀란 승무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겉으로나마 친절했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 얼굴에 로위나가 손을 모아 부탁했다.
“저는 잡상인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아는 사람이 여기에 탄 것 같아서 그래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
끈질긴 태도에 미간을 찌푸린 승무원이 기차 문이 다 닫혔는지 확인하던 동료를 향해 손을 들었다.
“삼등석 객실 손님인데 입구를 잘못 찾으신 모양이야. 데려다드려.”
“손님. 절 따라오시죠.”
“아!”
다가온 승무원이 험악한 얼굴로 로위나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끌려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막아섰다.
“놔.”
고개를 들기까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어진 정적 속에서 로위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윽!”
떠났던 차림 그대로의 킬리언이 강한 힘으로 승무원의 팔을 잡아 떨어지게 했다.
“내 동행입니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죠?”
“하, 하지만 손님. 이분은 삼등석 객실 표를…….”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변명하려던 승무원이 킬리언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로위나 쪽을 눈짓했다. 결국 두 승무원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 * *
옴짝달싹도 못 하는 분위기에 로위나는 그를 따라 기차에 올라탔다. 어색한 침묵은 일등석 객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끝났다.
“무슨 일이지? 또 객실을 잘못 찾은 건 아닐 테고.”
로위나를 먼저 객실 안으로 들여보낸 킬리언이 막아서듯 등 뒤로 문을 잠갔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를 알아챈 로위나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지금 무슨…….”
“만약 내 예상이 틀린 거라면 틀렸다고 얘기해요.”
“읍!”
맹수가 먹잇감에게 달려들 듯 사나운 기세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킬리언이 다른 한 손으로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밀어낼 새도 없이 부딪혀 오는 뜨거운 입술에 로위나는 덫에 걸린 새처럼 파드득거렸다.
“아…… 응!”
거침없이 파고든 혀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그녀의 것을 휘감고 제게로 빨아들였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으나 전신의 기운이 모조리 그에게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큰 소리와 함께 다시 경적을 울린 기차가 기차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반동을 눈치챌 새도 없이 손에 점점 힘이 풀리고 가쁜 숨에 정신도 몽롱해졌다.
“그만!”
안간힘을 다해 로위나가 달려든 짐승을 밀어낸 건, 숨을 쉴 수가 없어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흡…… 하아…….”
손등으로 부르튼 입술을 닦은 로위나가 물기 어린 눈으로 킬리언을 노려봤다.
“예상이 뭔지도 말 안 해 주고, 틀렸다 아니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덮치는 게 어딨어요? 더구나.”
“더구나?”
“기차도 이미 출발했잖아요!”
“날 따라온 게 아니었나?”
“누가 따라왔대요?”
눈에 쌍심지를 켠 로위나가 그를 앉게 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왔어요. 억울한 건 억울하고 따질 건 따져야겠더라고요.”
“다 말해 봐. 들어줄 테니.”
굶주린 배를 채운 짐승처럼 여유롭게 대답한 킬리언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미, 미쳤어요?”
“당신에게 미친 건 사실이니 그렇다고 해 두지.”
야릇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가느다란 금발을 제 검지로 꼬았다.
실랑이를 알아챈 건 객실에 들어서서 짐을 올리고 커튼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본능처럼 객실에서 튀어나와 입구로 향했다. 혹시 했던 가능성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기적이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할 말은?”
“…….”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커다란 손은 끝까지 놓아줄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한 로위나가 대신 그의 양 뺨을 붙잡았다.
“난 당신이 정말 싫어요.”
“…….”
“당신이 내게 했던 일을 기억하죠? 기억 못 한다면 사람도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비난에 의기양양한 킬리언의 얼굴에 옅게 그늘이 졌다.
“당신은 날 장난감처럼 취급했고 날 무시했어. 그리고 날 제멋대로 오해한 뒤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날 버렸지.”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그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손에 잔뜩 힘을 준 로위나가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 봐요. 후회해요?”
“……후회해.”
순순한 인정에 로위나가 다시 그를 몰아붙였다.
“얼마만큼?”
“내 전 재산을 바쳐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킬리언!”
짝, 정신 차리라는 듯 두 손이 그의 뺨을 가볍게 쳤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 재산이 아니야. 섬이 몇 개든, 땅이 얼마만큼 넓건, 건물이 몇 개든 상관없어.”
“그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게 보상해요. 건방지게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멋대로 보상할 게 아니라!”
로렌에게서 받은 봉투를 그의 재킷 주머니에 넣은 로위나가 반듯한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당신의 평생을 바쳐 날 사랑하고, 내 아들을 사랑해. 여왕을 대하듯 날 대우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옆에서 응원하고…….”
“그건 곤란해.”
“뭐라고요?”
“여왕같이 당신을 대우할 수는 없어. 난 전혀 여왕을 공경하고 경외하지 않으니까.”
눈초리를 세운 로위나의 얼굴에 피식 웃은 킬리언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금발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빗겨 내렸다.
“대신 여신처럼 당신을 대하지.”
“킬리언…….”
“난 무신론자지만, 오직 당신을 내 신앙처럼 내 교리처럼 대할게. 때론 내 목숨처럼, 내 영혼처럼.”
마지막으로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킬리언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손끝에 입 맞췄다.
새파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 가득 담고 있었다. 그가 홧홧하게 뺨이 달아오른 로위나의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아……!”
“그러나 침대에서는 예외야. 그때의 당신은 온전히 내 여자고 내게 복종해야 해. 그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어.”
언제 그녀에게 순종적이었냐는 듯 속삭인 킬리언이 감춘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소유욕과 독점욕이 로위나를 휘감고 속박했다.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맹세하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당신은 내 여자고, 나도 당신 남자라는 걸.”
성서에 나오는 뱀이 유혹하듯 관능적인 목소리가 로위나를 유혹했다. 도발적인 시선이 파르르 떨리는 로위나 속눈썹과 얕게 말아 문 붉은 입술을 슥 훑었다.
“……좋아요.”
이대로 있다간 뼈도 남지 않게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겨우 침착해진 로위나가 벌떡 일어났다. 제 품에서 그녀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손을 뻗어 오는 킬리언의 손을 뿌리친 로위나가 명령했다.
“그럼…… 내게 다시 인사해요.”
“뭐?”
“우리 관계는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인사도 새로 해야죠. 그러니 다시 내게 인사해요. 존중을 담아서.”
첫 만남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이었다. 어스름이 깔린 첫차. 일등석. 하지만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멋모르는 스무 살 아가씨가 아니었고 킬리언 또한 그때 그 못되고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못된 걸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남자지만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로위나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말이 없던 킬리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왼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록포드의 공작,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라고 합니다. 미스…….”
“필로네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데본셔 경.”
몇 번이고 돌이키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 했으리라 곱씹고 곱씹었던 그 날. 긴장과 기대로 로위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실례지만. 미스 필로네. 제 객실에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맞아요. 죄송해요. 다음 역에서 내릴 생각이에요.”
“그럼, 같이 내릴 수 있게 허락하시겠습니까?”
“……어째서요?”
시선을 피한 로위나가 새초롬한 어투로 물었다. 어깨를 으쓱한 킬리언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으니까요.”
“그럼…….”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허락하죠.”
대답과 동시에 손을 뻗은 그녀가 이번엔 먼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부딪쳤다. 동시에 강한 힘이 그녀의 어깨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드디어 마주 본 인연이었다.
<정부는 도망친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