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소동의 원인은 바로 물고기였다. 오두막에서 킬리언이 있는 걸 확인한 데미안이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에 간 것이다.
“물고기를 잡겠다고 호수에 들어가는 게 어딨어?”
“낚싯대도 없고, 그래서…… 나도 곰처럼 손으로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랬는데 물살에 점점 떠밀려서…….”
“엉뚱하기는.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아기네.”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지 가볍게 끼어든 세드릭이 데미안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큰일 났으면 어쩔 뻔했어. 이 녀석아.”
“잘못했어요. 아빠한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빠. 한 단어에 기껏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 굳었다.
“일단 씻었으니까 오늘은 푹 자. 벌로 오늘 간식은 없어. 알겠지?”
“응…….”
세드릭이 데미안을 안아 올렸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목을 안았다. 그러더니 지쳤는지 금세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럼…… 이야기 나눠요.”
세드릭의 시선이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언이 샤워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온 것은 이십여 분 뒤였다. 집사에게 부탁해 와인을 준비한 로위나가 세 잔째 잔을 비울 무렵이었다. 욕실 앞 카펫에 발의 물기를 닦은 킬리언이 그녀가 든 잔을 잡아챘다.
“놔요. 내 거예요.”
“그만 마셔. 술도 못하면서.”
반박하기도 전에 와인이 그의 목으로 넘어갔다. 포기한 로위나가 그가 맞은편에 앉길 기다렸다. 곧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킬리언이 맞은편 카우치에 앉았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자연스러운 모습에 로위나는 말없이 실소했다. 새벽녘에 있던 소동으로 모든 힘을 소진한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취기가 돌아 더 몽롱했다.
“왜 여기 온 거예요?”
“이미 세드릭 고드웰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요.”
“……나는 오늘 떠나.”
“그래서요?”
“그 전에 당신과 데미안을 보고 싶었어.”
말을 돌리거나 부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침묵이 흐르고 로위나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눈은 괜찮나요?”
놀란 듯 킬리언이 잠시 침묵했다.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저번에 나도 못 알아봤잖아요.”
“……어두워서 그랬던 거지, 밝은 곳에서는 그래도 괜찮아.”
“치료는 받고 있어요?”
“받을 예정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어쩐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그것 때문에 우리를 밀어낸 건…….”
“기차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군.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현관의 괘종시계가 댕댕댕, 정오를 알렸다. 말허리를 자른 킬리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놀란 로위나가 따라 일어났다.
“오늘 밤 기차 아니었나요?”
“시간을 조금 앞당겼어.”
담백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문 쪽으로 향했다. 코트 걸이에 걸쳐 놓은 외투를 걸치는데 마침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오라고 하자 정복을 입은 하녀가 공손하게 마차가 왔음을 알렸다.
“세드릭 나리께서 오두막의 짐은 모두 마차에 실었으니 걱정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줘요.”
“예. 그럼 현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하녀가 앞장섰다.
“로위나.”
모자를 마지막으로 쓴 킬리언이 로위나를 향해 뒤를 돌았다.
“그럼 건강하게 잘 지내요.”
“고마워요.”
“…….”
로위나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내뱉었다.
“데미안을 구해 준 거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대답 대신 옅게 웃은 킬리언이 하녀를 따라 방을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멍하니 서 있던 로위나가 창가로 다가갔다. 마차 문을 열고 기다리던 마부가 다가오는 킬리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킬리언이 위를 올려다봤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묘한 기시감이 로위나를 휘감았다. 그날과 정반대였다. 섬에서 탈출을 감행하던 마지막 순간. 방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킬리언과 마차를 타기 직전 위를 올려다보던 자신.
그를 떠난 건 자신인데 어쩐지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던 남자였는데, 그렇게 증오하고 또 원망했던 남자였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듯 빠르게 뛰었고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쥔 것처럼 통증이 밀려들었다.
이 감정이 뭘까 생각하는 사이, 먼저 시선을 거둔 킬리언이 마차에 올라탔다. 흙먼지를 일으킨 마차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하나의 점이 되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로위나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꼬여 버린 실타래처럼 풀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텅 빈 방에 덩그러니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몇 발자국 사이에 두고 로렌이 서 있었다.
“로위나.”
“……로렌.”
“그는 방금 떠난 모양이군요.”
“네. 떠났어요.”
“이리 와요.”
혼란스러운 로위나의 표정을 본 로렌이 팔을 벌렸다. 그녀의 품에 안긴 로위나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럽게 로위나의 등을 쓰다듬은 로렌이 그녀의 고개를 들게 했다.
“가엾은 내 친구.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둡죠?”
“모르겠어요…… 후련해야 하는데. 시원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데?”
“목이 콱 멘 것처럼 답답하고, 가슴에 무거운 게 얹힌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로위나. 그럴 땐 자기 마음을 깊게 들여다봐야 해요.”
“제 마음을요?”
“다 털어놔 봐요. 비밀로 할 테니까.”
빙긋 웃은 로렌이 그녀를 카우치로 이끌었다. 순순히 로렌을 따라 카우치에 앉은 로위나가 엄마에게 기대듯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가 미워요.”
“그렇군요. 왜요?”
“그는 날 갖고 놀았으니까. 날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니까…… 내 사랑을 외면했었으니까.”
그 상처는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지금조차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따끔따끔 그녀를 찔렀다.
“그리고요?”
“…….”
“그게 다인가요?”
이어진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무엇이요?”
“데미안을 내게 준 것과 데미안에게 잘해 준 거요. 처음엔 정말 피도 눈물도 없이 굴었지만…… 눈도 여의치 않은데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었어요.”
의식을 되찾은 데미안을 끌어안았던 그의 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사적이고 절실해 보이던 등. 잘게 떨리던 손. 그토록 소리 없는 안도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요.”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에게 미안해요.”
데미안이 사고를 당했다고 알았을 때,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밤이면 몽유병처럼 맨발로 저택을 돌아다녔고 의식이 없는 도중에 킬리언의 침실로 들어가 그를 원망하며 그의 목을 졸랐다. 그런데도 킬리언은 뿌리치기는커녕 묵묵하게 그 원망과 미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순순히 제 목을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그럼 가서 전해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로렌이 대뜸 제안했다.
“네?”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어요. 일국의 공작이란 그런 거니까요. 쉽게 마주칠 수도 없고 접점을 만들 수도 없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겠어요? 지금 이 순간을?”
망설이는 로위나에게 로렌이 힘주어 물었다. 녹음처럼 푸릇푸릇한 초록색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말해 봐요. 로위나.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 이 순간을 곱씹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로위나는 서서히 이곳에서 나이 먹어 갈 스스로를 머릿속에 그렸다. 평화롭고 안온한 삶일 것이다. 어쩌면 세드릭을 남편으로서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성장하는 데미안을 보며 흐뭇함과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니요…….”
가슴 한편에 난 구멍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홀린 듯이 고개를 젓자 로렌이 벌떡 일어났다.
“결정됐네요. 그럼 가요.”
“지금요?”
“아직 첫차 시간이 아니에요.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리면 아슬아슬하게 만날 수 있어요. 자. 어서요.”
“로렌…….”
로위나를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운 로렌이 그녀를 현관으로 이끌었다.
“세드릭 씨는…….”
“걱정 말아요. 내 동생은 강해요. 공작 저하보다 더. 당신이 없어도 결국은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로렌이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말 한 필이 현관에 서 있었다. 발걸이에 발을 올리고 안장에 올라탄 로위나에게 로렌이 봉투를 내밀었다.
“정 용서 못 하겠다 싶으면, 마지막으로 이거라도 얼굴에 던지고 와요.”
“이건…….”
“세드릭이 그에게 받은 거예요.”
무엇일지는 예상이 갔다. 봉투를 받은 로위나가 감사의 뜻으로 살짝 묵례했다. 그리고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히히힝, 투레질한 말이 바로 발굽을 굴렸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말 위에서 로위나는 낙마하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숙이고 마차가 떠났던 길을 뒤쫓아 달려 나갔다.
기차가 역에서 출발하기 전, 그에게 전해야 했다. 지난 십여 년간 세월 속에 그녀가 가슴 깊숙이 숨겨 놓았던 모든 감정과 마음을. 그런 다음 후회 없이 미련 없이. 그를 따라갈지 그를 보내 줄지는 직접 얼굴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