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충격에 비틀거린 로위나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미간을 좁힌 킬리언이 저기압인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미스 한나 아트웰?”
한나 아트웰. 익숙한 이름이었다. 기억을 곱씹던 로위나가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저택에서 일하는 벙어리 하녀의 이름이었다.
“목이 좀 마르군요. 물 좀 줘요.”
정말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어둡긴 했지만 가까운 사람의 얼굴마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로위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서 있는 사이,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 올린 킬리언이 건조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로위나가 주전자를 발견했다. 주전자를 가리키자 어렴풋한 윤곽을 알아본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따른 뒤 그것을 그에게 내민 순간, 손가락 끝이 스쳤다. 컵을 놓칠 뻔한 것도 잠시, 로위나는 킬리언이 물을 마시는 틈을 타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도망치듯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미안이 놀란 눈으로 로위나를 맞았다.
“엄마?”
“지금 바로 돌아가자.”
“응?”
어안이 벙벙한 데미안을 먼저 안장에 앉힌 로위나가 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 * *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로위나가 향한 곳은 세드릭의 방이었다. 자고 있던 세드릭이 인기척에 눈을 뜨기 무섭게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간 로위나가 추궁했다.
“왜 그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죠?”
“……로위나?”
“부정할 생각은 말아요. 로렌과 이야기하는 걸 똑똑히 들었으니까. 방금 오두막에서 직접 보기도 했고.”
“직접?”
이어진 말에 졸음이 싹 달아난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응접실에서 기다려 줘요. 지금은 정신이 없으니까.”
응접실에서 삼십 분여를 기다리는 동안 로위나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혀 파악하기 어려웠다.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두 손을 맞잡고 기다리는데 문이 열렸다.
“로위나.”
잠옷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세드릭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마주 앉은 그가 로위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미간을 좁혔다.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나요?”
“난 괜찮아요. 그보다 더 급한 용무가 있잖아요.”
걱정을 한 귀로 흘려 넘긴 로위나가 굳은 얼굴로 추궁했다.
“왜 그가 여기 있는지 설명해 줘요.”
“내가 모른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 숲은 로렌의 영지 일부인데.”
결연한 얼굴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도 잠시, 작게 한숨을 내쉰 세드릭이 고백했다.
“작은 부탁이었습니다.”
“부탁?”
“떠나기 전, 데미안과 당신을 멀리서나마 보고 싶다고요.”
떠난다. 세드릭의 수긍보다 더 귀에 꽂힌 단어에 로위나는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당황스럽네요. 상의도 없이 그렇게.”
“그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요. 미안해요.”
“언제 내려온 거죠?”
“어제 새벽에요.”
데미안이 킬리언을 본 게 어젯밤이니 그럼 바로 당일이라는 말이었다. 충격을 가라앉힌 로위나가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날 못 알아봤어요.”
“…….”
“떠난다는 건 그것과 관계 있나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세드릭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제녹 씨 말로는 사고 후유증으로 시력이 나빠졌다고 하더군요.”
“얼마나요?”
“그것까지는…….”
“가 봐야겠어요.”
“로위나!”
벌떡 일어서서 문으로 향하던 로위나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춰 섰다.
“가서 어쩌려고요?”
“떠나라고 해야죠. 왜 이제 와서.”
“안 그래도 떠난다고 했어요. 이튿날 아침 일찍.”
아침 일찍. 로위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빛이 보였다. 곧 동이 틀 테니 몇 시간 뒤였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요. 데미안을 한 번 봤으니 만족할 거예요.”
대답 대신 문고리를 돌린 로위나가 응접실을 나왔다. 데미안의 방으로 가는데 집사와 마주쳤다. 가볍게 인사하려는데 집사가 놀란 눈을 했다.
“로위나 님?”
“네?”
“데미안 님과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로위나 님이 허락하신 줄 알고 망아지를 태워 드렸는데.”
“무슨.”
“로위나 님이 숲에서 기다리신다고 해서 마부랑 같이 가시라고…….”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홱 등을 돌린 로위나가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 * *
허겁지겁 집사와 마구간에 갔지만 마부는 자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자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고 일어난 마부가 말과 망아지의 수를 셌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센 마부가 정신이 확 들었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맙소사. 망아지 한 마리가 비네요.”
“말 한 필 빌릴게요.”
“로위나 님?”
안장도 없이 말 등에 올라탄 로위나가 집사가 말릴 새도 없이 말을 몰았다. 깊은 숲속에 빠른 속도로 들어선 로위나가 바로 오두막이 있는 쪽으로 고삐를 틀었다. 혹시나 싶은 가능성은 맞아떨어졌다. 오두막 앞 나무에 묶인 망아지를 확인한 로위나가 다급하게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데미안!”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혹시 킬리언이 벌써 떠난 걸까 싶어 구석구석을 살피자 짐이 남아 있었다.
“혹시 같이 어딘 간 걸까?”
중얼거린 로위나가 다시 오두막을 나가려는 때였다.
“아!”
들어오려는 상대와 몸이 부딪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킬리언이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기 전, 로위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데미안은 어디 있어요?”
“……로위나?”
“데미안과 같이 있던 거 아니에요? 나 몰래 데미안을 데려가려고!”
“진정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무슨 말인지 천천히 말해.”
“데미안이 이곳에 왔었어요. 혼자.”
깊게 심호흡한 로위나가 나무에 묶인 망아지를 가리켰다. 희끄무레하게 형체를 확인한 킬리언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못 봤어.”
심장이 철렁했다. 위험한 동물은 없다고 들었지만 깊은 숲속이었다. 독버섯 같은 걸 잘못 먹거나 하는 자잘한 사고가 걱정됐다. 다리에 힘이 풀린 로위나가 벽을 짚었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손을 빼자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루루……?”
멍! 한 번 운 강아지가 익숙한 냄새에 반가운지 로위나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멍하니 루루를 쓰다듬던 로위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 생각을 떠올렸는지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안장 냄새를 맡게 하자 루루는 땅에 코를 박고 어딘가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라갔다.
“여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숲 외곽의 호수였다. 언젠가 세드릭이 말했던 적 있었다. 작은 호수가 있어서 종종 낚시꾼들이 오간다고. 냄새가 끊겼는지 한군데서 멈춰 선 루루가 헥헥거리며 자리 잡고 앉았다.
“데미안!”
목청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지만 고요한 호숫가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호수 가운데서 무언가를 발견한 루루가 맹렬하게 짖어 댔다. 시선을 따라간 로위나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데미안……?”
작은 손이 허우적대며 수면에 떠올라 있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데미안!”
누군지 확인한 순간 이성은 마비됐다. 잔잔한 물결 위로 급하게 허우적거리는 손이 위태롭게 떠 있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로위나가 물살을 헤치고 데미안이 있는 곳까지 손을 뻗었다.
“로위나!”
무릎까지 물이 들이차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킬리언이 그녀를 붙잡았다.
“이거 놔요! 데미안이 저기 한가운데 있어요.”
몸부림친 로위나가 킬리언의 손을 뿌리쳤다.
“나 수영할 줄 알아요! 그러니 비켜요!”
“지금 당신 너무 흥분했어.”
물살이 거친 강부터 망망대해까지. 어릴 적부터 다양한 곳에서 생존 수영을 배워 수영은 그가 가장 몸에 밴 운동이었다. 더불어 동이 터서 주변은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었다. 말리는 킬리언에게로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마찬가지로 희게 질린 얼굴과 마주했다.
“내가 갈게.”
“…….”
핏기 없는 얼굴은 여태 보았던 그 어떤 얼굴보다 더 새하얬다. 절실함을 본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로위나의 몸에 힘이 풀리기 무섭게 킬리언이 바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덩달아 강아지도 함께 뛰어들었다.
“킬리언!”
흙바닥에 털썩 앉은 로위나가 멀어지는 킬리언을 바라봤다. 뒤늦게 그의 시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온몸에 오한이 일며 두려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두 손을 모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길 한참, 한 손을 강아지에게 의지한 채 아이를 안고 나오는 킬리언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데미안을 뭍까지 데려온 킬리언이 침착하게 작은 몸을 눕혔다.
“흐흑…… 데미안…….”
얼굴이 창백했다. 의식이 없는지 눈도 뜨지 못하는 상태였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로위나가 데미안의 코밑으로 손을 갖다 댔다.
“숨을 안 쉬어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울부짖은 로위나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돼……!”
“로위나. 다시 눕혀.”
“싫어. 내 아기야!”
“나도 알아. 당신 아기야. 그러니 다시 눕혀.”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무언가 잔뜩 억누르고 있었다.
“데미안을 구하려면, 당신이 날 도와줘야 해.”
지시대로 로위나는 두 손을 포갠 뒤에 데미안의 왼 가슴을 눌렀다 떼길 반복했다. 그 동작에 맞춰 한쪽에서는 킬리언이 인공호흡을 시도하길 한참, 끝이 다 닳은 심지처럼 새까맣게 심장이 타들어 갈 즈음 기적적으로 데미안이 물을 토해 냈다.
“쿨럭…….”
“데미…….”
혼비백산한 로위나가 아들을 껴안으려는데 차츰 눈을 뜬 데미안이 킬리언을 알아봤다.
“아빠…….”
두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킬리언이 데미안을 끌어안았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겨우 빛을 찾은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