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물안개가 자욱한 아침, 먼발치서 세드릭과 데미안이 손을 흔들었다.
“엄마!”
“데미안!”
이름을 부르자 활짝 웃은 데미안이 말 안장에서 내려 달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세드릭이 내려 주자마자 로위나를 향해 달려왔다.
저택 현관에서 데미안을 기다리던 로위나가 아들의 이마와 뺨, 코를 차례대로 매만졌다.
“잘 자고 왔어?”
“응!”
“오두막에서 자는 건 어땠어?”
“재밌었어!”
씩씩하게 대답한 데미안은 이전 둘이 살던 시절의 병약한 아들이 아니었다. 부쩍 자란 모습에 잠시 아쉬운 듯 웃은 로위나가 흑발을 쓰다듬었다.
“그래. 어서 씻고 옷 갈아입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데미안을 욕조로 데려갔다.
두 사람만 남고 나서야 모자를 흐뭇하게 보던 세드릭이 말을 걸었다.
“집필은 잘 됐어요?”
“네. 중반부까지는요.”
일전의 어색함은 씻겨 나간 듯 자연스럽게 로위나가 대꾸했다.
“데미안과 놀아 줘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마침 한가하기도 하고 나도 같이 노는 건데요, 뭐.”
씩 웃은 세드릭이 슬쩍 말을 이었다.
“데미안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요.”
“…….”
“아, 그냥 한 말이에요.”
로위나의 침묵에 다급하게 덧붙인 세드릭이 말을 끝맺었다.
“기다릴게요.”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확실하게 들렸다. 두 번째 듣는 말. 로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데미안이 점점 더 자랄수록 아버지 역할에 있어 빈자리는 커질지 몰랐다. 그렇다고 세드릭을 받아들이기엔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어진 침묵에 세드릭이 로위나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바람에 금발이 얼굴을 가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세드릭의 머릿속에 한순간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해 줘요.
―…….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며칠이면 충분하니까.
담담하지만 절실했던 부탁이었다. 도저히 칼같이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떠올리자 미약한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는 뻗은 손을 다시 거뒀다.
“알았어요. 그건 내 특기니까요.”
어두컴컴한 저녁, 아들의 얼굴을 새기듯 손으로 쓰다듬던 손이 눈에 박혔다. 차마 바랄 수도 없는 귀중한 보물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고 또 애틋했던 손길. 어둠 속에서도 그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녀를 만질 수가 없었다.
* * *
목욕을 다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데미안은 낮잠을 자고 나서야 개운한 얼굴로 일어났다. 침대에서 나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서재였다.
“엄마. 일해?”
노크 소리에 뒤를 돈 로위나가 써 내려가던 원고를 멈췄다.
“이제 쉬려고. 들어오렴.”
떨어진 허락에 문을 연 데미안이 쪼르르 로위나에게 안겼다.
“엄마.”
“응?”
“나 어제 이상한 꿈을 꿨다?”
“무슨 꿈”
부드러운 분위기는 이어진 대답에 얼어붙었다.
“아빠가 나왔어.”
“…….”
“이상하지?”
“……이상하네. 아빠가 어떻게 나왔는데?”
말끝이 떨렸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아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고 있는데 머리를 누가 쓰다듬는 거야. 눈을 뜨려고 했는데 아빠가 못 뜨게 눈을 막았다?”
“그래서……?”
“몇 마디는 안 했어. 그냥 우리 다시 못 보는 거냐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아무 말도 없었어.”
혹시나 했던 바람은 금세 스러졌다. 어깨에 힘을 뺀 로위나가 데미안을 끌어안았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구나.”
“응. 그런데 정말 진짜 같았어.”
“또 뭐라고 말 안 했어?”
“아빠가 우릴 지켜 줄 거 아니냐고 했는데.”
“했는데?”
“그렇다고 했어.”
이상한 우연이었다. 데미안이 킬리언의 꿈을 꿨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밖에서 잠을 잘 때였다.
그리고 오두막으로 데미안을 데려간 사람은 세드릭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로위나의 머릿속에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지 같았지만 어쩐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계속 속삭였다.
“아!”
해가 저물고 세드릭과 이야기를 나누러 그의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로위나는 복도에서 하녀와 몸이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앞으로 못 본걸요.”
고개를 저은 로위나는 하녀가 손에 든 청소 용품을 발견했다.
“혹시 세드릭 씨 방을 청소하고 나오는 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에 안 계시는 거네요.”
“나리라면 아마 마님 방에 계실 거예요. 이 시간이면 어깨와 다리를 마사지해 주시러 가시거든요.”
“아. 고마워요.”
빙긋 웃은 로위나가 발걸음을 돌려 로렌의 방으로 향했다.
“실례…….”
노크를 하려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로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공작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거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누가 내 막냇동생 아니랄까 봐 마음이 약하구나.”
부탁? 노크를 하려던 로위나가 그대로 굳었다. 한숨을 내쉰 로렌이 제 어깨를 주무르는 세드릭의 손을 토닥이는 게 보였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단다.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려무나.”
“……네.”
세드릭이 무겁게 대꾸했다. 로위나는 떨리는 손을 왼 가슴에 갖다 댔다. 혹시나 했던 실낱같은 가능성이 점점 실체를 가지고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늘진 세드릭의 얼굴에 로렌이 그를 앞에 앉혔다.
“보아하니 고민이 그게 다가 아니구나. 그렇지?”
“……사실. 조금 이상했어요.”
“어떤 게?”
“저번에 저택을 보니 주변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하게 커튼을 모두 닫아 놓았더라고요. 고용인들도 거의 없었고요.”
문틈에 로위나가 귀를 갖다 댔다. 손바닥에 땀이 배고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였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로렌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 있는 건가?”
“문이 열려 있었군요.”
로렌을 따라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긴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확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네요.”
“……그래? 내가 예민했나 보구나.”
* * *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손에 데미안이 졸린 눈을 비볐다.
“으음…… 엄마?”
“깨워서 미안해. 데미안. 부탁이 있어.”
“뭔데?”
“어제 잤던 오두막이 어딨는지 기억나?”
“응…….”
“거기 엄마랑 다시 갈 수 있겠니?”
어깨를 붙잡은 손이 절박하게 느껴졌다. 초조한 얼굴을 마주한 데미안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이 가자.”
“지금……?”
잠에서 다 깰 겨를도 없이 데미안은 엄마가 입혀 준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외투를 걸쳤다.
그렇게 간 곳은 마구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짚 더미 속에서 자던 말구종이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말 등에 안장을 얹자 로위나는 도움을 받아 데미안을 먼저 앉히고 자신도 뒤에 앉았다.
“아직 늦은 밤인데다 도련님까지 태우시려면 아무래도 힘드실 텐데요. 제가 따라갈까요, 부인?”
“아니요. 고맙지만 괜찮아요.”
단호하게 거절한 로위나가 말 허리를 차자 투레질하던 말이 바로 출발했다.
고삐를 잡은 로위나는 안정적으로 어두운 숲길을 향해 말을 달렸다. 말을 많이 타 본 것도 아닐 텐데 숙련자처럼 능숙했다.
흔들림 없는 자세에 데미안이 잠시 놀란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봤다.
“엄마 말 많이 타 봤어?”
“아니. 몇 번 정도.”
“그런데 이렇게 잘 타?”
“그야 네가 타는 걸 많이 봐 왔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로위나가 속도를 높였다. 흔들리는 안장 위에서 데미안은 문득 로렌의 말을 떠올렸다.
―네 엄마가 대단한 점이 뭔지 아니?
―뭔데요?
―호기심, 집중력, 관찰력.
세 개의 손가락을 접은 로렌이 빙긋 웃었다.
―네 엄마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 공부를 했어도 성공했을 거야. 자기 자신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데미안. 어느 쪽으로 가야 해?”
회상은 로위나의 말에 깨어졌다. 개울가에서 멈춰 선 로위나가 데미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오른쪽.”
빼곡한 나무 사이를 지나 한참을 달리던 말이 고삐를 뒤로 끄는 힘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저기!”
데미안이 가리킨 곳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오두막이었다. 벽난로 위에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있나?”
고개를 갸웃한 데미안이 내리고 싶다는 얼굴로 로위나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안장에서 내린 로위나가 데미안을 안아 내렸다.
“잠시 여기 있어.”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잠깐이면 돼.”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정말 혹시나 그 사람이라면, 그 남자라면. 주먹을 쥐었다 편 로위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카우치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천천히 다가가 모포를 끌어 내렸다.
다음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킬……리언.”
잘못 볼 수가 없었다. 부정하기에는 너무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망막에 맺혔다. 혹시나 했던 예감이 들어맞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입을 막은 채 뒷걸음질 치는 때였다. 삐거덕하는 마룻바닥의 소리와 함께 곤히 자고 있던 킬리언이 눈을 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로위나가 뭐라 입을 열려는 때였다.
“누구지?”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추궁했다.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것도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