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세드릭이 데미안을 데려온 곳은 사냥꾼의 임시 처소인 오두막이었다.
“우와, 이런 곳이 있었네!”
데미안은 오두막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감탄했다. 넓지는 않지만 안락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바닥엔 푹신하게 가죽을 깔았고 벽에는 사냥한 동물의 헌팅 트로피가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작지만 버젓한 벽난로도 있었고 그 앞에는 거실처럼 카우치가 자리했다.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임시 주방 또한 구석에 갖춰져 있었다.
“근방 사냥꾼과 벌목꾼들이 잠시 휴식하는 곳이거든.”
부드럽게 대답한 세드릭이 데미안의 외투를 벗게 해 벽걸이에 달았다.
“비밀 공간 같고 정말 좋다…….”
연이어 감탄한 데미안이 카우치에 풀썩 앉았다.
“이런 데 아지트가 있는 게 꿈이에요.”
“나도 어렸을 땐 그랬지.”
피식 웃은 세드릭이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부글부글 물이 끓는 소리가 산속 깊은 오두막에 고적하게 울려 퍼졌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데미안의 눈에 문득 난로 속의 작은 불씨가 들어왔다.
“방금까지 누가 있었나 봐! 이것 봐.”
“그래?”
놀랐는지 세드릭의 동공이 잠깐 흔들렸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세드릭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목은 안 말라? 이거 마셔.”
“아, 응.”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고마워, 형.”
헤헤 웃은 데미안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산뜻한 향기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몸에 감돌았다.
데미안의 옆에 앉은 세드릭이 불쑥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너 나한테 형이라고 해?”
“응?”
“내가 네 아빠뻘인 거 알잖아.”
“갑자기?”
“계속 물어본다는 게 깜박했어.”
“음…….”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말을 아끼던 데미안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세드릭 형은 아저씨 같지가 않은걸. 아빠 같지도 않고.”
“그럼?”
“친구 같고 형 같아.”
그렇게 보이는 데는 세드릭의 동안 외모도 있지만 호기심 많고 소년 같은 장난스러움 또한 한몫했다.
“나 계속 형이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난 형제가 없으니까.”
반면 데미안은 이런저런 일을 겪은 뒤로 한층 의젓해진 모습이었다.
“아, 싫으면 지금이라도 아저씨라고…….”
“이 녀석이!”
킬킬 웃으며 데미안의 머리를 한바탕 헝클어뜨린 세드릭이 말랑한 두 뺨을 붙잡았다.
“그럼 만약에 내가…….”
몇 번이고 꺼내려던 말이었다. 로위나와 결혼하고 그녀의 남편이 된다면 데미안의 의붓아버지가 되는 거니까. 저번에는 급한 상황이라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데미안의 동의가 없이는 로위나는 절대 그를 남편으로 받아 주지 않을 터였다.
“내가?”
“내가 말이야…….”
신중하게 잠시 뜸을 들인 세드릭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 아빠가 된다면 어떻겠어?”
동시에 데미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세드릭이 설득하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잘 맞잖아, 데미안. 생각해 봐. 달라질 건 없을 거야. 지금처럼 둘이 숲도 가고 동물도 관찰하고, 곤충 채집도 하고, 캠핑도 하는 거야. 어때?”
“……내가 허락하면 결혼하는 거야?”
그늘진 얼굴로 데미안이 되물었다. 옅게 웃은 세드릭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네 엄마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하지만 네 의견도 중요하니까. 싫어?”
“싫지는 않아. 그치만…….”
기억하는 한, 긴 시간 엄마는 항상 혼자였다. 함께 공원을 산책할 때면 따라붙던 시선들을 어린 마음에도 느꼈었다. 호기심과 동정심, 그리고 호감 어린 관심들. 하지만 엄마를 향했던 어렴풋한 호감은 손을 잡은 자신을 볼 때면 아쉬움으로 바뀌곤 했다.
친하게 지냈던 이웃집 삼촌이나 자주 봤던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거기에서 그칠 뿐이었다. 엄마는 어느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빠에 대해 물어볼 때면 흐릿해지던 엄마의 미소에 데미안은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다시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야?
―데미안이 아직 어려요.
―아빠가 있으면 아이한테 더 좋지. 데미안을 위해서도 결혼할 생각 없어?
―아직은요. 그나저나 헤리엇…….
―또 말 돌리지.
그때는 그냥 넘겼던 대화였다. 몇 번이고 반복됐던 이야기.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니 무슨 이야기였는지, 엄마에게 다가왔던 남자들이 왜 자신을 보고 뒤를 돌았는지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저 멀리 있는 줄 알았던 아빠는 엄마와 헤어졌었다는 것.
“난…… 난 그냥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세드릭 형은…… 내 아빠가 아니잖아.”
수도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 엄마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굳어 있었다.
아빠와 어쩌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걸까?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지만 데미안은 참았다. 엄마는 그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라는 말만 했다. 미안하다며 끌어안는 손이 떨려서 차마 두 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둘만 지냈던 때, 엄마에게 나는 왜 아빠가 없냐고 물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미안. 데미안. 너무 갑작스러웠지.”
어두워진 데미안의 얼굴에 머쓱하게 웃은 세드릭이 일어서더니 주섬주섬 가져온 배낭을 뒤졌다.
“뭐 찾아?”
“소시지랑 수프. 여기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나 배 안 고픈데? 샌드위치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알 수 없는 눈으로 데미안을 본 세드릭이 불쑥 제안했다.
“오늘은 자고 갈까?”
“자고 가?”
“응. 어때?”
“좋아!”
숲속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금세 방금 전 생각을 잊어버린 데미안이 눈을 반짝였다.
* * *
즐겁고 훈훈한 밤이었다. 언제 다 챙겨 온 건지 세드릭은 침낭부터 저녁에 먹을 음식, 그리고 가재도구까지 모두 가져왔고 자기 전에 동화까지 읽어 주었다.
숲에 사는 외로운 뱀 이야기였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은 다른 동물에게 밟히지 않으려고 신에게 독니를 받았지만, 그 독니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외로움에 스스로 독니를 빼려고 바위에 이를 부딪쳤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런 뱀을 가엾게 여긴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주어 다음 생에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였다.
“뱀이 가엾어.”
“왜? 친구가 생겼잖아.”
“하지만 원래 살던 숲에도 살지 못하고 함께 살고 싶었던 동물들하고도 결국 친해지지 못했잖아.”
“…….”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데미안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지 몇 초간 눈을 깜박인 세드릭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 닮아서 생각이 깊구나.”
난 아빠를 꼭 닮았다고 누가 봐도 아빠 아들이라고 말하려다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잘 시간이야. 코 자자.”
데미안이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새 잠자리를 정리한 세드릭이 침낭 안쪽으로 데미안을 눕혔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나직한 자장가에 잠이 든 건 순식간이었다.
데미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기분 좋게 몽롱한 눈을 깜박였다.
“형 왜 아직도 안 자?”
“…….”
“형?”
두 번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의아해서 고개를 드는데 커다란 손이 데미안의 두 눈꺼풀을 감기게 했다.
“아빠……?”
세드릭 형의 손은 늘 따뜻했다. 이런 서늘한 체온은 데미안이 아는 한, 한 명뿐이었다. 놀란 숨을 들이켠 데미안이 거듭 확인했다.
“아빠예요?”
“…….”
“아빠.”
낑낑대며 눈을 덮은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림도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더 자.”
틀림없는 아빠의 목소리였다. 작은 두 손으로 킬리언의 손을 꼭 잡은 데미안이 울먹였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왜 우리 또 헤어졌어요?”
“데미안.”
“아빠 우리 다시 안 볼 거예요? 우릴 버린 거예요?”
아빠의 정체를 알고 난 뒤 다시 엄마와 둘이 살고 싶다는 소망은 눈 녹듯 사라지고 하나의 작은 소망이 데미안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난 엄마, 아빠랑 살고 싶어요. 이런 집에서요…….”
넓은 집도 돌봐 주는 유모도, 하녀도 필요 없었다. 푹신한 침대도 으리으리한 방도 필요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근사한 옷을 입는 건 좋았지만 그것보다 엄마와 아빠가 옆에 있는 게 더 좋았다.
“아빠…….”
“미안하다.”
한참의 침묵 후에 억누르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도 독니를 뺀 거예요?”
문득 자기 전 들었던 동화 내용이 떠올랐다. 외롭고 위험했던 뱀.
뜬금없는 물음에 킬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아빠…….”
이어진 침묵에 금세라도 아빠가 사라질 것 같았다. 데미안이 초조하게 매달렸다.
“독니를 빼지 않아도 돼요.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네가 위험해진다 해도?”
단순한 질문이었으나 복잡한 의미를 담은 물음이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빠가 지켜 줄 거잖아요. 맞죠?”
“……그래.”
뜨겁고 말캉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게 입술이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데미안은 눈을 가렸던 손이 없어진 걸 눈치챘다.
“아빠!”
눈을 뜨고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옆에는 곤히 자는 세드릭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