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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11화 (111/120)

111화

어둠 속을 눈으로 더듬어 카우치에 앉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킬리언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필터 끝의 불빛이 마치 밤바다의 등대처럼 신경을 잡아끌었다. 침묵 끝에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떨고 있죠?

―……그렇게 보입니까?

―숨소리가 경직돼 있어서.

마치 매캐한 안개 속에서 먹잇감을 향해 킁킁 냄새를 맡는 맹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었으면 당신은 이전에 죽었겠지.

오싹한 기분에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 편 세드릭이 긴장을 풀었다.

―나도 그걸 아니까 온 겁니다. 용건을 말해요.

―로위나는 잘 지냅니까? 데미안도.

―의외군요. 벌써 사람을 써서 알아본 줄 알았는데요.

마치 제 아내와 아들의 안부를 묻는 듯 당당한 말에 저도 모르게 말이 비꼬듯 나왔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런 건 별로 신뢰성이 없어서.

―…….

발끈했다면 당장이라도 맞설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태연한 반응에 왠지 유치한 치기를 부린 것 같아 민망해졌다. 세드릭은 속으로 헛기침을 했다.

―잘 지냅니다.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게, 라고 덧붙이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혀끝으로 나오질 않았다. 로위나의 얼굴이 수도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평온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적어도 시골에서는 대놓고 그들을 향해 수군거리지 않는데다 오히려 낯선 모자를 향해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친절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활짝 웃는 모습만은 본 적 없었다. 미소를 짓고 있기는 해도 어딘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목각 인형 같았다. 무언가 빠졌는데 겉으로는 완벽해서 미처 그 부분이 뭔지도 모르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목각 인형.

인내심 있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킬리언을 향해 세드릭이 말을 끝맺었다.

―평화롭고, 안정적으로요.

안도한 듯한 미소가 짤막하게 킬리언의 입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표정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세드릭이 미간을 좁히는 순간이었다.

―당신.

―이제 용건을 말하죠.

그의 말을 끊어 버린 킬리언이 테이블 쪽을 눈짓했다. 한눈에도 두툼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열어 봐요.

봉투 안에 빼곡한 건 다름 아닌 이 나라의 땅문서와 건물 문서였다. 수도에서 가장 비싼 상가 건물의 매입 증서까지 발견한 세드릭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현금으로 준비하려 했지만 이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이걸, 왜?

―당신에게 주는 겁니다.

당연히 로위나나 데미안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예상과 정반대인 대답이었다. 잠시 넋을 놓은 세드릭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봉투를 내려놓았다.

―왜 내게 주는 거죠?

―당신이 이제 그녀의 보호자 역할이니까.

돌아온 말에 세드릭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혹시 공작의 탈을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이 마주 앉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져가요.

―마음은 감사하나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녀와 데미안을 보살피려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니까.

―가져가. 당신 침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걸 보기 싫으면.

일어나려는 때였다. 거절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가 그의 목을 졸랐다. 침묵이 흐르고, 다시 앉은 세드릭이 이곳까지 올라온 본론을 밝혔다.

―이곳을 떠날 겁니까?

대답 대신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조만간.

자리를 이미 오래 비워 둔 상태였다. 인편을 통해 중요한 일들은 직접 건네받아 처리한다 해도 관리해야 할 땅도, 섬도, 회사도 많았다. 그만큼 일이 쌓여 있었고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길어진 만큼 호시탐탐 등 뒤를 노리는 정적들도 늘어만 갔다.

―비밀로 하고 떠날 생각이군요.

이어진 정적에서 그의 의중을 알아챈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킬리언이 느릿하게 본론을 꺼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어진 말에 세드릭은 끝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거의 강제로 받아 든 땅문서와 건물 문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그가 차지했다는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공작이 이곳에 올 일이 없으리라는 기대도 약간은 있었다.

그렇게 찝찝함을 안고 다시 돌아왔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는 초록색 눈과 마주하자 양심이 콕콕 찔렸다.

상념에 젖은 그를 깨운 건 반가운 목소리였다.

“일찍 돌아왔구나. 세드릭.”

“누님.”

잠옷 차림의 로렌이 그를 보고 웃었다. 마주 웃은 세드릭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아직도 안 주무시고요.”

“잠이 안 와서. 다이닝 룸에서 와인이나 한 잔 마실까 생각 중이었단다.”

“그렇군요.”

연회장에서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듯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제 팔을 잡게 한 세드릭이 다이닝 룸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래서 볼일은 잘 보고 왔니?”

“네.”

“반지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세드릭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갸웃한 로렌이 뇌까렸다.

“반지를 사러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니?”

로위나에게 정식으로 다시 청혼하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들의 애매한 분위기를 로렌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고, 세드릭의 등을 밀었다.

“아니에요.”

“그거 아쉽구나.”

“…….”

“그녀를 사랑하잖니.”

확신 가득한 목소리에 세드릭은 대답 대신 로렌과 카우치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어깨에 옆얼굴을 묻었다. 말없이 동생의 등을 토닥이던 로렌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전에 걸리는 게 있구나. 그렇지?”

세드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위나의 마음과 그런 그녀를 향한 공작의 마음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한 게 빤히 보이는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게 어쩐지 양심에 걸렸다.

“양심과 제 마음 중 뭘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눈을 감자니 계속해서 따라올 찝찝함이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이어 주자니 도저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들 사이에 뭔가 단단하게 꼬인 매듭이 뭔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무지.”

“세드릭.”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렌이 주름진 눈으로 조용히 웃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렴. 그게 어떤 선택이건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테니까.”

* * *

데미안을 말 안장 위에 앉힌 세드릭이 그 뒤에 나란히 올라탔다. 로위나는 한창 집필 중이었고 가정 교사는 오늘 휴가였다.

데미안은 영지의 숲에서 동물이나 곤충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오늘도 세드릭이 같이 구경하러 가자 말하자마자 바로 망원경을 챙겨 들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한참 빠르게 달리던 말이 천천히 멈춰 선 건 숲의 한가운데에 와서였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느슨하게 말의 고삐를 묶어 둔 세드릭이 데미안의 허리를 잡아 내렸다.

“여기 아기 사슴이 있어?”

“응. 기다리면 나올 거야. 항상 여기서 물을 마시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배설물이나 발자국으로.”

“나도 어떻게 보는지 알려 줘.”

“알았어. 이따 집에 가서 책 보고 알려 줄게.”

“약속이야!”

호기심 가득한 데미안의 눈빛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어릴 적 그와 똑 닮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까지 상상할 정도로.

“네가…… 내 아들이라면 좋을 텐데.”

“뭐라고 했어, 형?”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에 주변을 샅샅이 눈으로 훑던 데미안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보여?”

어깨를 으쓱한 세드릭이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금세 관심을 바꾼 데미안이 다시 울창한 나무 사이사이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수풀 속에서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보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

“어?”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인 데미안이 세드릭에게 방금 본 수풀을 가리켰다.

“뭔가 있는 것 같아. 뭐지?”

“쉿.”

검지를 세운 세드릭이 데미안을 커다란 나무 뒤로 이끌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에 그가 설명했다.

“저번에 작은 동물은 겁이 많아서 사람을 보면 도망친다고.”

“아…….”

납득한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흰 물체가 수풀에서 휙 튕겨 나오더니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그 물체가 데미안을 향해 직진했다. 털썩, 한가득 자란 풀 위로 넘어진 데미안이 뺨을 핥는 뜨거운 혀에 얼어붙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보보!”

예전에 에셀우드에서 키우던 개였다. 언제 조그맸냐는 듯 데미안의 허리춤까지 자란 개가 냄새로 데미안을 알아봤는지 신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하! 간지러워!”

아무리 봐도 보보가 분명했다. 정신없이 뺨을 핥는 개를 밀어낸 데미안이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가렸다. 어림도 없다는 듯 보보가 손등까지 핥았다.

“흐히히! 간지럽다니까!”

감동의 재회는 십여 분 만에 진정됐다. 두 사람은 돗자리를 풀고 자리 잡고 앉았다. 데미안의 옆에 자리 잡고 앉은 보보가 뚫어져라 그들이 가져온 간식 박스를 쳐다봤다.

점심으로 가져온 샌드위치 귀퉁이를 보보에게 떼어 준 데미안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보보가 왜 여기 있어? 형이 데려와 준 거야?”

“글쎄. 보보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헤엄쳐서 온 거 아닐까?”

“정말? 말도 안 돼.”

“혹시 모르잖아. 개가 얼마나 후각도 좋고 헤엄도 잘 치는데.”

이어진 말에 긴가민가한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지한 고민이라도 하는 듯 심각한 얼굴에 세드릭이 말랑한 뺨을 꾹 눌렀다.

“기왕 왔으니 좀 더 들어갈래?”

“좀 더?”

“안에 사냥꾼 오두막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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