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후의 일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다음 날 새벽 첫차 시간에 맞춰 로위나는 졸음에 잠긴 데미안을 데리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괜찮다는데도 끝끝내 배웅한 제녹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주저 말고 제가 드린 연락처로 꼭 인편을 보내 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연락하겠다는 말은 끝끝내 하지 않고 묵례한 로위나가 데미안의 손을 꼭 잡고 뒤를 돌았다. 그렇게 분주한 플랫폼 안으로 들어서서 막 도착하는 기차에 올라타는 참이었다.
“저기!”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출발하려는 기차를 향해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거라는 걸 알아챘을 때 로위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데미안이 크게 하품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엄마……?”
“로위나 님!”
동시에 데미안을 꼭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렸다. 데미안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저 멀리서 제녹이 크게 뭐라 뭐라 외치고 있었다.
“……입니다! 부디!”
목청이 터져라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지만 기차의 굉음과 사람들의 소음으로 인해 대부분이 묻혔다. 금세 승무원이 문을 닫으러 다가왔다.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창문 너머로 플랫폼과 제녹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작아졌다.
* * *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두 모자를 로렌은 아무 말도 없이 받아 줬다. 꿈인 줄 알고 몇 초간 얼떨떨하게 서 있던 세드릭은 데미안을 세게 끌어안기까지 했다.
시골 영지로 돌아오고 나서 다시 평화로운 나날이 찾아왔다. 로위나는 곧 낮에는 차기작을 집필하느라 바빠졌다. 데미안 또한 낮에는 세드릭과 곤충 채집 및 동물 관찰을 하거나 가정 교사에게 수업을 받느라 나름대로 분주했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바쁘게 지내던 평화가 깨진 건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
“엄마. 우리 아빠랑 언제 다시 봐?”
기습처럼 날아온 질문에 로위나는 동화책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어두운 램프 등 아래서 로위나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데미안이 거듭 물었다.
“엄마는 아빠 안 보고 싶어?”
“데미안…….”
“아빠가 우리 언제 데리러 와?”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로렌의 영지로 돌아오는 내내 변명처럼 주워섬긴 말이었다. 아빠가 매우 바쁘고 우리를 신경 써 줄 여력이 없어 잠시 내려가 있는 거라고. 바쁜 일이 끝나면 우리를 데리러 올 거라고. 서툴게 내뱉은 핑계가 독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동화책을 내려놓고는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쎄. 모르겠어. 아직 기다려야 할 거 같아.”
“얼마나?”
“데미안.”
계속 이어지려는 물음을 끊은 로위나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싫어? 잘 지내고 있었잖아.”
“싫지는 않아. 세드릭 형도 너무 좋고 로렌 아주머니도 친절하고, 또 선생님도 정말 재밌고…….”
바로 고개를 저은 데미안이 로위나의 질문을 부정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데미안의 뺨을 가볍게 늘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계속 여기 사는 건 어때?”
“뭐?”
“당분간 계속 사는 거 말이야.”
데미안의 말대로 이곳 사람들은 그들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했으나 영원히 이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지않아 따로 집을 얻어 독립해야 할 거고 지금은 그때까지 잠시 신세를 지는 단계였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 말이 없던 데미안이 폭탄 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엄마. 혹시 세드릭 형이랑 결혼해?”
“……뭐?”
“저번에 로렌 아주머니가 그랬어. 부부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나중에는 마음이 식어 이혼하기도 한다고.”
“…….”
“엄마랑 아빠도 그런 거야?”
담담한 어조였으나 말끝이 떨렸다. 물기 어린 눈에는 불안함과 혼란이 가득했다.
“나 세드릭 형 좋지만, 그래도 우리 아빠는 아니잖아. 우리 아빠는 아빠가 아니면 안 되는데…….”
“데미안.”
듣다못해 데미안의 말허리를 잘라 낸 로위나가 달래듯 속삭였다.
“엄마에게 네가 제일 중요하고 소중해. 네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누군가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그럼.”
이전의 경우엔 로렌의 목숨이 위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치른 결혼이었다.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았던 짧은 약식 결혼. 그마저도 사고로 인해 무효가 되었으니 세드릭과의 관계도 애매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더 이곳에 길게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약속……이지?”
“약속할게.”
두 새끼손가락을 얽고 거듭 약속한 뒤에야 데미안은 잠들었다. 아들이 완전히 꿈나라로 간 것을 확인한 로위나가 느릿하게 침실을 나왔다.
길게 하품하며 작업실로 가는데 저택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더니 집사의 반가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도련님, 일찍 돌아오셨군요. 학회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집사의 말에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막 코트를 벗어 집사에게 건넨 세드릭이 다정하게 대꾸했다.
“원래 하룻밤 묵으려고 했는데 역시 타지는 불편해서 말이죠.”
“잘 돌아오셨습니다. 목욕물을 먼저 준비할까요? 아니면 식사를 먼저?”
“식사는 됐고 목욕을 하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손에 든 건?”
“괜찮습니다.”
세드릭이 들고 온 걸 눈치채고 빙긋 웃은 집사가 지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던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던 로위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로위나였다.
“돌아오셨어요.”
“……네. 데미안은요?”
“자고 있어요. 늦은 시간이니까요.”
“아.”
로위나의 대답에 뒤늦게 현관의 괘종시계를 확인한 세드릭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일찍 온다고 부리나케 온 건데 벌써 이 시간이군요.”
“손에 든 건요?”
로위나의 관심이 그가 들고 있는 커다란 선물 상자에 쏠렸다.
“데미안 장난감이요. 갖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큰 걸요?”
“기차역 조립 장난감이거든요. 내일 하루 종일 해야 할 판이에요.”
너털웃음을 지은 세드릭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다시 내려앉은 침묵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올려다보는 눈에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보였다. 데미안과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 없는 세드릭이었다. 기다리겠다고 전에 했던 말 그대로 그녀의 곁에서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단둘이 남을 때면 로위나는 의식적으로 세드릭을 피했다. 지금으로선 그의 마음에 답해 줄 여유가 없는 데다 남자에게 더는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헛기침을 한 로위나가 뒤를 돌려는 때였다. 진중한 질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어디 불편한 건 없죠?”
“……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던가 불편한 데요.”
“없어요. 워낙 잘해 주셔서.”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옅게 웃은 세드릭이 잠시 망설이다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세드릭 씨도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작업실로 향하던 걸음을 다시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세드릭이 재킷 안주머니에 숨겼던 구깃구깃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학회에 갔다 온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가 간 곳은 다름 아닌, 로위나가 떠나온 수도였다.
아무도 모르게 데본셔 공작가의 봉납이 찍힌 편지를 받아 들고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전과는 달리 순순하게 문이 열렸다. 미리 마중 나온 제녹이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따라오시죠.
제녹은 전에 왔을 때와 다르게 바로 본채로 그를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건물에 들어서는데 전과 다른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훅 끼쳤다. 복도의 모든 도자기와 액자들이 흰 천으로 덮여 있었고, 원래라면 분주하게 하녀와 하인들이 돌아다녔을 넓은 저택 안은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하고 고요했다.
무엇보다 저택의 분위기를 더욱 우중충하게 만든 건 무겁게 닫힌 커튼이었다. 환한 낮인데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의지할 빛이라곤 그저 제녹이 들고 있는 램프 등뿐이었다.
한참 긴 복도를 따라 걷던 제녹이 어느 커다란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저하께서 여기 계십니다.
낯선 공간에 대한 의아함도 잠시, 닫힌 문이 풍겨 오는 위압감에 세드릭은 긴장된 등을 바르게 폈다. 노크하기 전 제녹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들어가시게 되면 큰 소리를 내거나 물건을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지금 매우…… 신경이 날카로우시거든요.
마지막 말이 어쩐지 심상치 않게 들렸다. 마른침을 삼킨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얼굴로 제녹이 노크했다.
―저하. 고드웰 씨가 오셨습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더 제녹이 노크한 후에야 뒤늦게 방문 너머로 짤막한 말이 들렸다.
―들이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끼이익, 육중한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제녹은 그가 어둠투성이인 방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당황해서 문고리를 잡는데 깊숙한 동굴 안쪽에 울리는 듯한 쉬고 낮은 목소리가 세드릭을 붙잡았다.
―왜 머뭇거리지?
―…….
―들어왔으면 이리 와서 앉아요.
존대였으나 어투는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제녹의 말대로 날카로운 느낌이었지만 처음 봤던 날처럼 베일 듯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땀이 밴 주먹을 쥐었다 편 세드릭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