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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09화 (109/120)

109화

동화가 끝나자 데미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금세 잠이 들었다. 킬리언은 축 늘어진 아들의 몸을 조심스레 안고 계단을 올랐다. 포근한 침실에 작은 몸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는데 고사리 같은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아빠…….”

“…….”

“무슨 꿈을 그렇게 길게 꾼 거예요?”

침대에 누울 때 깼는지 동그랗고 새파란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데미안이 대답을 독촉했다.

“네?”

“네 꿈.”

묘한 눈으로 아들을 내려다본 킬리언이 속삭였다.

“너랑 네 엄마 꿈.”

“정말요?”

“그럼.”

그 언젠가 기차에서 로위나가 말했던 꿈이었다. 예쁜 집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 꿈속에서 데미안은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고, 로위나는 아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글을 쓰고 요리를 했다. 볕이 좋은 날엔 두 사람은 산책을 하고 뱃놀이를 했다. 노를 젓는 그의 옆에서 부채질을 해 주는 로위나와, 그런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데미안.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는 꿈이었다.

막막하게 아름다워서 하염없이 지켜보고 싶은 꿈이었다.

그는 일부러 죽음을 택했던 졸렬하고 미련한 남자를 비웃었다. 괴한과 마차를 탄 건 자포자기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아주 작은 파편일지라도 그렇게 죽어 버린다면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방식으로나마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영원히 남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그저 꿈이었다. 졸렬한 바람도 허사로 돌아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예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의사의 진단을 들으며 그는 완전히 꿈에서 깨어났다.

이런 불완전한 상태로 두 사람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죄책감을 이용해 발목을 잡는다 해도 모두 불행해질 뿐이었다.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웅얼거린 데미안이 잡았던 손을 놓고 새근새근 다시 잠들었다. 반듯한 이마와 코, 입술을 한 손으로 새기듯 쓸어내린 킬리언이 한참이나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뒤를 돌자 언제 올라왔는지 팔짱을 낀 로위나가 문설주에 기대서 있었다.

널브러진 동화책을 치운 로위나가 따뜻한 차를 주방에서 가져왔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느릿하게 찻잔을 더듬어 쥔 킬리언이 한 모금 마셨다.

“맛있군. 고마워.”

“고맙긴요. 여긴 내 집이니까 손님을 대접하는 것뿐이에요.”

방금까지 한 가족처럼 저녁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낸 게 무색하게도, 철저하게 그를 배제하는 말이었다. 속이 쓰렸으나 킬리언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사이 로위나가 먼저 운을 뗐다.

“할 말이 있다고요.”

“응. 당신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말하라는 의미로 킬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 뜸을 들인 로위나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일단 고마워요.”

“…….”

“나와 데미안을 지켜 준 거요.”

“그럴 필요 없어. 당연한 일이니까.”

담백하게 대꾸한 킬리언이 건조한 눈을 한 손으로 비볐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치사나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설령 그게 목숨을 걸었던 일이라 해도 그녀와 데미안과 관련해서는 그조차 하찮은 일이 되어 버렸다. 심장을 빼내야 한다 해도 기꺼이 할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비록 이대로 실명한대도.

“할 말이 그게 다예요?”

담담한 반응에 잠시 눈을 깜박인 로위나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뻔뻔한 얼굴도 오랜만에 보니 얄밉기는커녕 반가웠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자 로위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까. 굳이 들춰내지 않고 덮는 게 좋을까. 오늘 하루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하고 또 고민한 질문이었다. 이성은 그저 그냥 모른 척 넘어가라 속삭이는데 가슴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킬리언을 향해 로위나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왜 그 남자의 몸수색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죠? 왜 그 남자와 단둘이 마차를 탄 거예요? 바로 치안 판사에게 맡기거나 하지 않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리를 쓸어 올린 킬리언이 대꾸했다.

“변덕이었어.”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가만히 눈을 피하는 킬리언을 쳐다보며 로위나가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왜 내 로브에 몰래 이걸 넣었어요?”

그녀가 내민 건 다름 아닌 상속장이었다.

“…….”

“말해 봐요.”

이어진 독촉에 킬리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문했다.

“마지막 선물이었지. 그게 이상한 일인가?”

대답 대신 킬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꾹 닫힌 옆얼굴을 보며 로위나가 한 차례 깊게 심호흡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죽었으면 나랑 데미안이 어떨지 생각은 해 봤나요?”

“…….”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살지, 얼마나 괴로울지 생각은 해 봤어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 장장 14시간의 수술이 이어지는 동안,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이어진 건 더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의식이 없는 보름 내내 로위나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쯤 되면 신이 그녀를 단단히 갖고 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겨우 데미안의 무사를 확인해 마음을 놓나 싶었는데 이번엔 킬리언이라니.

“…….”

“끝까지 말 안 하겠다는 거군요.”

한 번 입을 다물면 무슨 수를 써도 입을 열지 않는 남자였다. 대치 끝에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백기를 들었다.

“……좋아요. 이제 내가 들을 차례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킬리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멍하니 그의 손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죠?”

“펼쳐 봐.”

얼결에 그가 내민 걸 받아 든 로위나가 입을 벌렸다. 백지 수표책이었다.

“이건…….”

“언제든 얼마든 써도 괜찮아. 당신이 필요한 대로 써.”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봉투가 연달아 나왔다.

“그리고 이건 땅문서와 건물 문서야. 당신이 귀국해서 직접 집을 짓고 살아도 괜찮고 아니면 매매하거나 임대를 해도 괜찮겠지.”

“잠시만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몰아쳐서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킬리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섬과 공작저의 경우 소유주가 사망한 후에야 상속의 형식으로 넘길 수 있으니 그건…….”

“그만해요!”

마치 자신이 죽기를 기다리라는 말처럼 들렸다. 참을 수 없어진 로위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어요?”

“이게 이상한 일인가?”

“뭐라고요?”

“데미안은 내 아이고, 당신은 내 아이의 엄마야.”

“…….”

“그러니 양육비와 생활비를 지급하는 건 당연하지.”

다분히 계산적인 말이었다. 듣는 순간 로위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적어도 이런 식의 대화는 아니었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필요 없어요. 나도 데미안을 키울 만한 경제력은 있으니까.”

“…….”

“그러니 본론을 말해요. 결국 당신이 하려는 말.”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된 공기가 숨통을 조일 것처럼 공간을 에워쌌다. 참다못한 로위나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지 않는 킬리언에게 손을 뻗었다.

“말해요.”

매끈한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한 로위나가 명령했다. 눈을 내리깔았던 킬리언이 순응하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했으나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위화감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믿기지 않는 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남자에게 연락했어. 내일 당신을 데리러 오라고.”

“……누구에게, 뭐라고 했다고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뇌가 정지해서 입술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세드릭 고드웰에게, 당신을 데리러 오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식은 차가 머리에 쏟아졌다. 차를 쏟아부은 로위나가 보란 듯이 상속장과 그가 내민 것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들을 킬리언은 덤덤하게 내려다봤다.

긴 속눈썹에 맺힌 물이 고개를 들자 눈물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원래 그와 떠날 생각이었을 텐데. 더는 귀국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오히려 좋아해야 하지 않나.”

“당신은 뼛속까지 오만하고 못된 악한이에요.”

“……나도 알아.”

“그래도 조금은 바뀐 줄 알았던 내가 멍청했지.”

“…….”

“조금이라도 흔들렸던 내가 바보 같아 화가 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순간, 로위나는 충격과 함께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매달리길 기대했다. 당신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제발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하기를 기다렸다.

외면했으나 그녀가 가졌던 건 분명 미련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랑이었다. 오래전 다 타 버려서 재만 남은 줄 알았는데 작은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 타다 남은 불씨 때문에 온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해 줄게요. 그러나 이건 내 선택이에요. 당신 돈도, 땅도 필요 없어요.”

홱 등을 돌린 로위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작게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킬리언은 묵은 숨을 토해 냈다. 뻣뻣하게 곧추선 허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이 뽑히는 느낌이었다. 산채로 불에 달궈지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심장도 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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