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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08화 (108/120)

108화

“아아악!”

총알이 박힌 곳은 다름 아닌 낯선 여자의 허벅지였다. 비명과 함께 주저앉은 여자는 피가 철철 흐르는 허벅지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로위나는 눈앞의 여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총구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는 순간이 느리게 흘렀다.

“……킬리언.”

그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다. 간신히 일어났는지 땀에 절은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동시에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밀려들었다. 그 정체를 알아내려는데, 등 뒤로 소란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

“세상에!”

“여기! 여기 좀 와 보세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간호사와 깨어난 킬리언. 그가 손에 쥔 총. 세 장면을 번갈아 목격한 이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총에 맞은 여자는 수술실로 이송되기 무섭게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때문에 정체를 알아내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지만, 신분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맞았다.

제녹의 추측에 의하면 이번 암살 미수는 길리터스 회사에 막대한 빚을 진 조직의 소행이었다. 꼬리를 밟히지 않고 삼엄한 병원을 뚫기 위해 일부러 간호사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시킨 거라는 결론이었다.

정신없이 상황이 휙휙 바뀌었다. 급변하는 주변에 로위나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 님.”

“…….”

“로위나 님?”

반쯤 넋을 잃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로위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제녹 씨.”

“제 말 들으셨나요?”

“……아니요. 죄송해요.”

녹슨 경첩이 삐거덕거리듯 고개를 저은 그녀가 두 손을 내려다봤다. 분명 피가 튀어 붉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했다.

“괜찮습니다. 정신이 없을 만도 하죠.”

옅게 웃은 제녹이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자면 저하의 몸 상태는 괜찮습니다. 방금 의사에게 듣고 오는 길입니다.”

긍정적인 결론에 로위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잔뜩 힘이 들어갔었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간의 피로와 긴장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신께 감사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예.”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어쩐지 제녹의 안색이 어두웠다. 심각한 문제가 해결됐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그늘진 얼굴이 이상했다. 일어나려다 말고 로위나가 멈춰 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꿀꺽 침을 삼킨 제녹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내일 다시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무거운 공기가 병원 복도에 내려앉았다. 왜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로위나는 속으로 삼켰다. 보름여 만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워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수 있었다.

“알았어요. 내일 아침 데미안과 함께 올게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마차는 미리 준비시켜 놨으니 돌아가시면 됩니다.”

“이제 저 사람, 안전하겠죠?”

“호위를 두 배로 늘렸고 병원 관계자들을 전부 조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로위나는 병원을 나갔다. 마차 앞까지 그녀를 배웅한 제녹은 다시 병실 문을 열었다.

“저하.”

인기척에 그간 밀어 놓았던 서류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던 킬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로위나는.”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수고했어요.”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린 킬리언이 몇 줄을 더 읽어 내리다 확 종이를 구겼다.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는 손길에 제녹이 황급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건조한 목소리가 바로 질문을 부정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킬리언이 꽉 주먹을 쥐었다.

“안경을 써도 읽히지가 않아.”

“의사가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영구적일지도 모르지.”

담당 주치의는 수도에서 꽤 고명한 의사였으나 시신경에 영향이 있었는지, 아니면 심리적인 원인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후자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치유가 될 거라고 보고 있고, 전자의 경우 일부 시신경의 손상이고 완전 손상이 아니라면 지속적인 치료를 통해 완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한 제녹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완전히 안 보이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신을 차린 순간 제일 먼저 보인 건 바로 로위나의 흐릿한 형체였다. 간호사가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꽤 위험한 상황이라 판단했다.

혹시 몰라 제녹이 베개 밑에 총을 숨겨 놓은 게 회심의 카드였다. 바로 빼 들어서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심장을 쏜다는 게 조금 빗나가 허벅지를 맞췄다.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로위나가 그를 바라봤다. 고개가 자신을 향한 건 느껴졌으나 그뿐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알아차리기 전 사람들이 밀려들었고 모든 상황이 일단락됐다.

“내일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기자들을 모아요.”

술렁대는 소문을 잠재우고 건재함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킬리언의 속을 읽은 제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쪽에서 선물을 보냈으니 우리도 답례를 해야지.”

안경을 벗은 킬리언이 습관처럼 가슴 앞섶을 뒤졌다.

“눈알 하나면 될 것 같은데.”

“알았습니다. 아, 담배 드릴까요?”

불쑥 들려온 질문에 킬리언이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개비만.”

제녹이 담배를 그의 입에 물리고 필터에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가 나오는 가운데 뜸을 들인 제녹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로위나 님과 데미안 님은요?”

비수 같은 질문에 킬리언이 턱에 힘을 줬다. 의식이 없었으나 지난 보름간 흐릿하게 들려왔던 목소리는 기억했다.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로위나의 목소리와 새처럼 재잘대는 데미안의 목소리.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다. 눈앞에서 영영 놓칠 뻔한 몸을 꼭 끌어안고 모두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저하.”

“내일.”

대답을 기다리던 제녹이 참다못해 다시 입술을 달싹이자마자 그가 말허리를 끊었다.

“내일 저녁에.”

* * *

감격의 재회는 다음 날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제녹의 말로는, 킬리언이 그간 밀어 놓은 시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소문을 잠재우느라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바쁘다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기다리는 내내 로위나는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기다림은 퇴원 수속을 마친 그가 그들이 있는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끝났다.

“아빠!”

해맑게 웃은 데미안이 킬리언을 알아보자마자 조르르 달려갔다. 막 일어나 무리가 가지 않을까 놀란 로위나가 제지하려 했으나 느슨하게 풀린 입가를 보고 뻗은 손을 내렸다.

“보고 싶었어요.”

낯선 호칭에 멈칫한 것도 잠시, 커다란 손이 품에 쏙 안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진난만한 강아지처럼 손길을 받던 데미안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잖아요. 왜 이제 오세요?”

“…….”

“나 많이 안 보고 싶었어요?”

다다다 이어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못하던 킬리언이 무릎을 접어 앉고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보고 싶었지.”

조금이라도 아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두 손이 부드러운 볼과 이마, 코와 입술을 훑어 내렸다. 데미안이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요!”

밀어내려는 움직임은 다음 순간 멈췄다. 잘게 떨리는 손이 작은 어깨를 감싸고는 깊게 끌어안았다.

“아빠?”

놀란 데미안이 어정쩡하게 눈치를 봤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포옹이 끝난 건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아.”

아빠가 오면 같이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 내내 공복이었다. 멋쩍게 웃은 데미안이 뒷머리를 긁었다. 부자 상봉을 가만히 보고 있던 로위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저녁 식사를 차려 놨어요.”

“…….”

“같이 식사해요. 식기 전에.”

여느 가정집 다를 바 없는 소박하고 조촐한 식사였다.

마침내 엄마 아빠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은 데미안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뜨고 행복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이 꿈에 바라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끝도 없이 하고 싶었던 말과 묻고 싶었던 질문을 쏟아 냈고, 킬리언은 차분하게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했다.

로위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몇 번 킬리언의 손이 서툴게 식기를 다루는 걸 빤히 바라봤다. 후유증이 남은 건지, 여전히 우아하긴 했으나 어쩐지 서툴러 보였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아이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라면 이해했으나, 이따금 손이 부딪힐 때에도 킬리언은 끝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식사 내내 매끄럽게 이어지던 부자의 대화는 한 질문에서 끊어졌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사는 거예요?”

벼락처럼 내리꽂힌 질문에 두 사람 모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데미안이 이상함을 눈치채기 직전, 자리를 털고 일어난 로위나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데미안. 이제 식사를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아빠랑 같이 거실에 갈래?”

“지금?”

“응. 아빠한테 동화 읽어 달라고 할 거라고 그랬잖아.”

“맞다!”

눈을 반짝인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가요!”

손을 잡아끄는 힘에 말없이 따라 일어난 킬리언이 잠시 멈춰 섰다.

“로위나.”

낮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굳은 로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킬리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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